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5화 (55/649)

〈 55화 〉 1. 첫 번째 편지(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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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2학년은 명실상부 가장 활기찬 학년이었다. 막 햇병아리를 졸업하고 여유를 누릴 시기인 덕이었다.

1학년 때는 멋모르고 선배들만 마주치면 굳어버리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1년쯤 지나니 악명 높은 아카데미 생활에도 나름 적응을 끝마쳤고, 3학년처럼 본격적으로 실습을 준비하거나 4학년처럼 파견을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유흥에 탕진하는 시절이었다. 방 밖을 나서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친구들이 잔뜩 살고 있었다. 그 젊은 청춘들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닐지는 뻔했다.

함께 모여 떠들고, 술을 마시고, 여행을 계획하고, 시내로 나가 놀기도 하고.

아무튼 간에 재미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다녔다. 그리고 놀러 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자주 어울리는 무리가 생기기 마련, 앞으로의 아카데미 생활을 함께할 무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만큼이나 교우관계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2학년 사이에서는 소문이 퍼지는 속도도 남달랐다.

어느 학부의 누가 요즘 그렇다더라, 누구와 누구가 어떤 사이더라, 잘 지내는 듯 보이던 누구와 누구의 사이가 사실은 어색하다더라.

얼핏 듣기에 시시콜콜해 보이기만 하는 정보지만, 아카데미의 2학년 학생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야기였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주된 까닭 중 하나가 인맥이었던 탓이다.

아카데미 졸업장은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하지만, 인맥은 성공과 명예를 보장한다. 온 대륙의 인재가 모이는 아카데미에서 매년 각국의 최고위층을 배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공고한 학연의 틀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인맥을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때로 ‘유르디나의 싸가지’처럼 사교성이 유독 떨어지는 학생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아카데미 재학생들은 사교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매달 개최되는 무도회도 그러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귀족들은 그곳에서 정치적 동맹과 유능한 인재들을 얻고, 평민들은 아카데미 바깥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귀족과의 우정을 확보한다.

그러한 복잡한 인간관계의 사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놓쳐서는 안 됐다. 고작해야 갓 성인이 된 이들이었지만, 그 정도로 사회의 생리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2학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소문이 있었다.

검술학부의 두 꽃, 셀린 하스터와 세리아 유르디나의 사이가 유독 좋지 않다는 것.

그 원인은 꽤나 명백했다. 하급 귀족에 어울리지 않는 아리따운 외모를 가진 셀린이 지금껏 연애를 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활달한 성격과 걸걸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는 의외로 일편단심이었던 것이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 또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연심의 주인공은 이안 페르쿠스, 최근에 아카데미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남자였다.

이안이 나름 반반한 외모를 갖추고도 단 한 번도 고백을 받지 못한 까닭도 셀린에게 있었다. 그녀가 대놓고 견제를 하니, 굳이 그에게 들이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모만큼이나 인간관계도 우수한 셀린이었다. 여자들의 사회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진 그녀를 적대해야 할 까닭은 없었다.

이는 고위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지체 높은 가문의 영애가 하급 귀족 남자 하나 꼬셔 보겠다고 하급 귀족과 드잡이질을 하고 싶겠는가?

그래봐야 이겨도 웃음거리, 져도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고위 귀족은 고위 귀족끼리 어울려야 하는 법, 최소한 얼마 전까지 이안 페르쿠스라는 남자에게 그럴 만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광범위하고 촘촘한 인간관계의 사슬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그 예외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유르디나의 싸가지’, 그러니까 세리아 유르디나가 바로 그 예외에 속했다. 애초에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그녀였다. 셀린과 이안의 관계 따위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설령 알고 있었더라도 그녀는 이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처음에는 순수한 동경으로 시작된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세리아는 이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셀린의 심사가 뒤틀리는 것은 당연했다.

최근 들어 세리아와 이안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셀린과 세리아의 대립각은 점점 더 명확해졌다.

그야 늘 차가운 낯빛을 하고 있던 여인이, 이안 앞에 서기만 하면 화사한 미소를 짓는다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 큰일 났구나.’

꽃 하나에 나비 두 마리가 붙은 셈이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또 드문 일도 아니었기에 그 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진흙탕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늘 그랬듯이.

그러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관계에 있던 셀린과 세리아였다. 그때 또 다시 두 사람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델핀 유르디나와 이안 페르쿠스에 대한 소문.

듣기로는 이안이 델핀의 알몸을 보았다는데, 널리 퍼진 소문이 모두 그렇듯 그 원인에 대한 추측은 다양했다.

그중에는 이안이 델핀의 정부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엘시 라이넬라가 입에 담았다가 혼쭐이 난 소문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러한 가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귀족으로서는 치명적인 치부이기 때문에, 그 입을 틀어막기 위해 나섰으리라는 추론이었다.

물론 헛소문이었지만, 그러한 소문이 들려온다는 것만으로도 셀린과 세리아의 낯빛이 차가워질 연유는 충분했다.

그 탓에 검술학부의 2학년들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셀린은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고 다녔다. 대화를 나눌 때는 여전히 쾌활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침울한 분위기만 보더라도 그녀의 기분이 저기압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세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않아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다니던 그녀였는데, 어느 날부터 그 아쿠아마린빛 눈동자에 질척한 감정이 얽히기 시작했다.

싸늘히 가라앉은 눈동자와, 말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몸짓에서는 옅은 살기마저 묻어나올 정도였다. 누가 보더라도 세리아의 기분은 최악으로 보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터진다. 셀린과 세리아는 이제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일지가 문제일 뿐, 그 둘 중 하나가 곧 폭발하리라는 사실은 검술학부의 2학년이라면 누구나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날이 찾아온 것이다.

‘검술 훈련’, 2학년과 3학년이 합동으로 수강하는 ‘검술 실습’ 강의와는 달리 2학년만을 위해 마련된 필수강의였다.

아무래도 3학년은 좀 더 자율적인 훈련이 가능하지만, 2학년은 절대적인 훈련량을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에 생겨난 강의였다.

검술학부의 2학년이라면 누구나 수강해야 하는 강의였다. 그래서 검술 훈련 강의에서만큼은 검술학부의 유명한 두 꽃 또한 마주침을 피할 수 없었다.

셀린과 세리아, 그 두 시한폭탄이 말이다.

사정을 알고 있는 학생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봐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수업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셀린과 세리아는 서로를 본 체 만 체 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셀린이 쌀쌀맞은 콧방귀를 뀌며 눈을 돌려버렸다. 세리아도 무심한 눈빛으로 흘깃 셀린을 살펴보다 다시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지나갈 뻔했던, 그 순간.

팍, 하고 목검이 세리아 옆에 박혀 들었다. 어디선가 튕겨 나온 검이었다.

단번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세리아의 차가운 눈동자가 목검이 날아든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안색이 창백해진 여인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둘이서 장난치듯 대련을 하다 목검이 튕겨 나간 듯했는데,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실수라는 것은 명백했다. 하물며 그 실수를 저지른 당사자도 문제였다.

예전에 세리아의 어머니를 두고 조롱하던 하급 귀족 출신 중 하나, 테안의 위협에 꼬리를 말았던 그 여인들 중 하나였다.

“……아, 아니야! 이건 고의가 아니었어!”

세리아의 싸늘한 응시에 여인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그렇게 외쳤다.

그러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던 세리아였다. 이를 빌미로 걸고넘어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실수를 저지른 그녀에게는 전적도 있었으니까.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구경꾼들은 드디어 시한폭탄이 터지나 싶어 긴장한 낯빛이었다. 세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리아는 잠시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과.”

“으, 응?”

세리아의 차가운 목소리에, 여인은 무심코 멍하니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자 세리아의 눈동자가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과하셔야죠, 잘못을 했으면.”

그 단호한 말투에 여인은 감전이라도 당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비굴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옆에서 조롱을 하면 몰라, 정면에서 세리아를 상대할 자신이 없던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이라는 뒷배에 실력까지 겸비한 세리아와 맞붙는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하물며 지금처럼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 그렇지! 미, 미안해… 내가 조금, 덤벙거리는 성격이라…….”

여인은 그러면서 주춤주춤 세리아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세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그녀가 떨군 목검을 주웠다. 세리아는 그녀가 하는 양을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목검을 회수한 여인은 후다닥 달려 세리아에게서 멀어졌다. 그제야 세리아의 차가운 시선이 멎었다. 그녀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여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후자에는 아쉬움이 반쯤 담겨 있었다는 점이었다.

누구든 불을 지펴야 끝날 상황이었다. 터트려야 한다면 최소한 그 당사자가 그들이 아닌 편이 나았다. 희생자가 사라지면 그들로서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무난히 강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폭탄은 언젠가 터질 테고, 그것이 그들이 옆에 없을 때라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그 순간.

“……야.”

우뚝, 하고 검을 휘두르려던 세리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뒤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수통을 들고 물을 마시고 있던 아리따운 소녀가 하나 서 있었다. 등 뒤로 단정히 정리한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황갈색 눈동자.

그제야 구경꾼들은 잊고 있던 시한폭탄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래, 시한폭탄은 하나가 아니었다.

셀린 하스터. 그녀는 수통의 물을 몇 번 더 입에 털어 넣더니, 이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웃으면서 하자… 실수였잖아, 왜 그렇게 꼽을 줘?”

그녀는 2학년의 하급 귀족 중 여자 무리에서 중심을 맡고 있는 이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당연히, 세리아에게 실수를 저지른 여인까지 포함한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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