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6화 (56/649)

〈 56화 〉 1. 첫 번째 편지(56)

* * *

황갈색 눈동자와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때아닌 한파와 열기가 뒤섞이고 있었다.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이 만나자, 장마전선처럼 그 주위로 구경꾼들이 흩어졌다.

셀린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세리아의 눈동자 또한 서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시로 일관하던 두 여인이 충돌을 일으키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팽팽히 당겨졌다. 셀린은 들고 있던 수통을 다시 허리춤에 매달고는, 천천히 걸어 세리아에게 다가섰다.

그때까지도 세리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셀린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무심함의 표현일지.

아직 그 해답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로지 하나, 세리아를 제외하면.

셀린은 세리아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후우, 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한 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그리고 세리아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요즘 기분 좋지 않을 수도 있어, 응? 나도 이해해… 내 기분도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하나 예민하게 반응하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셀린도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는 점만 빼면.

그러나 지금 이를 지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구경꾼들은 셀린의 말에 무언의 동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셀린은 그러한 일에 능했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를 이용해 그녀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

그래서 그녀는 인간관계에 능통했다. 특유의 사교적인 성미와 더불어 셀린은 분위기를 읽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셀린은 굳이 지금 세리아와 마찰을 빚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 전 이안이 잔뜩 화를 냈던 일을, 셀린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괜히 세리아와 싸우다가 이안과 지금보다 사이가 더 틀어지기라도 하면 그보다 최악은 없었다.

견제를 하더라도 드러나지 않게, 그리고 이안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편이 맞았다. 무엇보다 셀린은 지금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 갈등을 드러내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약점만 잡힐 뿐이었으니까. 그녀는 최소한 겉으로나마 갈등이 봉합되는 모습이 연출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조금씩 이해하면서 하자, 유르디나 양… 따지고 보면 서로 비슷한 처지인데, 너무 울상을 하고 있으면 이안 오빠도 싫어할 거야.”

그러면서 셀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서로 비슷한 처지’라, 느닷없이 델핀 유르디나라는 여인이 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도 상대와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시도는, 곧 화합을 도모하자는 뜻이기도 했다. 이대로 끝을 맺자는 신호였다. 이를 통해 셀린은 몇 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세리아가 화를 낼 당위성이 충분했음에도 세리아를 예민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세리아가 평소에 비해 다소 과민한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셀린은 이를 ‘예민한 반응’으로 단정 지어서 무리에 속한 여인을 보호하려 시도했다.

두 번째, 앞으로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최소한 이안 앞에서 ‘나는 화해하려는 노력을 했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세리아와 싸울 땐 싸우더라도 정작 이안의 마음이 떠나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에게도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셀린이 먼저 화해를 권함으로써, 이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그녀가 아량이 넓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나중에 갈등이 벌어졌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누구든 심정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응원하기 마련이고, 연애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인들의 입김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기도 했다.

세리아보다는 셀린이 더 낫다는 인식이 널리 퍼질수록 유리해지는 쪽은 셀린이었다. 그래봐야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셀린이 본능적으로 내린 결론은 아무튼 그랬다. 화해를 권했다는 구도는 여러모로 그녀에게 유리했다. 그리고 셀린이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그림을 연출한 이상, 상대도 이를 거절하지는 못할 터였다. 최소한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그래, 최소한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세리아는 ‘사교적’이라는 말과 인연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듯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잘 몰라서 그래요.”

오랜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세리아의 말을 들은 셀린의 눈동자에는 의아함만이 스칠 뿐이었다.

세리아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언니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다.’였다.

하지만 세리아에게는 대화 경험이 극단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확한 의사전달을 위해 필요한 부분마저 생략시키고 말았다. 오해를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셀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세리아의 입에서 후속타가 흘러나왔다.

“그러다간, 빼앗기고 말 텐데요.”

그것이 결정타였다. 셀린의 눈빛이 단번에 사나워졌다.

이 또한 세리아는 나름 조언이라고 한 말이었다. 델핀을 조심하라는,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인에 대한 경고.

그러나 그 말이 아무런 해설도 없이 세리아의 입에서 뱉어진 결과, 셀린에게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면 나한테 이안 선배를 빼앗길 텐데.’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비정상이었다.

10년 넘게 짝사랑했던 남자였다. 느닷없이 등장해서 경쟁자를 자처하는 꼴도 같잖은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조롱까지 들었다.

울컥, 하고 차오르는 감정에 셀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강렬한 분노가 응어리졌다. 어느덧 그 황갈색 눈동자에는 싸늘한 적의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아, 그러셔."

서릿발 같은 목소리였다.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알갱이처럼 박힌 듯했다. 미소가 사라진 셀린의 얼굴에는 짜증과 분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주위로 몰려든 학생들은 침묵을 지켰다. 몇몇은 눈짓으로 슬슬 말려야 하지 않겠냐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보다 셀린이 더 빨랐다.

한 걸음, 그녀가 발을 옮기자 두 여인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야말로 지근거리, 셀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언니한테 많이 뺏겨 봤나 봐? 이젠 남자까지… 언니에게 양보하는 자매애가 참 보기 좋네."

그 세리아의 눈동자가 질척이며 가라앉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셀린의 조롱은 세리아의 가장 숨기고 싶은 약점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가능성마저도, 세리아는 절대 이안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델핀을 상대로는 더더욱.

시작은 그렇게 오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미 감정의 골이 깊었던 두 여인에게 묵은 감정을 해소하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세리아의 입에서도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냉담한 목소리가 닿으면 살이 델 듯이 싸늘했다.

”이안 선배는 그렇게 말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니 걱정 마세요. 지난번에 약속했거든요. 그러는 당신은, 이안 선배가 꽤 못미덥나 보네요.“

”이안 오빠가 믿음직스럽긴 해. 그런데 종종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란 말이야… 자꾸 어떤 찐따년이랑 놀아주느라 괜한 시간을 쓰고 그러더라고.“

셀린은 그러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세리아의 얼굴을 낱낱이 훑었다. 세리아의 낯빛은 이미 싸늘해진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웃기네, 너는 왜 그렇게 울상이야? 네가 했던 짓 그대로 돌려받는 것뿐이잖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

세리아는 진심으로 셀린이 무어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조차 없는 그녀에게 연애의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도 제 감정을 ‘우정’으로 정의하고 있는 세리아였다.

하지만 때때로 무지한 자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법이었다. 세리아는 아주 단순히 생각했고, 그렇기에 사안의 본질을 간단히 건드릴 수 있었다.

”제가 이안 선배와 어울려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안 선배한테 직접 말씀하시죠. 괜히 옆에서 저한테 칭얼대지 마시고.“

”……뭐?“

셀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명백히 당황한 반응이었다. 이를 놓칠 세리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화술에 재능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수 사냥을 다지며 단련된 승부사의 감은 존재했다. 상대의 약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약점을 찔렀으면 집요할 정도로 그 부분을 괴롭혀야 한다는 점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세리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막힘없이 쏟아졌다. 상대와 친목을 도모할 생각이 없는 세리아는 기본적으로 달변이었다. 제 생각을 여과 없이 언어로 옮기기만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안 선배한테 가서 따지란 말입니다. 저를 만나지 말라고, 그러지 않으면 나를 만나지 않거나… 그럴 용기까지는 없나요?“

”나는, 이안 오빠가 너와 인연을 끊었으면 좋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니면요?“

침묵, 셀린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세리아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들렸는데요, 제 귀에는.“

셀린이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구도가 이렇게 잡혀버리면 답이 없었다. 그야 마음 같아서는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한 바람이라는 사실쯤은 셀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리아와 같은 연적과는 만나지도 않았으면 하는 마음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이를 인정해 봐야 친구 관계까지 간섭하는 억지만 될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셀린은 아직 이안과 정식으로 연인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그 점이, 셀린에게서 언어를 앗아가 버렸다. 셀린은 조용히 입술을 짓씹었다.

그 정적을 지키고 있던 세리아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셀린 쪽에서 할 말이 없다면 더 싸울 가치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단지 그녀는 단 한 마디만을 남겼다.

”그러고 있다간 빼앗기고 맙니다, 셀린 하스터.“

마치 나처럼.

세리아는 그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그 말이 셀린의 마지막 인내의 끈을 끊어버린 것은 확실했다.

셀린의 황갈색 눈동자가 매섭게 세리아를 째려보았다. 그녀 손이 무심코 제 허리춤을 향했다. 검을 뽑아들 생각은 없었지만, 모든 검사는 적의를 느낄 때 검을 찾는다. 그 정도의 몸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정도로도 책을 잡히기에 충분했다. 다음 순간, 셀린은 차가운 경고를 들어야 했다.

”그 검, 뽑지 마시죠.“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날이 서 있는 진검이었다. 목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셀린에게 경고하는 세리아는 손을 제 칼집에 두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도 없다는 듯.

”……후회할 테니까요.“

단순한 진리를 말하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무례를 넘어선 모욕이었다. 당사자도 아닌 구경꾼들이 순간적으로 숨을 삼킬 정도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셀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그러지 않아도 고위 귀족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던 그녀였다. 그 증오의 대상에게 그토록 노골적인 모욕을 듣고 참을 수는 없었다.

빛살이, 허공에 틀어 박힌다.

마력량만큼은 출중한 셀린의 발검은 순식간이었다. 단숨에 이어지는 연격은 기습의 이점을 살린다면 몇 수 위의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상대는 세리아였다.

카각,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셀린의 칼날이 불꽃을 튀기며 미끄러졌다. 어느새 뽑혀 나온 세리아의 검이 셀린의 발검을 흘려보낸 것이다.

설마하던 칼부림이 일어나자 그제야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말려야 한다는 목소리, 하지만 검을 뽑아든 세리아를 만류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겠냐는 현실적인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본래 ‘검술 훈련’도 강의 시간인 만큼 감독하는 교수가 존재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교수의 개인 사정으로 자율훈련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잠시 출석을 확인하고 떠난 조교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검술훈련장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울 사람을 찾으러 간 것이다. 교수든, 선배든, 누구든 좋았다.

피가 튀기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상해가 일어나면 퇴학 사유에 해당할 만큼 중죄였다.

그 소란에 더 많은 이목이 검술훈련장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몇 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셀린과 세리아는, 어느새 몇 걸음 물러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이 승패를 명확해 보였다. 셀린은 전력을 다한 일격을 가했음에도 세리아의 옷깃마저 스치지 못했다. 그러나 세리아가 가한 견제타의 흔적은 셀린의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 실력으로 검을 뽑은 용기까지는 인정합니다만…….“

세리아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유르디나의 싸가지’, 그녀의 별명을 만든 지나치게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그만하시죠, 승부는 이미 난 것 같은데.“

셀린은 또 다시 울컥해서 땅을 박찼다. 세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야!“

어느 사내의 고함이, 서로의 거리를 파고들던 두 여인의 검격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 여인의 실력차가 문제였다.

세리아는 얼마든지 검을 회수할 여유가 남아있었다. 그녀의 검은 곧바로 제동이 걸려 어느새 허리춤의 칼집으로 거두어졌다.

그러나 셀린은 아니었다. 셀린의 칼날은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거리면서도 나아갔다. 셀린은 이를 악물고 칼날을 멈춰 세우려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칼날은 세리아의 팔뚝 어림을 훑고 지나갔다.

핏물이 번진다. 얕은 상처였다. 그러나 구경꾼들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 어느 사내가 나타났을 때.

그가 본 광경은 하나였다.

검을 든 셀린과, 팔뚝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세리아.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명확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사내, 이안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가 짜증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셀린은 허둥지둥 검을 거두었다. 그녀는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넋을 놓은 얼굴이었다. 이는 졸지에 팔뚝에 상처가 생긴 세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셀린은 이안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안은 냉랭한 태도로 셀린을 지나쳐 버렸다.

이안이 당도한 곳은 팔뚝에 난 상처를 붙잡은 채로, 멍하니 무릎 꿇고 있던 세리아였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품에서 붕대를 꺼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그러한 본능적인 위기감이 셀린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이안 오빠… 나, 나는…….“

”셀린.“

이안은 셀린을 돌아보지조차 않은 채로,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이 그토록 냉랭하게 셀린을 대하는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욱 충격을 받은 셀린의 입이 언어를 상실했다. 이안이 흘깃 뒤를 돌아보았을 때, 셀린을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어서.

”……제발, 다음에 이야기하자.“

셀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세리아 또한 무어라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고 있는 듯 보였지만, 평소에도 말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그녀가 이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아, 세리아? 혹시 모르니까 일단 신전으로 가자.“

단지 이안이 이끄는 대로, 부축을 받으며 그곳을 빠져나갔을 뿐.

홀로 남는 것은 오직 셀린뿐이었다.

우두커니, 절망에 빠진 눈동자로 땅바닥만을 내려다 보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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