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1. 첫 번째 편지(57)
* * *
신전의 복도는 고요했다. 신을 찾는 이들은 대개 침묵을 사랑했다.
간절할수록 인간은 언어를 잊기 때문이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울부짖음이 차라리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였다.
감정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잔여물이 많아진다. 도를 넘은 감정의 격류는 그 이름을 하나로 정의할 수도, 또 각자의 감정으로 분류될 수도 없다. 오로지 그 자신만이 절절이 느낄 수 있을 뿐, 그 누구도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찾으러 신전으로 향한다. 불타고 상처 입은 제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줄 사람은 신밖에 없으니까. 천신 아루스의 집이 아프고 힘든 자들을 위해 늘 열려 있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복도에서 대기 중인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묵묵히 신전의 침묵에 일조하고 있었다.
사무치는 감정이 내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초라하고 답답한 기분에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세리아가 얻은 상처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깊지 않았다. 실수였겠지, 셀린도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신전으로 향하는 동안, 내 부축을 받은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며 내게 말했다.
“저, 저… 선배님?”
“응, 세리아.”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돌려주려고 했으나,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냉담했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때 나는 셀린과 세리아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현장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말싸움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 주위에서 소란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칼부림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곧장 검술훈련장으로 향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장면은 하나였다.
세리아의 팔뚝을 파고든 칼날과, 신음을 흘리며 무릎 꿇은 세리아. 그리고 칼 손잡이를 쥐고 있는 셀린.
그러지 않아도 셀린과 세리아가 싸우고 있다는 소식에 초조해하고 있던 나였다. 그 장면을 보니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고 말았다.
비단 세리아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셀린을 위해서도 나는 화를 내야 했다.
목도도 아니고 진검으로 칼부림을 냈다는 건 징계 사유에 해당했다. 최악의 경우 퇴학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을 뽑았단 말인가.
다시 생각해도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세리아는 조금 더 주눅이 들어 내게 고백했다.
“그, 사실 그녀만 검을 든 것이 아니라… 사실 저도 검을 들고 응수 중이었습니다. 선배님의 목소리가 들리길래 얼떨결에 검을 거두었는데, 셀린 양만의 잘못은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좀 더 참았다면…….”
“……검은 누가 먼저 뽑았는데?”
세리아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눈치를 보는 모양새가, 자신의 대답이 내 기분을 더욱 상하게 했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대답은 필요 없었다. ‘좀 더 참았다면’이라는 말이 이미 그 해답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셀린이 먼저 검을 뽑았다. 내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자, 세리아는 내 기분을 위로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그, 그러니까 이안 선배? 제가 말솜씨가 그다히, 으으… 그다지, 좋지 않아서 오해가 있었을지도…….”
“됐으니까, 신전이나 가자. 다친 애가 뭐 그리 이리저리 말이 많아?”
나는 혀까지 씹으며 변명하는 세리아가 안쓰러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녀를 진료실에 밀어 넣고, 신전의 복도.
얕은 상처가 분명한데 생각보다 진료에 시간이 걸렸다. 아마 아카데미 내에서 칼부림이 났다는 상징성이 복잡한 문제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만약 징계위원회가 열린다면 신전에서 확보한 진술과 부상의 정도가 쟁점으로 부상할 테니까.
내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섰다. 당연히 내 옆으로 와야 한다는 듯한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 나조차도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내게 그럴 만한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본래 둘이었는데, 하나는 지금 이 사단을 만든 장본인이라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레토.”
“어떻대냐?”
그의 목소리는 무심해 보였지만, 일부러 신전까지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이 사안을 꽤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다간 복이 달아난다고, 여동생이 뭐라 했었는데.
“모르겠어, 일단 세리아는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쯧, 하여간 그 왈가닥하는 성격 좀 고치래도 듣지 않더니.”
레토는 혀를 차며 그렇게 궁시렁거렸다. 그의 기분도 그다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친남매처럼 자란 사촌동생이 느닷없이 사고를 쳤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겠지.
나는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엘시 선배의 합류로 드디어 고비 하나를 넘겼다고 생각했더니, 셀린과 세리아가 칼부림을 벌이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셀린과 세리아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칼부림까지 벌인 마당에 어떻게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단 말인가.
레토가 흘깃 내 눈치를 살폈다. 그도 내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 이내 무심함을 가장해서 내게 물었다.
“그래서, 수렵제 조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수렵제 조’라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진의가 셀린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임을 모를 만큼 내 눈치가 부족하진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른세수를 하며 답했다.
“……셀린은 못 끼지, 이대로면.”
“그럼 어떡하려고?”
“테안이라도 데려올까? 또 손도끼 들고 찾아가서.”
남부 열왕국의 명문가, 에이트리 백작가의 테안.
세리아의 따돌림을 주도하다가 나와 악연을 한 번 맺은 적 있는 인물이었는데, 엘시 선배처럼 손도끼로 후려팼으니 또 손도끼를 들고 가면 되지 않겠냐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레토는 내 분위기 환기용 장난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흠, 나쁘지 않은데? 몸 튼튼하기로 유명한 놈이니 전방에서 활약할 수 있을 테고, 남부 열왕국 출신은 의리를 중요시하니까.”
“……됐다, 세리아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걸.”
셀린은 따돌림까지는 주도하지 않았다. 뒷담화를 해서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긴 했지만, 그마저도 최근의 일이고 사과하면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다.
또 이 기회에 세리아와 셀린이 화해한다면 내 교우관계도 조금 더 원만해질 것이고,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셀린을 영입하려 했지만 테안은 달랐다.
테안은 그 이전부터 꾸준히 세리아에게 시비를 걸고 괴롭혀 오던 녀석이었다. 최근에는 세리아를 건들지도 않는다지만, 그 과거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과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세리아라면 의외로 별 생각 없이 넘어갈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회의적이었다.
실력이야 훌륭하긴 했다. 테안이 온다면 세리아와 엘시 선배, 그리고 나와 함께 4인조를 이루게 될 텐데 꽤 화려한 명단이었다.
내 이름만 빼고 말이지, 나는 그렇게 잠시 망상에 빠져 있다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내 입에서 짜증스러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러게 왜 시비를 걸어서…….”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누구 이야기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셀린 이야기였다. 레토는 흐음, 하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내게 들은 정보를 정리해 전해 주었다.
“애들 말로는, 세리아가 조금 심하게 나왔다곤 하더라.”
“아무리 그래도 칼을 먼저 뽑아?”
나는 울컥해서 다소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가, 아차 싶어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레토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나지막이 말했다.
“세리아는 고위 귀족이니까, 자존심까지 건드리니 못 참았겠지.너도 알잖아, 하스터 남작님이 어떤 꼴을 당하셨는지.”
‘하스터 남작님’,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셀린의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쇠약해지셔서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 다수의 고위 귀족들이 개입한 이후로, 셀린은 고위 귀족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입에서 달구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펜하우저랑 유르디나는 달라.”
“그 이권다툼에 끼어든 고위 귀족이 알펜하우저뿐인 줄 알아? 최소 여섯 가문이 들어와서 하스터 영지를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그러면 안 되지!”
무심코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나는 잠시 움찔했지만, 레토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입에서 결국 한숨이 새어나왔다. 내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스터 가문에는 이제 셀린밖에 없잖아. 아카데미 졸업장은 따고 돌아가야 할 것 아니야, 그리고 적당한 혼처도 찾아서… 다시 하스터 가문을 부흥시켜야지.”
그래서 나는 더더욱 화를 내고 만 것이다. 셀린을 위해서, 셀린이 이래서는 안 되니까.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잘난 고위 귀족들에게 당하지 않겠다고 아득바득 인맥을 관리하고 사람들을 모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봐야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면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어쩌면 내가 이토록 화가 난 까닭은, 세리아가 다쳤기 때문이 아니라 셀린이 걱정되었던 탓일지도 몰랐다.
10년 이상 알고 지내던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내 입에서 기진맥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잘못일까.”
내가 세리아와 가까워지지만 않았다면, 셀린과 세리아가 칼부림을 벌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답답한 마음을 담은 한탄이었다. 그러자 레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마치 나를 위로하려는 듯.
“응, 당연하지. 이제 알았냐?”
그 말만큼은 위로와 거리가 무척 멀었지만 말이다. 내 짜증스러운 시선이 레토를 향하자, 그는 의외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게 그래, 좀 지랄 맞거든. 이유도 없이 널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나름 잘 풀어보겠다고 했는데 꼬이는 경우도 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고, 총체적 난국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질문에 레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하고 웃을 뿐이었다.
“낸들 아냐? 네 좆대로 해, 어차피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정 심란하면 밤에 위스키 한 병 원샷 때리고 자던가.”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이 되냐?”
“마시지 않는다고 해결되지도 않잖아? 그럴 바엔 차라리 잠깐이라도 잊어버리란 거지.”
하여간 말솜씨만큼은 훌륭한 녀석이었다.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삼켰지만 듣고 보니 딴에는 맞는 말이다 싶었다.
나도 저런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으면, 셀린과 세리아의 사이를 보다 원만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물론 헛된 생각이었다.
오늘 밤에는 위스키나 마셔야겠다, 내가 내심 그렇게 마음을 정했을 때였다.
진료실의 문이 열리더니, 세리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나와 레토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를 향했다.
세리아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내게 말했다.
“그, 이안 선배? 성녀님께서 들어오시라고……,”
“……나?”
그야말로, 느닷없는 부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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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햇빛이 형형색색의 유리를 투과하며 천연색으로 물들었다. 진료실의 풍경은 삭막한 듯 보이면서도 정갈했다.
신전은 늘 그랬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검소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웅장한 건물과 당대의 명사들이 그린 예술품조차도 이 본질적인 순백색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정작 그러한 곳이 기부금이 없으면 병자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점이, 종교와 현실의 간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신전을 유지할 수 있는 운영자금이 나오지 않는 탓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 순백의 도화지 위에 하나의 초점이 잡혀 있었다. 모든 시선을 모으는 연분홍빛의 눈동자, 그리고 그 아래로 그려지는 여성적인 굴곡.
하나의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그녀는, 놀랍게도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이름 붙이기를 ‘성녀’, 고아원 출신이지만 그 타고난 신성력과 자애로운 성격으로 신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여인이었다.
제국이든 성국이든 출신 성분을 따지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데도 고아원 출신이 성녀의 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가진 바 재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입지전적인 인물 앞에서, 슬쩍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앞에 가 앉았다.
세리아는 이미 떠나도 괜찮다는 언질을 받은 후였다. 그렇다면 성녀님께서는 나와 독대를 원한다는 건데, 나로서는 감도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성녀님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안 형제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형제님의 절친한 친구인 셀린 하스터 양과 세리아 유르디나 양께서 다투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만…….”
사건의 간략한 개요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나를 부른 성녀님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성녀님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말해야 했다.
성녀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에서 맑고 청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두 분께서는 아무래도 이안 형제님을 두고 다투신 듯하군요.”
“그, 그랬나요? 그것까진 저도 잘…….”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성녀의 입가에도 자애로운 미소가 맺혔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열렸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
“좋으셨나요?”
“……네?”
나는 조금 당황해서, 말을 절고 말았다. 그럼에도 성녀님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단지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로 물었을 뿐.
“좋으셨냐고, 물었습니다. 이안 형제님.”
내 혀가 그대로 얼어붙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