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58화 (58/649)

〈 58화 〉 1. 첫 번째 편지(58)

* * *

진료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성녀님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을 달싹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위가 조금 싸늘해진 느낌, 성녀님의 미소는 언제나와 같이 따스하기 그지없는데 내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버, 어버버 하며 내 입은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셀린과 세리아가 나를 두고 다투는데, 좋냐니?

당연히 좋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어떠한 위기감이 감돌았다. 내가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던 성녀님의 입에서, 자그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푸흡… 아하하하핫!”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성녀님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마치 댐에 균열이 가자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했다. 어찌나 즐거웠던지 성녀님의 눈에는 옅은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한동안 책상을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리던 성녀님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를 보며 웃음의 잔향을 흘렸다.

겨우 웃음을 그친 성녀님은,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매혹적인 눈동자였다.

“노, 농담… 푸흐흐, 농담이었어요, 이안 형제님. 당황하셨네요.”

“그, 그랬습니까?”

어떤 종류의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농담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는 내 모습을 보고 성녀님은 키득거리며 마저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리아 자매님께서 이안 형제님을 걱정했거든요. 마음이 많이 불편해 보인다고.”

그랬구나,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성녀님은 그 말이 신경 쓰여 굳이 내 기분을 풀어주려 농담을 던진 듯했다.

솔직히 즐겁다기보다는 가슴이 조마조마하다는 표현이 알맞은 농담 같았지만, 아무튼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내 기분을 달래주려고 성녀님쯤 되는 사람이 독대를 요청하진 않았을 터였다. 사적인 자리라면 몰라도 그녀는 지금 진료 중, 공적인 업무 중이었다.

당연히 마땅한 사유가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를 묻기도 전에, 성녀님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아시다시피, 아카데미 내에서 진검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어요. 최소한 사람을 상대로는 그렇죠. 그런데 세리아 자매님의 상처를 살펴보니, 아무래도 날붙이에 의한 자상 같더군요.”

“그, 깊었습니까?”

나도 이미 몇 번이고 확인한 바였지만, 아무래도 전문가의 소견만큼 정확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세리아가 많이 다쳤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성녀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얕은 상처예요. 만약 대인 전투에 의해 발생한 부상이 아니었다면, 몇 분 간 치료하고 끝났을 만한 수준?”

“성녀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연분홍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보충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릴까요?”

“글쎄요…….”

난감하다는 듯, 성녀님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더욱 애가 닳아 간절한 눈빛으로 성녀님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성녀님은, 흘깃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사자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것 같고, 우발적인 사건에 부상의 정도도 크지 않아요. 제가 잘만 말한다면, 징계위원회까지는 열리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떻게 해야 셀린을 구할 수 있을까.

성녀님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 볼까? 흔해빠진 대사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불쌍한 셀린 좀 살려주세요, 그 애가 사실 어린 시절 고위 귀족들 탓에 아버지를 잃은 뒤로…….

그 외에도 어쩌고저쩌고, 그러한 말들이 생각났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말이 내 입에서 뱉어지는 일은 없었다.

성녀님이 그보다 먼저 내 애절한 눈빛을 살피더니, 다시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내 어리둥절한 눈이 그녀를 향하자, 성녀님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안 형제님. 용서할 수 없는 자라면 몰라, 누군가의 불행을 굳이 지켜볼 만큼 천신 아루스의 은혜가 모자라지는 않답니다.”

다행이었다. 내 안색이 대번에 밝아지자, 성녀님은 조금 우쭐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손이 가슴 위로 얹어졌다.

언제 보아도 양감 넘치는 젖가슴이었다. 손이 위에 올라가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잔도 받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걱정거리가 해소되자마자 불민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성녀님은 그러한 내 시선조차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그녀는 단지 눈 한 쪽을 살짝 찡긋하며 내게 말할 뿐이었다.

“물론, 이안 형제님과 제 사이니까 봐드리는 것도 있어요.”

“……성녀님과 제 사이요?”

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그러면 됐다는 듯 성녀님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 어느새 내가 가득 차올랐다.

“네, '우리 사이'… 자, 그럼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평온한 하루가 되시기를, 임마누엘.”

나는 그렇게 떠밀리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녀님은 공무로 바쁜 몸이었고, 내게 그 시간을 빼앗을 만한 명분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떠나기 전, 성녀님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안 형제님.”

문을 열기 직전, 내 눈동자가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성녀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가 처음에 던졌던 농담… 어쩌면, 농담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그 말뜻은,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는, 성녀님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혹적이었노라고.

내가 진료실을 떠날 무렵의 일이었다.

**

진료실을 나서니 세리아와 레토는 이미 떠난 뒤였다. 세리아는 남아서 나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내가 억지로 등을 떠밀었던 기억이 났다.

레토야 뭐, 기다리라고 해도 귀찮다고 떠날 녀석이었으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 위스키나 한 잔 하고 잘까, 하고 있던 차였다.

누군가가 툭, 하고 내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걸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피할 뻔했다.

최근 예민해진 내 감각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대다수의 움직임을 포착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다가온 사람은, 그러한 내 감각마저 속이고 접근한 것이다.

내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으로 향했다. 검사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내게 어깨동무를 건 사내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선이 얇은 얼굴에, 중성적인 외모. 옥색 머리카락은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마른 신체는 유약해 보였지만, 속아서는 안 됐다.

이 사내야말로 검술학부 3학년의 차석, 그 실력만으로는 세리아조차 아직 상대가 되지 않는 검의 달인이었다.

성국의 유렌, 그는 푸른 눈동자를 빛내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야, 이안. 이거 오랜만인데?”

“……유렌? 너 성도에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 내가 그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했던 까닭은, 그가 성국의 수도인 성도 룬으로 떠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주교를 도와 중요한 과업을 진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학기 초부터 통 보이질 않아서 알게 모르게 쓸쓸함을 느끼던 차였다.

검술학부 2학년에 속한 하급 귀족 출신 여자들이 셀린을 중심으로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면, 3학년 검술학부의 유렌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남자들 사이를 잇고 있는 인물이었다.

쾌활하고 사교적인 성격은 물론이고, 그 솔직담백함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성국 출신이라 기본적으로 바른 생활 사나이고.

단지 검만 관련되면 살짝 맛이 가긴 하는데, 그 정도야 실력자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에서는 미덕으로 받아들여질 만했다.

그랬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나는 반가움 반, 당혹스러움 반으로 그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유렌은 내 말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붉은 구슬을 하나 꺼냈다.

고혹적인 핏빛을 지닌 구슬이었다. 내 눈이 의아함을 담아 유렌을 향했다. 그러자 유렌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볼 일은 다 마쳤지, 이게 그거야. ‘혈정’이라고 불리는 물건인데, 귀한 제물이지. 일시적으로 신성력을 강화시키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

“설마 그거 하나 만들겠다고 몇 개월을 성도에 쳐박혀 있던 거야?”

“쯧쯧, 너는 제국 출신이라 모를걸. 이 자그마한 구슬 하나가 얼마나 가치 있는데? 성 하나를 팔아도 힘들 수도 있어.”

유렌의 설명에 내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성 하나 값이라니?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보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자그마한 핏빛 구슬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저절로 떨렸다. 일순 내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엠마, 그녀도 이 정도 제물이 있다면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무조건 가능할 터였다. 무려 성 하나의 가치를 지닌 제물이었다.

내 눈이 다급하게 유렌을 향했다. 그러나 내게 어깨동무를 걸고 있던 유렌은, 어느새 훅 물러나 혈정을 품에 넣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네 친구의 일은 들었다, 이안… 그래도 이건 안 돼. 성국의 허가가 있어야만 쓸 수 있는 물건이야.”

“그렇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에 가능성이 보이니 잠시 내 눈이 멀었을 뿐이지.

다시 시무룩해진 나를 잠시 씁쓸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유렌은, 이내 위로하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가 내게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안, 네 손도끼 솜씨에 대한 소문이 아주 파다하던데?”

“……그래?”

나는 그렇게 무심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아직도 풀이 죽은 모양새, 그에 반해 유렌은 눈에 이채를 띠고 있었다.

궁금해서 죽겠다는 표정, 유렌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 그가 내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나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야, 야. 무슨 짓을 했길래 나 없는 사이 그렇게 실력이 는 거야? 델핀 선배는 나도 이길 자신이 없는데…….”

“이기긴 개뿔, 비무장인 상태로 가까스로 무승부였는데. 그것도 상대는 상처 하나 없지, 내 손은 뚫렸지.”

“그래도 말이야.”

유렌이 내게 조르듯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되냐? 그 손도끼 솜씨 말이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도 관심 없다는 눈빛으로, 유렌을 흘겨보았다. 떨떠름한 기색으로 내 입이 서서히 열렸다.

“신전에서 칼부림 벌일 일 있… 냐!”

물론, 속임수였다.

유렌이 내게 다가설 때부터 본능적으로 허리춤으로 향했던 손이, 제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은빛의 직선, 날붙이만이 그릴 수 있는 날카로운 궤적이 허공에 그어졌다.

매섭게 솟구친 도끼날이 유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러기 위한 기습이었고, 유렌 또한 이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어느새 유렌의 허리춤에서 뽑혀나온 얇은 검이, 뱀처럼 수직으로 상승하던 내 손도끼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휘감듯이 손도끼의 자루를 축으로 회전해서, 그대로 땅바닥으로.

금속이 대리석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손도끼를 놓치진 않았지만, 손도끼가 땅바닥에 쳐박힘과 동시에 내 몸은 그 위로 엎어질 뻔했다.

손도끼와 칼뿐만 아니라, 나와 유렌의 자리도 그렇게 회전하듯 교체됐다.

상반신을 숙인 채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 나를 보고, 유렌은 탄성을 터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야, 대단한데? 나도 모르고 있었으면 당할 뻔했어.”

“……미친놈.”

나는 감탄사 대신 그러한 말을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 봐도 귀신같은 솜씨였다. 손도끼를 뽑은 것은 내가 먼저였는데, 유렌의 검은 어느새 내 손도끼를 따라잡아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수준이 다른 상대였다. 만약 델핀 선배와 내가 정면으로 맞붙었다면, 이보다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터였다.

수렵제, 괜찮을까. 나는 벌써부터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유렌은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내 엎어진 자세를 이리저리 관찰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알아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심기체(心??) 중에서 기(?)가 유독 뛰어나, 그런데 심(心)이랑 체(?)가 그걸 따라가지 못하고 있네.”

“……? 그게 무슨 소리야.”

심기체 이론이라면 나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무술을 위해서는 세 가지 단련이 필요했다. 마음(心), 기술(?), 몸(?).

마음의 단련은 심상에 영향을 주며, 기술의 단련은 숙련된 무사를 만들고, 몸의 단련은 그 그릇을 이룬다.

그래서 심기체 이론이다. 그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지 못하면, 훌륭한 무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유렌은 내게 그중 기술(?)만이 유독 뛰어난 상태라고 말한 것이다.

유렌은 자세한 이야기까지 해주지는 못했다. 단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어디 산속에 틀어박혀 수련만 한 느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심과 체가 이렇게 뒤떨어질 수가 없는데… 그래! 어디 전쟁터에서 종일 구르면 되겠다."

"……그러면 기가 제대로 안 잡힐 텐데?"

"좋은 스승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뭐… 어느 쪽이든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면서 유렌은 내 어깨를 다시금 툭툭 두드렸다. 이제는 작별의 표시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장기적으론 교정해야겠지만, 당장은 잘하는 것에만 집중해도 나쁘지 않아."

'잘하는 것', 나는 문득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잘하는 것이라, 그러고 보면 레토도 내게 말했었다.

아마도'좆대로 하라'였나?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 유렌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흐뭇한 눈빛을 했다. 그의 조언을 듣고 내가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싶은 얼굴이었다.

그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살랑이며 떠나갔다.

"그럼 나는 이만, 누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그러고 보니 너, 누님 조심해라."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내 눈이 슬쩍 유렌을 향했다. 그는 내게 어깨동무를 걸었을 때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누님이 요즘 너한테 관심이 많거든."

유렌이 '누님'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고아 출신인 그가 가족처럼 믿고 따르는 건, 고아원에서 친남매처럼 함께 자란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성녀', 그녀가 내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왜?

차마 그 의문을 입에 담기도 전에, 유렌은 나타났을 때 그랬듯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성녀의 호위무사를 겸하고 있으니 성녀님을 뵈러 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겨났고, 또 하나의 고민이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나는 레토처럼 말솜씨가 뛰어나지도 못했고, 셀린처럼 인맥이 넓지도, 세리아처럼 배경이 든든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내가 '잘하는 것'.

그래, 그것뿐이었다.

**

어두운 밤, 달빛마저 구름 뒤에서 새초롬한 빛을 뿌리는 시간이었다.

그 밤하늘의 색을 닮은 머리카락이 얼핏 눈에 띄었다. 그리고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 황갈빛 눈동자, 그와 대비되어 더욱 돋보이는 뽀얀 피부까지.

셀린 하스터, 내 소꿉친구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고.

"……셀린."

서서히 달빛을 반사하며, 내 허리춤의 칼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툭, 하고 칼집이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승부가 날 때까지 검을 거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숲의 공터에서,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 판 뜨자."

내가 잘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검사는 오직 검으로 말해야 하는 법이었다. 굳이 나를 예로 들자면, 손도끼까지 포함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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