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1. 첫 번째 편지(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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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부림이 난 이후, 셀린은 방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그날 밤까지 그녀가 방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강의가 몇 개인가 남아있었던 것 같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그녀의 친구 몇몇이 방문을 두드리며 안부를 물어도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사교적인 성격의 그녀치고는 드문 일이었다. 방문객들을 맞이하지 않다니.
그러나 셀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셀린이 받은 충격은 크고 깊었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끊임없이 과거의 화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반복 재생되는 그 장면이란, 셀린과 세리아의 다툼을 목격한 이안의 모습이었다.
화가 난 얼굴, 싸늘한 금빛 눈동자, 짜증을 담은 목소리가 그녀의 뇌리에 전기충격처럼 내리꽂혔다. 셀린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안 오빠랑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될 텐데.
셀린은 그러한 생각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셀린은 당찬 소녀를 연기했지만, 내심은 이안에게 무척 의존하고 있었다. 10년을 넘도록 짝사랑한 상대였다.
그녀의 마음에 연모의 감정이 싹튼 것도 그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모든 비극이 끝나고, 그녀의 인생에 새로운 빛이 필요할 때 기꺼이 그녀의 손을 맞잡아준 소년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안이 그녀를 딱히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눈치 하나만큼은 뛰어난 셀린이 아니었던가.
하스터 가문이 고위 귀족들의 이권 다툼에 의해 무너진 날, 셀린은 무거운 사명을 짊어져야 했다.
아직도 고지서를 받고 목에 핏대를 올리던 아버지와,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은빛 눈동자가 기억에 깊이 박혀 있었다.
알펜하우저, 제국의 5대 명문가 중 하나. 그 맹인처럼 초점을 읽을 수 없는 은빛 눈동자는 알펜하우저 가문만의 특징이었다. 그들이 하스터 가문의 이권 사업에 개입한 것이다.
모든 비극은 하스터 영지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하스터 가문에는 오래 전부터 철을 채굴하는 광산이 하나 존재했는데, 100년 넘도록 아무런 문제가 없던 그 광맥에서 느닷없이 금이 발견된 것이다.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하스터 가문은 기뻐했다. 가문뿐만 아니라 영지 전체가 들떠 있었다. 하스터 남작은 영지민들에게 사랑받는 영주였으며, 그만큼이나 귀족의 몫을 영지민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영지가 그 흐름을 타고 급격히 발전하리란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알펜하우저 가문을 위시로 한 고위 귀족들이 개입해 오기 전까진.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고 제국의 곳간 열쇠를 쥐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알펜하우저 가문이었다. 그들의 수법은 치밀하면서도 은밀했다.
금광을 개발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비용을 빚으로 달아두었고, 물자를 끊고 인맥을 동원해서 하스터 영지의 시장을 잠식했다.
자본의 도움 없이 금광을 개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위 귀족들이 개입해서 본격적으로 금광 개발을 지체시키기 시작하자 그 끝은 허무할 정도로 금방 명료해졌다.
파산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채무를 보고 셀린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하스터 가문뿐만 아니라, 영지의 자본 시장 자체가 알펜하우저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물론이었다.
금광은커녕 그곳에서 본래부터 캐내던 철조차도 확보하지 못할 판이었다. 하스터 영지의 경제는 그날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광산은 그 자그마한 시골 영지의 몇 안 되는 이권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물기에 젖은 눈동자로 고지서를 내민 사내를 노려보던 셀린에게, 알펜하우저 가문의 사람은 담백한 어조로 선언했다.
“금화 한 닢.”
“……뭐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아버지가 거친 숨을 내쉬며 쓰러진 차였다. 한껏 예민해져 있던 어린 나이의 셀린은, 상대가 얼마나 지체 높은 귀족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날카롭게 응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펜하우저 가문의 사내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외눈안경을 고쳐 쓰더니, 한 줌의 흥미조차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원한, 금화 한 닢으로 사겠습니다. 깔끔히 잊는 편이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값을 매기길 좋아하는 터라.”
“무슨, 헛소리를…….”
“잊지 않으시면, 어쩌시겠습니까? 시골 남작가의 불쌍한 영애 하나가 한을 품었다고 무너질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은데.”
처음에 셀린은 그 말이 조롱이라고 생각했다. 승자가 패자에게 으레 내뱉는 모욕,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셀린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금광을 둘러싸고 어마어마한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다. 최후의 최후, 결국 금광을 차지한 것은 알펜하우저 가문이었다. 희열을 느끼거나, 허탈함을 느끼거나, 아무튼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어디까지나 무덤덤하기만 했다.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인간 같았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귀족조차도 그 힘에 따라 우열이 나뉘어 있죠. 하스터 가문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알펜하우저 가문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비단 알펜하우저 가문뿐만이 아니죠. 고위 귀족 가문 어디든…….”
그렇게 사내의 이야기는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 잔혹한 현실의 연쇄를, 열 살조차 되지 못한 셀린은 멍하니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녀가 이해하기에 그의 이야기는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 기나긴 이야기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는 것.
하스터 가문의 원한 따위는 무의미하다.
알펜하우저 가문의 사람이다. 금화라면 넘치도록 있을 터였다. 그중에서도 금화 한 닢을 내세웠다는 것은, 굳이 동화나 은화를 꺼내기 귀찮기 때문이겠지.
불합리하다. 그 어린 나이임에도 셀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스터 남작은 존경받는 영주였다. 영지민들 또한 그 영도 아래에서 부유하지는 않아도 배고프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하스터 영지는 그토록 행복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그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원한조차 품지 말라고? 그것이 세상이라고?
조언인지 조소인지 모를 그 이야기의 끝에, 사내는 마지막으로 권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금화 한 닢으로 원한을 잊는 편이 영애께도 이익이라는 소리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들 하죠, 저는 그런 말을 참 좋아합니다. ‘합리적’이라, 하하.”
웃음소리조차 텅 빈 인간이었다. 입에서는 웃는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정작 눈과 입꼬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셀린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금화 한 닢? 아무리 귀족 자제라지만, 열 살조차 되지 않은 셀린에게는 큰돈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제안에 조금도 마음이 이끌리지 않았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셀린은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흐으, 흐으, 하고 핏발 선 눈으로 분한 듯 숨만을 흘리고 있었다.
알펜하우저 가문의 기사가 문을 지키고 선 탓인지, 소란을 듣고도 하인들은 감히 방 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그저 셀린만이 귀족이라는 이유로 들어섰을 따름이었다. 셀린의 황갈색 눈동자가 원독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눈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흐음, 사내는 안타깝다는 듯 침음을 삼켰다. 그러더니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눈동자처럼 새하얀 정장과, 새하얀 중절모.
온통 새하얀 인간이었다. 그는 작별인사조차 없이 방을 떠나려 했다.
“셀린 하스터.”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기 전까진.
그는 멈칫하긴 했으나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셀린은 들끓는 증오를 담아 그에게 경고했다.
“내 이름, 셀린 하스터야… 기억해둬, 말라깽이. 언젠가 복수할 테니까.”
그제야 사내의 은빛 눈동자가 흘깃 셀린을 향했다. 그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를 노려보는 사랑스러운 소녀를 보고,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나타난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금화 세 닢… 아, 그리고 제 이름은 달턴입니다. 나중에라도 거래할 생각이 생기시면 알펜하우저 가문의 달턴을 찾으시죠.”
그날 이후로 셀린은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스터 가문은 무너졌고 영지도 엉망이 되었다. 적절한 수준의 지원이 불가능해진 하스터 부인은 셀린을 언니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그 언니가 바로 아인스턴 부인이었고, 레토와 셀린이 어린 시절부터 친남매처럼 자라게 된 계기였다.
그러나 아인스턴 가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셀린이 미소를 되찾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을 뿐.
타고난 마력량이 있으니 몸이 어떻게든 버티긴 했지만, 삶의 즐거움이란 모조리 잊어버린 듯 살아왔던 시간이었다.
그때 만난 것이 이안이었다.
그 흐드러지던 꽃밭에서의 기억을, 셀린은 아직도 소중히 품고 있었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할 터였다. 장래를 함께하고 싶었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싶었다.
아이는 아들과 딸을 합쳐 대략 셋에서 넷 정도? 첫째는 듬직한 아들이 좋겠다고, 그러한 망상에 빠져 헤실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셀린이 이안에게 고백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안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안은 셀린이 좋은 혼처를 잡아 하스터 가문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안이 없었다면, 셀린 또한 유력하게 그러한 미래를 검토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셀린은 오랜 시간 참아왔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녀를 봐줄 수밖에 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몇 년.
느닷없이 이안의 곁에 거슬리는 여자가 달라붙었다. 심지어 상대는 고위 귀족이었다. 셀린은 이가 닳도록 밤마다 이를 갈았다.
아버지도, 영지의 미래도 빼앗아 갔는데 이제는 이안 오빠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흥분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는, 무엇보다 비참했지만.
셀린의 황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졌다. 그녀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푹 파묻었다. 사랑하는 사내에게 미움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리고 서운했다. 자세한 사정도 물어주지 않고, 무작정 세리아의 편을 들던 이안의 모습이.
방 안에 홀로 흐느끼던 그녀에게 쪽지가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문 밑으로 바람처럼 들어온 쪽지에는, 숲의 공터에 밤 몇 시까지 나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필체로 보아 이안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셀린은 다급히 몸을 씻고, 단장을 하고, 이안이 칭찬해 주었던 향의 세안도구를 듬뿍 쓴 다음 헐레벌떡 밖으로 나섰다.
용서를 빌자.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급선무였다.
이안과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될 수 없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단순한 친구 사이라도 좋았다. 셀린에게는 이안밖에 없었다.
숲의 공터로 달려가니, 이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사내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이, 이안 오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안을 불렀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셀린은 덜컥 겁이 났다.
많이 화가 난 걸까? 그래서 대화를 하자고 부르긴 했는데, 말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고민 끝에 이제 연을 끊자는 소리라도 하면 어쩌지.
실망을 해서, 그래. 내가 실망을 줘서.
셀린은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할 수 있었다.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오, 오늘 일은… 내, 내가 잘못했어, 응? 무, 무슨 벌이라도 받을게. 자, 잠깐 내가 어떻게 됐나 봐! 절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이안 오빠… 제발, 응?”
무작정 세리아의 편을 들어서 서운하다던가, 나도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던가, 그토록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막상 이안의 앞에 서니 나오는 말은 오직 용서를 비는 내용뿐이었다.
변명은 용서를 받은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렇게 셀린이 애절한 어조로 용서를 빌고 있을 때였다.
“……셀린.”
그제야 뒤를 돌아보면서, 이안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셀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말만 통한다면 됐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든, 빌고 빌어서라도 이안에게 용서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셀린은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행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안이 내뱉은 말은, 그녀가 무엇을 상상했던 그 이상이라서.
“한 판 뜨자.”
그녀의 황갈빛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그러든 말든, 이안이 검을 뽑으며 내던진 칼집은 땅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셀린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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