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60화 (60/649)

〈 60화 〉 1. 첫 번째 편지(60)

* * *

내가 검을 뽑자 셀린은 얼떨떨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진검 대련을 요청받은 적은 없을 테니.

하물며 우리 둘은 크게 다툰 뒤였다. 셀린의 눈가에는 눈물 자국마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울먹거리던 목소리까지, 셀린 또한 나름대로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셀린은 내가 화를 내면 먼저 와서 나를 달래주곤 했다. 오늘도 그러려고 했던 듯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셀린과 세리아의 사이는 시한폭탄이 설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싸움이 아니라 칼부림까지 났을 정도면 말할 것도 없었다. 몇 번 화내고 사과하는 정도로 간단히 갈등이 해소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승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검사를 승복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진검 대련.

말솜씨도, 사회성도, 그 무엇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날붙이와 날붙이로 겨루는 전투만이 뒷말이 나오지 않고 깔끔했다.

셀린은 여전히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이, 이안 오빠… 이, 이건?”

“말 그대로, 진검으로 한 판 붙자고.”

그녀의 황갈빛 눈동자가 멍하니 땅바닥을 구르는 내 칼집을 쫓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고, 그렇게 몇 번을 번갈아 보았을까.

셀린의 입에서 허, 하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왜?”

“어차피 말로 해봐야 납득하지도 않을 거 아니야. 상황만 모면하면 끝이 아니니까… 그리고 또, 세리아랑 다툴 때 억울해 보이던데.”

나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검극을 앞으로, 시선은 오직 상대를 향해서.

셀린은 아직도 검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녀가 검을 꺼내리란 것은 명백했다. 결투의 조건은 그것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깔끔하게, 진검으로 한 판 붙고 끝내자. 내기는 진 사람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소원?”

“그래, 소원. 무엇이든 간에.”

그 말에 셀린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이것저것 재기 시작한 눈치였다. 그녀가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을 생각쯤이야 뻔했다.

세리아랑 연을 끊으라든가, 그러한 소원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도를 넘는 소원은 적당한 수준으로 조정해야겠지만, 셀린이 정 원한다면 세리아와 만나는 빈도를 줄여줄 생각은 있었다. 그래야 약속이 성립할 수 있으니까.

셀린은 곧 계산을 끝마친 듯했다. 그녀의 황갈빛 눈동자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진심으로 나오겠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승패 판정은?”

“상대가 인정할 때까지.”

“다치고 울지 마, 이안 오빠.”

진검을 들면서 피 흘릴 것을 각오하지 않는 검사는 없었다. 나는 셀린의 섬뜩한 경고에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게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 셀린과 내 실력은 비등한 편에 속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뒤였다.

심지어 손도끼라는 부무장까지 갖췄으니, 실전에서의 강점은 그 이상이었다. 물론 변수는 있겠지만, 확률적으로는 내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확률적으로는. 나는 다소 안이해지려는 마음을 붙들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

팟, 하고 내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두 신형이 땅을 박찼다. 셀린은 아직 칼을 뽑지 않았다. 발검술로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발검은 기본적으로 연격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한 번 흐름이 막혀 버리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셀린의 검을 막아 세우기로 했다.

멈춘 듯 흐르던 시간이 파열음을 일으킬 때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셀린과 내 신형이 맞부딪혔기 때문이었다. 극도로 압축되었던 공간이,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준 순간 터져나가듯 펼쳐졌다.

최대한 초장에 끝낸다. 진검을 들고 이루어지는 대련은 부상의 위험성이 높았다. 일찍 끝낼수록 나나 셀린이나 몸에 상처를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결정한 내 검이,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마력을 담고 내리 그어졌다. 은빛 실선이 시초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 셀린의 팔 근육이 당겨졌다.

그 다음, 충돌.

카각, 하고 칼날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차라리 폭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눈을 부릅뜨는 수밖에 없었다.

발검의 위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아래에서 내리 긋고, 위로 올려 그으면 통상적으로 무게가 더해진 전자가 더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분명 후자에 속하는 셀린의 검은 위력으로 내 검을 압도하고 있었다.

연격을 염두에 둔 발검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일격.

쾅, 하고 마력과 마력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내 검이 튕겨나가듯 솟구쳤다. 이대로 연격이 이어진다면 끝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부러 자세를 무너트렸다.

내 몸이 주저앉은 틈에, 셀린의 두 번째 일격이 이어졌다. 그녀의 황갈빛 눈동자가 매섭게 나를 쫓고 있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다시 한 번 내리찍어지는 일격.

나는 그대로 땅을 굴러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폭발하듯 일어났다.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나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자세를 정비하면서도, 멍하니 셀린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셀린이 이 정도였나? 마력량이 출중하기는 했지만, 검격의 위력이 이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 위력만 따지자면, 어쩌면 테안과 비교해야 할 수도 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 사이로 거친 숨을 고르는 셀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검을 내리찍은 곳을 중심으로 흙바닥이 움푹 패여 있었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했다.

“야, 너… 그동안 뭐 영약이라도 먹었나?”

“무슨, 하악, 소리야……?”

셀린은 어느새 이마에 흐르기 시작한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내게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안 오빠가, 후우… 가르쳐 줬잖아? 내 마력을 제일 잘 쓰기 위해서는, 하아, 일격에 전력을 담아야 한다며.”

그래서 단 두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숨이 가팔랐던 거였나, 하기야 마력을 물 쓰듯 쓰면 그만큼 체력의 소모도 극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출중한 마력량을 모조리 위력에 투자하니, 무시무시하긴 했다. 내가 해준 조언이라는데, 무척 훌륭한 조언이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나는 도무지 그런 조언을 한 기억이 없단 점이었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기억에 없다면 답은 하나였다.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기억을 잃은 사이 저지른 짓이라는 뜻이었다. 그때 셀린은 깨닫고 만 것이다. 괜히 연격이나 속도에 집착하기보다, 마력을 때려 박아 각 검격의 위력을 키우자고.

마력량이 평균 수준에 불과한 나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유형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자신만만해서 진검 대련을 요청했으니, 셀린이 냉큼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안 페르쿠스, 이 병신 새끼. 도대체 기억을 잃은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야.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려도 당장 내 앞에 놓인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셀린은 다시 한 번 숨을 가라앉히더니, 검극을 내게로 향했다.

“조심해, 이안 오빠… 전력을 다하는 만큼, 나도 중간에 멈추기가 힘들어.”

“아니, 정 불안하면 그만둬도…….”

그러나 내 소심한 제안은 셀린에게 닿지 못했다. 그 전에 그녀가 땅을 박차고 내게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다소 작은 몸집이었지만, 그만큼 공기 저항을 덜 받아 셀린의 쇄도는 빠른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마력을 검의 위력을 증대시키는 데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는 느린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이 결정적인 약점은 아니었다. 어차피 쇄도의 목적은 공방을 나누기 위한 거리의 확보에 있었다. 그리고 셀린이 휘두르는 검의 위력은, 그 공방 자체를 기피하게 만들었다.

부딪히면, 방금 전처럼 튕겨나갈 뿐이었다. 내 전력을 다했는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차라리 피하는 편이 나았다.

셀린의 검이 다시 수직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모범적인 내려베기였다. 그 위력은 도리어 폭급한 편에 속했지만 말이다.

쿵, 하고 다시 땅을 울리는 진폭. 나는 눈앞에 그려지는 가상의 궤적을 보고 이미 몸을 비틀어 그 검로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였다.

그럼에도 그 여파만으로도 피부가 찢겨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저런 공격을 한 번 허용하면, 재기할 수 없었다. 부상이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흔들리는 지반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빈틈을 노려 셀린의 팔뚝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셀린이 아니었다. 셀린은 땅바닥에 처박힌 검을 잡아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지 않아도 작은 몸집인데, 몸까지 웅크리니 검이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셀린은 곧바로 구르듯이 내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땅을 구르며 껴안은 검을 다시 칼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또 온다. 발검이었다.

셀린의 몸이 튕겨 오르듯 내게 엄습했다. 그 다음 순간, 셀린의 칼집이 다시 한 번 빛을 뿜었다.

탄력을 받은 셀린의 쇄도는 내 예상을 웃도는 속도였다. 대응할 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내리 그었다.

필패로 가는 지름길인 줄은 알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셀린의 검을 막아 세울 수단이 없었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내 검이 허공을 날았다. 핑그르르 회전하는 소리, 나는 일부러 손아귀에 힘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으로 잡는 검을 한 손으로만 붙잡고 내리 그은 상황이었다.

남은 손은 허리춤으로 가야 하니까. 곧바로 내 허리춤에서 손도끼가 뽑혀 나왔다.

날카로운 은빛의 궤적이 셀린과 내 사이에 그어졌다. 셀린은 온힘을 다해 상반신을 살짝 뒤로 기울여 내 손도끼를 피해냈다. 그녀의 옷 앞섬이 살짝 베였다.

이대로 연격을 가해도 좋겠지만, 셀린이 후속타를 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검으로도 상대하지 못했는데, 손도끼로 그 위력의 검을 받아내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셀린과 내 몸이 뒤로 몇 걸음 움직였다. 나는 어느새 땅에 꽂혀 있던 내 검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짧은 공방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셀린은 가파른 숨을 골라야 했고, 나도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셀린은 숨을 헐떡이면서, 검을 칼집에 담았다. 또 다시 발검술로 승부를 걸 생각인 듯했다.

“……그 손도끼, 하악, 만만치, 흐으… 않네?”

“난, 지금 네게 조언을 해준 과거의 나를 욕하고 싶은데.”

셀린과 나는 서로를 마주보면서, 소매로 각자의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그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이제 곧 결판이 나야 한다는, 그러한 직감.

셀린은 체력의 한계로 장기전이 불가능했고, 나 또한 절대적인 마력량에서 밀리는 이상 더 많은 공방을 나누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언제 또 검이 하늘을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싸움은 곧 결판이 날 터, 내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손도끼의 의외성을 잘 써먹곤 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했다. 내 손도끼가 너무 유명해진 탓이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그랬다.

만약 내 손도끼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면, 검이 튕겨 나가자마자 셀린은 승리를 확신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고, 오히려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손도끼를 당연하다는 듯 피해냈다.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양손에 들고 있던 무기 중,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칼집이 없어 조금 걸리적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곧 뽑혀 나올 테니까, 손도끼를 든 나를 셀린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셀린은 언젠가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는지 급히 자세를 고쳤다. 그 예상대로였다.

파공성을 내며, 내 손도끼가 던져졌다. 고속으로 쏘아진 손도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셀린에게 쇄도했다.

셀린의 칼집이, 또 한 번 불을 뿜는다. 벼락처럼 쏘아진 검이 손도끼를 쳐냈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손도끼가 구슬프게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셀린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뒤를 이어 내 검까지 날아들었단 점이었다. 설마 주무장까지 던져버릴 줄은 몰랐는지 셀린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셀린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검을 내리쳤다.

다시 한 번 금속과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 검이 아슬아슬하게 땅바닥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너무 다급히 몸을 비틀었던 탓에, 셀린의 디딤발은 불안정했고 그녀의 무게중심이 한 곳으로 쏠리고 말았다.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게는 유일한 기회였다.

내 눈이 추락하고 있는 손도끼를 쫓았다. 그 무게에도 불과하고 손도끼는 꽤 높은 고도까지 올라갔다 떨어지고 있었다. 그 위력의 검격에 당했으니, 오히려 이제라도 떨어지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그 위치였다. 셀린의 발검은 반드시 아래에서 위로 그어진다. 그러므로 손도끼도 당연히 날아가던 역방향으로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포물선을 그리며 지금 내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내달리던 내 신형이 한 번 도약하는 것만으로, 익숙한 도끼 자루에 손이 닿았다. 이대로 달려가면 늦는다. 나는 착지하는 힘을 그대로 손도끼에 담아 내던졌다.

캉, 하고 손도끼가 셀린의 검을 거칠게 때렸다. 그러지 않아도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던 셀린이었다. 갑작스러운 강타에 셀린의 손에서 검이 벗어났다.

그럼에도 셀린은 필사적이었다. 그만큼이나 세리아와 나를 떨어트리고 싶었던지, 그녀는 그대로 몸을 던져 땅을 굴렀다. 검을 쥐기 위해서.

내 검을 줍는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내달리는 나와 그녀의 거리는 이미 지척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는 쪽을 택한 듯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이미 내달리기 시작한 나는 상반신을 굽히는 것만으로도 땅에 처박힌 내 검을 회수할 수 있었고, 셀린이 검을 쥐고 자세까지 잡기에 시간은 지나치게 부족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검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쇄도하던 내 몸이 셀린의 팔뚝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팔뚝은 찔려봐야 치명상도 아니었고, 검을 더 쥘 수도 없을 테니 진검 대련에서 항복을 받아내기에 알맞은 부위였다. 신전에서 치료하기도 편하기도 했고.

본래 이대로 끝나야 했을 싸움이었다.

셀린이 마지막 순간, 주저앉은 자세에서 검을 휘두르려 들지만 않았다면.

이기고 싶은 마음에 무심코 저지른 짓인 듯했으나, 그 탓에 신체의 위치와 검로의 충돌점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팔뚝이 아니라, 심장을 찌르는 각도로.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이제 와서 검을 멈추려고 주춤거렸다간, 저 궤적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 치명상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를 인지한 내 눈이 순간적으로 부릅떠졌다. 셀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운명을 직감했는지, 그대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죽는다. 최소한 치명상, 과한 승부욕이 만든 참사였다. 이어질 고통을 떠올린 셀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푹, 하고 칼날이 틀어박힌다. 핏물이 튀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온기, 습한 비린내.

그제야, 셀린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황갈색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향했다.

셀린의 검은, 내 팔뚝을 파고들어 있었다. 기괴한 자세였다. 내 검극은 셀린의 심장 직전에 멈춰 있었고, 그 대가로 뒤늦게 휘둘러진 셀린의 검은 내 팔뚝을 파고들었다.

그나마 셀린도 마지막 순간에 멈추려 했기에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 위력의 검은, 아무리 무너진 자세에서 쏘아졌다 해도 위협적이었다. 팔이 잘리거나, 어쩌면 내 심장까지 칼날이 닿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셀린 또한 눈을 감은 것이다. 목숨과 목숨이 걸린 일이다. 살아남는다면, 승자의 몫으로 선택권을 쥐게 된 내가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차마 검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아프다. 불에 덴 듯한 고통, 뼈까지 반쯤 파고든 칼날은 시큰한 통증을 가감 없이 신경에 전달하고 있었다. 뇌가 이대로 뜨겁게 타버릴 것만 같았다.

팔뚝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핏물은, 그대로 손을 타고 검 위를 흘러내렸다. 셀린의 가슴을 찌르기 직전, 멈춰 선 칼끝에서 피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셀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왜 자신이 아니라 내가 피를 흘리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듯이.

그래서 나는, 대신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언젠가, 셀린에게 이랬던 적이 있었다. 꽃밭이었는데, 그때의 셀린은 참 아이답지 않게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겼다, 셀린.”

황갈색 눈동자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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