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62화 (62/649)

〈 62화 〉 1. 첫 번째 편지(62)

* * *

최근에는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없어지는 추세라지만, 과거에는 아니었다.

작위 승계권은 오직 남성에게만 주어졌으며, 여성들은 교육의 자유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이는 ‘마수’라는 명확한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다수의 희생을 남성들이 감내하는 구조와 관련이 깊었다.

남성은 여성보다 근력이 월등했다. 이는 편견이 아니라 단순명료한 진실이었다. 그래서 전쟁이든 마수 토벌이든 남성들이 차출될 때가 많았다. 물론 방위를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신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류의 적인 마수와 맞서는 것은 그 자체로 신이 내린 사명이다. 천신 아루스의 사명을 따르는 남성과, 그러지 못하는 여성. 남녀차별은 종교적인 논리로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마도학과 오러 연공법이 발달하며 그러한 사고방식에 변화가 찾아왔다.

마력만 존재한다면 마수 수십 체를 단번에 쓸어버릴 위력의 마법도 쓸 수 있다. 신체능력? 아직 육체 단련이 무의미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근력이나 순발력 등 무인으로서의 핵심적인 역량을 판가름하는 것은 마력량이었다.

힘은 곧 권력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마력만 타고난다면 얼마든지 전장을 주름 잡는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남녀차별’이니 하는 이야기가 낡은 담론으로 느껴지는 까닭이기도 했다.

델핀 선배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녀는 여성이지만, 이미 유르디나라는 대가문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실력만 출중하다면 일가의 주인이 되는 데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물론 경전 해석에 있어 다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성국이나, 마력을 체계적으로 단련하지 못하는 평민들 사이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고는 들었다. 그러나 최소한 제국 귀족 사이에서는 아니었다.

혹여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하는 편이 보통이었다. 이제 권력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그 크기가 크든 작든 권력과 척 지기를 즐기는 귀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셀린과 함께 자라났고, 아카데미에서 지내면서 동성과 이성을 가리지 않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성차별적인 세계관과 이미 오래 전에 결별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옛말은, 참으로 성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여자 셋이 모이면 너무 시끄러워서 접시가 깨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서로 다투느라 접시가 깨진다는 뜻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접시가 깨지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는 뜻인데, 속담이 대개 그렇듯 성차별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세리아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말이 많고 적음은 오직 개인의 성향 문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러한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

싸늘한 정적이 병실에 내려앉아 있었다. 첫 서리가 내린 날의 새벽녘 공기처럼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단지 여자 셋이 모였을 뿐인데도 그랬다.

셀린, 세리아, 그리고 성녀님.

삼인삼색의 여인들이었다. 셀린은 제국의 하급 귀족이자 활달한 성미였으며, 세리아는 유르디나 가문이라는 명문가의 일원이지만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성녀님은 성국의 고귀한 성직자로 자애롭고 상냥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그 각양각색의 여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입을 다물고 있는 광경은,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셀린은 조금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그녀의 황갈색 눈동자가 나와 성녀님 사이를 번갈아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나와 성녀님의 사이를 종잡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성녀님의 표정은, 솔직히 말해서 읽어낼 수 없었다. 다만 그 미소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를 마주한 세리아의 시선이 조금 차가워졌으니까. 셀린까지는 무시했던 그녀였지만, 성녀님이 나타나자 자연스레 그 아쿠아마린빛 눈동자로 성녀님을 응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셋 중 누구라도 움직이면 파열음을 일으킬 듯한, 그러한 아슬아슬한 분위기.

그 침묵의 고리를 부수고 들어온 것은, 의외로 성녀님이었다. 그녀는 늘 그랬듯이 그 탄력 있는 젖가슴 위로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목소리.

“임마누엘, 반갑습니다. 이안 형제님과, 그 외 자매 여러분. 죄송하지만 관련자가 아니라면 잠시 병실을 떠나 주시겠습니까? 담당 사제로서 이안 형제님을 진찰하려고 합니다.”

무난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당장이라도 균열이 일어날 듯하던 병실의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만큼이나 흠 잡을 데 없는 말이었다.

담당 사제가 환자를 진료하겠다는데, 이를 두고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셀린은 조금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성녀님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을 살랑였다.

잠시 나가보겠다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환자가 된 원인도 셀린에게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잠시 나가 있을게, 이안 오빠. 그리고 성녀님, 이안 오빠를 잘 부탁드려요. 제겐 무척 소중한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며 셀린은 슬쩍 그 황갈색 눈동자로 성녀님을 쳐다보았다. 마치 미끼를 던진 낚시꾼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성녀님은 그 말에도 다시 성호를 그을 뿐이었다.

“물론입니다, 자매님. 제게도 이안 형제님은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언변이었다. 그 목소리마저 평탄하기 그지없어, 셀린은 잠시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안 오빠는 저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

“……자매님.”

성녀님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지나치려던 셀린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소중한 만큼,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그 말이 끝이었다. 걱정 많은 소녀를 가장하고 있던 셀린의 얼굴에 잠시 균열이 일어났으나, 성녀님의 미소에 금이 가는 일은 없었다.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셀린의 입에서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네, 유념하겠습니다.”

셀린이 떠나고, 병실에는 이제 세리아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성녀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녀님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슬쩍 그 연분홍빛 눈동자를 세리아에게로 향했다. 세리아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저, 저흔! 으으… 저, 저는 세리아 유르디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녀님.”

어쩐지 말이 없더니, 그동안 성녀님께 건넬 첫 인사를 고민하고 있었던 듯했다. 성녀님은 그 인사를 듣고 쿡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세리아 자매님, 얼마 전에도 얼굴을 보지 않았나요? 팔에 상처를 입었던 그날 말이에요.”

“아, 그, 그렇긴 한데…….”

그러지 않아도 혀를 씹을 만큼 긴장한 세리아였다. 성녀님의 지적에 머리가 새하얘진 듯 그녀는 다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바보, 아무래도 가장 무난한 인사말을 고르다가 잘못된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세리아였으니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나는 어떻게든 핑계를 짜내 세리아를 구원해 볼 요량이었으나, 그러기도 전에 성녀님은 전부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저도 반갑습니다, 세리아 자매님. 인사는 나중에 더 나누기로 해요, 지금은 이안 형제님을 진찰할 시간이라…….”

그러나 성녀님의 조곤조곤 달래는 어조에도 불구하고 세리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혹여 무슨 사정이 있을까 싶어 나와 성녀님의 시선이 동시에 세리아를 향했다.

세리아는 그 의문 어린 시선을 받고도 한참을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 남하! 으으… 남아 있으면, 안 될까요?”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는 명백했다. 세리아는 굳이 이 병실에 남아있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도대체 왜? 나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성녀님은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흘리며 세리아를 응시했다.

잠시 고민에 빠진 듯하던 성녀님은, 이내 싱긋 웃으며 세리아에게 물었다.

“약혼자이신가요?”

그 짤막한 질문의 효과는 확실했다. 세리아는 펄쩍 뛰듯이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듯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야, 약혼… 그, 그럴 리가! 저, 저따위가 어떻게 선배님이랑……!”

“그럼 연인 관계이신가요?”

“아, 아니요. 저,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다행이네요.”

무엇이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녀님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다만 한 마디를 더 내뱉었을 뿐.

“그럼, 나가주세요.”

“아, 앗! 그, 네…….”

무어라 항의하려던 세리아는, 어차피 그녀의 말솜씨로는 이빨도 박히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시무룩해진 그대로 병실 바깥으로 떠나고 말았다. 말 몇 마디로 셀린과 세리아를 제압해 버린 성녀님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입에 쓴웃음이 맺혔다. 곤란함을 담은 미소였다.

“죄송해요, 괜히 기다리게 만들었네요. 진료를 시작할까요?”

“그, 성녀님. 굳이 둘 다 내보낼 것까지는… 아아악!”

나는 그렇게 조심스레 성녀님께 여쭈려 했으나, 그 물음이 채 맺어지기도 못했다. 성녀님의 손아귀가 내 팔을 쥐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던 터라 내 입에서는 곧바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눈에 살짝 눈물이 맺힐 만큼 아팠다. 지금껏 성녀님이 부상 부위를 이토록 험하게 다루었던 적은 없었는데, 내 의문을 담은 시선이 성녀님을 향했다.

그러나 성녀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비명을 듣고 잠시 진지한 기색으로 손에서 신성력을 피워 올리더니,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최근 부상이 너무 잦았어요. 다음에 중상을 입으면, 그때는 반영구적인 후유증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는 성녀님의 눈동자는 나를 책망하듯 싸늘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어색한 목소리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군요. 조심해야겠네요.”

“말로만 하지 말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안 형제님은, 하여간 승부욕이 강한 편이니까요.”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예전부터 그런 경향은 조금 있었지만, 기억을 잃은 이후에는 폭주하다시피 제어가 되지 않았다. 몸을 사리지 않고 우선 승리부터 좇는 그 근성.

어디서부터 발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당장은 내게 많은 승리를 안겨다 주었지만, 그 이상으로 신체에는 부담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는 나를 성녀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그렇거든요. 승부욕이 강해서, 지고는 못 살아요.”

“……성녀님이요?”

“네, 의외죠?”

내 고개가 무심코 끄덕여졌다. 자애와 배려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성녀님이 아닌가. 그토록 상냥한 분께서 승부욕이 강하다니,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성녀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 두 분도 내보낸 거예요. 괜히, 욱해서…….”

‘두 분’이라고 한다면, 셀린과 세리아를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둘을 상대로 욱할 일이 있었나?

떠오른 의문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성녀님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터였다.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성녀님의 새하얗게 빛나는 손이 내 상처 부위를 더듬거렸다.

뻐근하던 팔에 다시 피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신경이 재생하며 손가락 끝에서부터 감각이 되돌아왔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성녀님은, 그 연분홍빛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그녀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내 눈동자와 그녀의 눈동자가 정면에서 마주쳤다.

예쁘다.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미모였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지척에서 바로보고 있음에도, 감히 음심을 품지는 못했다.

나를 응시하는 그 연분홍빛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성녀님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나지막한 경고였다.

“수렵제, 참가하지 마세요.”

“……네?”

“담당 사제로서 드리는 권고입니다. 혹시라도 수렵제에 참가할 생각이면 그만두셔야 해요. 이안 형제님의 몸은, 이미 한계입니다.”

그 엄한 목소리는 일말의 여지마저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그래서 나는 차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큼이나 위험하단 말인가. 수렵제에 참가한다면 온갖 위험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네임드급 마수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부상을 입는 미래는 확정적이었다.

성녀님은 지금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만약 내가 다시 부상을 입는다면, 반영구적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수렵제에 참가하지 말라고.

두려움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반영구적인 후유증이란 장애를 돌려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장애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검을 쥐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체란 정밀기계와 같고, 검사의 몸은 특히 더 예민했으니까.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몸 전체의 균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성녀님은 그러한 내 두려움을 읽은 듯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처음으로 맞닿는 여인의 손은, 온기라는 형태로 내게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약속이에요, 이안 형제님.”

그 애절한 눈빛과 목소리, 그 어느 사내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조금쯤 먹먹해진 목으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성녀님.”

그렇게 나는 성녀님과 성호를 그으면서, 말없이 약속을 나누었다. 두 사람만의 맹세. 성녀님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리고 다음날, 나는 수렵제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속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해요, 성녀님.

하지만 세상은 구하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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