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1. 첫 번째 편지(64)
* * *
수렵제 당일, 아카데미는 종일 축제의 열기로 들뜬다.
새벽녘부터 노점을 열기로 한 재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날을 위해 각지에서 공수한 식재료들은 벌써부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앞으로 몇 시간만 지나면 저 총천연색의 식재료들은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게 될 터였다.
이는 수렵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숲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저녁 무렵까지는 결과를 알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수렵제가 열리는 날 아카데미의 남쪽 숲 앞은 붐볐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아는 사람을 응원하러 온 인파가 가장 이른 시간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들의 식사를 책임질 노점들이 차례차례 당도하고, 그 후에는 수렵제에 흥미를 가진 교직원이나 재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결과 자체는 한참 뒤에 나오지만, 숲 앞을 지키고 서 있다 보면 의외의 구경거리를 마주할 때도 있었다.
부상 때문에 중도에 퇴장하는 조도 있고, 더 시간을 들여봐야 그 이상의 사냥감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조가 거물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인내의 시간은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학생회에서는 따로 무대를 꾸리기도 했다.
수렵제의 결과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수렵제를 위해 맹연습을 반복한 동아리가 저마다의 솜씨를 모두의 앞에서 뽐낼 기회이기도 했다.
남쪽 숲 앞의 공터에 모이는 구경꾼들은 비단 재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물론이고, 각국의 고위직이나 때때로는 제국의 황제까지 이 수렵제를 관람하러 오기도 했다. 쓸 만한 인재를 눈여겨보기 위해서였다.
수렵제의 규칙은 간단하다. ‘마수 사냥’, 가장 강한 마수를 사냥해 온 조가 우승을 차지하는 구조였다. 이 단순명료한 경쟁 방식은 반대로 그 조의 실력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오러의 밀도, 마력의 양, 그리고 심장을 감싸고 있는 고리의 수. 이 모든 것이 강함을 증명하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는 있지만, 그마저도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을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결국 누군가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실전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재학생들이 대규모로 실전에 참가하는 몇 안 되는 기회가 바로 이 수렵제였다.
그래서 수렵제에 늘 참가자가 끊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렵제에는 불나방처럼 수백 명의 참가자가 달려든다.
마수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실력만이 이 수렵제의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평민 출신들은 각국의 고위직 앞에서 눈도장을 찍기 위해 수렵제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토록 중요한 축제였다. 수많은 관중들이 관람하고, 각국의 명사들이 집결하며, 누군가에게는 앞으로의 인생이 걸린 축제.
나는 오늘 그 치열한 경쟁의 장에 섰다. 목표는 우승, 쟁쟁한 위명을 날리는 수백 명의 참가자들을 모조리 물리쳐야 하는 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어느 날 도착한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때문에, 나는 결국 이 자리에 섰다.
웃긴 일이었다. 그 편지 한 장이 내 인생을 이렇게 단기간에 바꿔 놓다니.
수렵제에서 우승하면 최소한 각국의 최고위직으로부터 눈도장을 받는 것은 확정이었다. 내가 졸업 후에 받을 제안의 질도 달라질 터였다.
아니, 애초에 미래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편지에 따르면 미래의 나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된다고 했으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웃겨 맥없이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말해 지금 연애편지 때문에 수렵제까지 참가하긴 했지만, 그것만큼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 내게 당면한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엠마처럼 누군가 다시 내 눈앞에서 쓰러지는 일은 없도록 만들겠다. 그것만이 지금 내 유일한 바람이었으며, 목표였다.
지금 웃고 떠드는 이들 중에, 긴장한 낯빛으로 무장을 점검하는 이들 중에 희생자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엠마의 병실 앞에서, 그리고 약초꾼에 불과한 장년의 사내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벽을 보고 입술을 짓씹어야 했으니까.
죄책감과 후회로 점철된 기억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편하지만은 않으리라고, 나는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선 여인이 그 증거였다. 금빛 머리카락과 핏빛 눈동자가 새하얀 피부 위에서 강렬한 색조를 드러내는 미인.
델핀 유르디나, 유르디나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세리아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얼핏 비치는 감정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감히 대항해서는 안 될 적을 만난, 초식동물의 눈.
멍하니 있던 엘시 선배는 슬쩍 눈동자를 옮기더니, 델핀 선배를 보자마자 바로 바짝 약이 오른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적개심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야 엘시 선배는 지난번에 당한 수치를 모두 델핀 선배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사실 내 잘못이었지만 때때로 인간의 심리는 이토록 편리한 결론을 내리곤 했다. 손도끼만 봐도 꼬리를 내려야 하는데, 나를 적대할 수는 없으니 간편하게 델핀 선배를 적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 또한 델핀 선배와는 인연이 있었다. 기연인지 악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조 넷 중에서 그녀와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건 오직 셀린뿐이었다.
그마저도 셀린은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델핀 선배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못마땅한 시선, 아무래도 델핀 선배와 나 사이에 났던 소문을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냉대를 넘어선 적대였다. 그러나 델핀 선배가 그까짓 일을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나름대로 신경 쓴 기습이었는데, 역시 쳐냈네?”
“……어차피 진심은 아니었잖습니까.”
그랬다면 단검 따위는 쓰지 않았을 터였다. 델핀 선배의 진정한 힘은 검을 들 때 나오는 법이었으니까.
그녀의 칼날에 금빛 광채가 맺히는 순간 그 열기에 주위가 백열한다고 들었다. 당연히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 검을 맞대고만 있어도 고온의 칼날은 피부를 지글지글 익혀 버린다.
단순하면서도 강했다. 그녀가 개화한 오러의 특성은 그랬다. 그 대신 오러를 오래 사용하면 어지간한 칼은 흐물흐물 녹아내려서 특수한 칼을 사용해야 한다는데,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인 델핀 선배에게는 문제도 아니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금력의 진정한 무서움은 또 다른 힘과 결부될 때 나타나는 법이었다.
“어차피 내 진심은 곧 보게 될 텐데, 미리 보여줄 필요가 있겠어? 그나저나 그날 이후로 오랜만이네, 손도끼 공자. 나는 많이 보고 싶었는데, 옛말로… 오매불망(??不忘)이라 하던가?”
그 은근한 목소리에 셀린의 눈썹이 움찔거리며 움직였다. 불만스러운 눈치, 세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빛이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너무 가라앉아서 눈동자가 질척해진 느낌.
나는 그렇게 말하는 델핀 선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식은땀을 흘렸다. 억지로 미소 지은 내 입술 사이로 너스레가 흘러나왔다.
“……제가 조금 열심히 피해 다니긴 했습니다.”
“그래서는 쓰나, 그렇게 멋진 구경을 하고 나서 말이야.”
뼈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여유가 넘치던 델핀 선배의 핏빛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온기가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나신을 통째로 이성에게 보인 것은 수치스러운 경험일 터였다. 심지어 그날 그녀는 내게 한 방 먹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물론 나로서는 억울한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의 일은 사고에 불과했다. 내가 일부러 벗기지도 않았고, 당장 델핀 선배도 예술품이니 마음껏 보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하지만 아직 정조 관념이 여성에게 더욱 까다롭게 적용되는 시대였다. 무슨 변명을 늘어놓아도 여성의 나신을 본 이상 죄인은 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불합리한 세상이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오신 겁니까? 그 대가라도 치를 준비를 하라고?”
“아니, 물론 손도끼 공자를 보러 온 것도 있지만… 네 조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몇 있잖아? 그래서 인사라도 하려 그랬지.”
그러면서 델핀 선배의 눈이 세리아와 엘시 선배를 차례로 흝었다. 잠시 눈동자에 음영이 사라져 있던 세리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세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델핀 선배의 입에서 흐응,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세리아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듯한, 그 순간.
“……이 빌어먹을 암코양이 년이!”
날카로운 외침이 귓전을 때리고 들어왔다. 무심코 살짝 인상을 찌푸릴 만큼 새된 소음이었다. 그 목소리의 발원지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엘시 선배였다.
그 자그마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목청이었다. 덕분에 델핀 선배의 이목을 끄는 데는 성공한 듯했다.
엘시 선배는 씩씩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봐야 귀여워 보일 뿐이었지만, 엘시 선배는 나름대로 위협을 한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너, 너… 내가 그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날 수치를 당하고, 너한테 복수하려고 그, 그런 훈련까지… 넌 오늘 진짜 뒈진 줄 알아!”
그러면서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떠는 엘시 선배, 그러나 델핀 선배는 오히려 반색하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 그래? 내가 너를 그렇게 괴롭게 만들었다니 무척 기뻐, 엘시.”
“우, 웃지 마! 그 싸가지 없는 미소도 오늘까지인 줄 알아! 아주 자근자근 밟아서…….”
엘시 선배의 입에서 온갖 욕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듣는 내가 거북해질 지경이었지만, 델핀 선배는 어디서 개가 짖나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엘시 선배의 쫑알거림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었다. 최소한 델핀 선배는 흥이 식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진득한 권태가 어렸다.
쯧, 하고 혀를 차고 델핀 선배가 돌아서려던 찰나.
“……세리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흐릿한 중얼거림에, 세리아는 곧바로 몸을 바짝 굳히며 대답했다.
“네, 네헷! 으으… 네, 언니.”
혀까지 씹었지만 델핀은 익숙하다는 얼굴이었다. 세리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핏빛 눈동자는 무감정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감정사의 눈과 같았다. 그녀는 나지막이 한 마디만을 남겼다.
“늘 하던 대로만 하렴.”
그것이 따스한 격려인지, 그렇지 않으면 늘 패배했던 것처럼 오늘도 그러라는 뜻인지.
듣는 사람들은 알 수 없을 터였다. 오직 그녀의 속내를 잠시나마 들여다본 나와 세리아만이 알고 있겠지.
명백히 후자였다. 세리아는 델핀과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입술만을 짓씹었다.
델핀은 그제야 만족한 눈빛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델핀 선배, 단검 두고 갔…….”
“기습을 막아낸 상이야, 손도끼 공자.”
나는 엉거주춤 땅에 떨어진 단검을 줍고 있다가,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끝까지 ‘손도끼 공자’라니, 내 이름을 알긴 할까. 나도 뭔가 또 다른 호칭으로 응수하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없었다. 고작해야 그녀의 새하얀 나신 정도.
‘연분홍 영애’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혀를 차면서 단검을 살펴보았다.
비싸 보이긴 했다. 준다니 또 거절할 이유는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품에 단검을 넣었다.
참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올 때도 전조 없이 오더니, 갈 때도 전조 없이 떠났다. 그러나 그 후폭풍만큼은 명백했다.
세리아는 분한 듯 입술을 짓씹고 있었으며, 엘시 선배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셀린도 최소한 기분이 언짢아진 것만은 확실했다.
나쁘지 않았다. 적개심만큼 훌륭한 동기는 없었으니까.
이제 마음만 추스르고 훈련대로 사냥에 임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슬슬 분위기를 다시 잡으려 할 무렵.
느닷없이 내 앞에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돌리니, 세 명의 남녀가 어느덧 내 앞에 다가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덩치가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가 내 지근거리에 섰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머리카락은 존재하지 않았다. 삭발한 듯했다. 전투를 하면서 머리카락을 관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차라리 삭발을 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때까지 나는 눈앞의 사내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그의 두 손에 도끼가 하나씩 들려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 눈동자에 처음으로 의문이 새겨졌다. 나는 뭐하냐는 눈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2m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엘시 선배가 종종걸음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
“델핀, 그 년의 따까리들이야… 아마 조를 짠 모양이지?”
“……이분은 누구신데요?”
“올마르! ‘쌍도끼’ 올마르야. 4학년 검술학부에서는 꽤 유명해, 용병 출신이라 실전 경험이 풍부하거든.”
도끼를 쓰는데 왜 검술학부란 말인가. 그러한 의문이 잠깐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곧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어차피 근접무기는 전부 다루는 곳이 검술학부였다. 주무장이 도끼라 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배틀엑스가 아니라 손도끼 두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있다는 점뿐.
델핀 선배가 데리고 다니는 사내다. 실력자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직도 반응이 없자 엘시 선배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어야 했다.
“그런데, 이 올마르라는 분은 도대체 왜……?”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올마르 선배는 두 손도끼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내가 그 의중을 알 수 없어 멍하니 손도끼를 바라보고 있자, 올마르 선배는 능숙하게 그 손도끼를 손으로 번갈아 쥐었다. 그리고 뒤로 넘기고, 앞으로 받고.
일종의 묘기와 같은 재주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엘시 선배가 속삭였다.
“너한테,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도끼’라는 호칭이 겹쳐 조금 짜증이 난 모양이라고, 엘시 선배는 덧붙였다.
뭐 어쩌라고, 나는 일순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대로 손도끼로 후려치면 되나?
내 손이 벼락같이 손도끼를 뽑아 올리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