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1. 첫 번째 편지(65)
* * *
은빛 섬광이 찰나를 쪼개고 몰아쳤다. 내 손에 쥐어진 손도끼는 무자비할 만큼 단순무식한 궤적을 그렸다. 기습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였다.
올마르 선배는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그럼에도 그의 대응은 재빨랐다.
하늘을 날던 손도끼 하나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내려베기, 비록 고도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아 힘이 덜 들어가긴 했으나 그만큼 빨랐다.
이미 쏘아진 내 일격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내 손도끼가 스치는 구간에 가장 가까운 무기를 쥐는 것.
쾅, 하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충돌이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엘시 선배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블루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게 묻고 있었다.
미친놈인가?
하지만 손도끼 실력을 겨루자면 이것밖에 답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손도끼로 저글링을 하는 것 따위가 무슨 솜씨 자랑이란 말인가.
올마르 선배는 그 탄탄한 근육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건한 육체를 자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쏘아지다시피 내질러진 일격이었는데, 움직임조차 별로 없었다. 타격이 크지 않다는 뜻이었다.
역시나 마력량은 내가 열등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단기적으로 의외성을 노리는 것.
마침 올마르 선배는 제정신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대로 휘몰아치듯 연격을 퍼부었다.
캉, 캉, 캉!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 튀기는 불꽃, 그 모든 것이 내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몇 차례의 공방은 곧 끝이 나고 말았다. 올마르 선배의 두 번째 도끼가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가세하는 두 번째 도끼를, 나는 슬쩍 뒷걸음질을 하며 피해냈다.
후웅, 하고 날카로운 파공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여파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제대로 일격을 허용한다면 땅바닥을 구르는 쪽은 내가 될 터였다.
올마르 선배가 다시 주도권을 쥐었다. 한 걸음을 내딛으며 또 하나의 도끼가, 그리고 이를 피해내거나 쳐내면 또 하나의 도끼가.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갔을 뿐이었지만 벌써 구도가 뒤바뀌었다. 내가 뒷걸음질을 치면, 올마르 선배가 앞으로. 폭우가 쏟아져 내리듯 도끼의 연쇄가 나를 두드렸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하던 발을 그대로 디딤발 삼아, 발목을 비틀어 탄력을 생성했다.
그리고 쏜다.
손도끼가 아니라 내 몸이 올마르 선배의 연격이 이어지는 틈새, 아주 미세한 허점을 찾아 파고들었다. 어느새 내 신형은 올바르 선배의 지척까지.
2m가 넘는 장신을 자랑하는 육체였다. 당연히 팔도 길었고, 그럴수록 안을 파고들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를 타격할 수단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올마르 선배는 과연 용병 출신답게 노련했다. 그는 휘두르려던 손도끼를 급히 회수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그 틈새를 타고 다시 나도 한 걸음, 그리고 올마르 선배는 또 한 걸음. 내 손도끼가 휘둘러질 때마다 올마르 선배의 손도끼가 아슬아슬하게 나를 막아섰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강철이 부딪히며 도끼 자루가 웅웅 울렸다.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내가 나아가는 대로 부드럽게 맞물리며 이어지는 연격, 하필 그 상대가 머리를 빡빡 민 근육질의 사내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삶이란 오욕을 감내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오욕이 사내와 함께 춤과 같은 공방을 나누는 것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차근차근 올마르 선배의 공간을 파먹어 가던 내 몸이 갑작스레 뒤로 물러섰다. 당연히 내가 다가오리라 생각한 올마르 선배는 뒷걸음질을 쳤고, 그래서 나와 그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걸음을 내딛고, 내게 다가서려는 올마르 선배를 향해 손도끼를 투척.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그러지 않아도 근거리, 그러나 투척 준비 자세가 있기 때문에 올마르 선배가 대응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가 손도끼를 쳐내는 동안 내 손이 검을 찾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정거리로 치면 손도끼보다 검이 더 우월했다. 올마르 선배는 뒤로 물러나며 멈칫, 내 손도끼를 쳐내며 한 번 더 멈칫했다.
가속도가 붙을 수 없었고, 그러지 않아도 발재간 하나는 자신감 있던 내가 거리를 더 좁힐 여지를 줄 리가 없었다.
칼날이 우뚝 멎었다. 올마르 선배의 팽팽히 당겨진 팔뚝 근육 앞이었다.
차마 심장이나 목젖을 노리진 못했다. 그랬으면 완승이었겠지만, 올마르 선배는 결단코 그 심부만큼은 내주지 않았다. 아직 내 실력이 그 안을 파고들 수준은 아니란 뜻이었다.
고작해야 몇 분, 그 짧은 시간 안에 수없이 많은 공방이 오고갔다. 어느새 주위에는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고, 멍하니 나와 올마르 선배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내 눈앞에 있는 상대뿐이었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올마르 선배를 바라보았고, 내 손도끼를 쳐내는 동시에 반격을 계획하던 그의 눈동자에는 잠시 갈등의 빛이 스쳤다.
이대로 힘을 주어 손도끼를 휘둘러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토록 보는 눈이 많은 마당에, 심지어 수렵제를 앞두고 더 체력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곧 올마르 선배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간격을 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발재간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어서요.”
“발재간만이 아니야, 공간을 읽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 혹시 관련된 공부를 했나?”
공부라, 그거라면 위상수학을 요즘 듣고 있긴 한데요.
그렇게 시답잖은 농을 던질까 싶었지만 너무 재미가 없어 보류했다. 무사들 사이에서 ‘공부’란 수련과 같은 말이었다. 공간을 읽는 수련을 따로 한 적이 있냐, 라.
그런 고급 기술을 스승 없이 독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적에게 많은 정보를 줄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올마르 선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서히 손도끼를 내려놓았다. 그의 팽팽히 부풀어오른 근육이 부피를 줄여나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칼을 거두었다. 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선배를 향한 마땅한 예우였다.
“한 수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아주 저돌적인 친구구만…….”
올마르 선배의 반응은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진짜로 도끼로 실력을 겨룰 생각까지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묘기나 부리다 말 생각이었단 말인가?
나는 다소 아리송한 기분이었으나, 그 의문을 입으로 내뱉기도 전에 누군가 올마르 선배의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팍, 하고 마치 모래자루를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조금도 아프지 않을 터였다.
과연 내 예상대로 올마르 선배는 석상이 움직이듯 삐걱, 하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 뒤에는 하늘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입에 막대사탕을 문 여인.
활달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날씬한 몸매에, 생김새도 예쁘장하고. 어딜 가나 인기가 있을 법했다. 그녀도 아마 델핀 선배의 조원일 터였다.
“올마르, 당해 버리면 어떡해! 너 때문에 기선제압에 실패했잖아.”
“아니, 나는 그냥 손도끼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
올마르 선배는 무척 억울해 보였지만 여인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팡팡 올마르 선배의 단단한 몸을 두드리며 킥킥거릴 뿐이었다.
그 옆으로, 메마른 사내가 하나 섰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근육이 꽤 발달해 있었다. 허리춤의 칼집만 봐도 검사가 맞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유독 얼굴만 퀭한 사내였다.
“아이시아, 올마르. 이제 갈 시간입니다.”
“알겠어, 알겠어. 페르민 씨. 지금 바로 가면 되잖아? 아!”
‘아이시아’, 그렇게 불린 여인은 내개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갑작스레 입에서 막대사탕을 뽑았다.
그리고 후우, 하고 내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달콤한 향기가 퍼져 나갔지만, 그 이상으로 바람이 시렸다. 나는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숨결에 담긴 한기는 단번에 내 몸을 파고들었다. 으슬으슬 춥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혹시 복수인가? 내 손이 다시 허리춤을 향하기 직전.
아이시아 선배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올마르를 이긴 상이야. 어때? 몸이 차가워지니 피로가 풀리지?”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어느새 내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얼떨떨한 눈으로 아이시아 선배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자세한 원리는 비밀이야. 그럼, 이따 봐.”
“……안녕히 계십시오.”
아이시아 선배와 ‘페르민’이라고 불린 깡마른 사내는 그렇게 떠나갔다. 올마르 선배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강직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다음은, 봐주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 올마르 선배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셋이 떠나고 나니, 뒤늦게 셀린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충돌을 일으킬 때마다 나를 타박하던 그녀라면 당연히 또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다만 셀린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내 등짝을 한 대 팍, 하고 쳤을 뿐이었다.
아팠다. 내 입에서 악, 하고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안 오빠, 진짜 ‘미친개’ 맞구나…….”
“내가 뭘?”
나는 억울하다는 듯 세리아에게로 시선을 향했지만, 세리아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녀로서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럴 수가, 델핀 선배의 조원들과 처음으로 조우해서 기선제압에 성공한 공신을 이렇게 대우하다니.
이 전략적 가치를 알아줄 이는 정녕 없단 말인가. 내 눈이 마지막으로 남은 엘시 선배를 향했다. 그리고 그 엘시 선배는,
“흐끅, 흐으윽… 사, 살려주세요. 다, 다시는 까불지 않을게요… 흑, 흐윽, 엘시 오줌싸개 할게요…….”
손도끼를 본 충격 탓인지, 그렇게 쪼그려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러다 마수 앞에서도 주저앉는 거 아닐지 몰라.
갑갑한 마음에 내 입에서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결국 엘시 선배는 내가 한동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엘시 선배는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흘끔흘끔 내 눈치를 살폈다. 어지간히 내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망설임 없이 손도끼를 뽑아들고 휘두르는 모습이 유독 두렵게 느껴졌다고 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를 달래보기로 했다. 시작은 하잘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엘시 선배.”
“네, 넵! 아, 아니… 으, 응?”
아직 바짝 긴장한 탓인지 엘시 선배는 충성심이라도 증명하듯 충직한 대답을 내놓았다가, 곧바로 철회했다. 나도, 셀린도, 세리아도 일부러 이를 지적하진 않았다.
엘시 선배의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셀린과 세리아는 나와 엘시 선배를 못 본 체 하며 개인정비에 열중했다.
“올마르 선배가 ‘손도끼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던데, 혹시 아는 거 있어요?”
“아, 아아! 그, 그거 말이지!”
나는 엘시 선배가 의외로 무언가 아는 듯 보이자 기대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올마르 선배는 나보다 오랜 시간 손도끼를 다뤄 온 고수였고, 당연히 그에 마땅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터였다.
혹시 손도끼를 지금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면? 아무리 부무장이라지만 손도끼는 이제 내 애병에 속했다.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엘시 선배의 대답은 여러 의미에서 내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사실, 올마르는 평민 출신인데 아버지가 서커스 광대라고 했나? 그래서 손도끼를 가지고 묘기를 부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언젠가 아버지의 서커스에 도움이 되고 싶다나, 하여간 평민들이란. 쯧… 동아리까지 가입했다던데…….”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절로 식은땀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올마르 선배는 그저 손도끼를 사용한 묘기를 내게 보여주고, 조언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면 손도끼로 더 멋진 묘기를 부릴 수 있을지.
손도끼 숙련자가 몇 없기에 발생한 오해였다. 나는 속으로 올마르 선배에게 사죄의 말을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올마르 선배.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올마르 선배가 무얼 해도 기뻐하실 거예요.
나와 엘시 선배가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고 있는데, 셀린이 느닷없이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이안 오빠, 식수는 얼마나 챙겨야 해?”
“많이.”
물론 대답은 내게서 나오지 않았다. 나보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엘시 선배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단호한 어조였다. 이제야 조금 선배 같은 모습이었다.
“어떤 상황이 올지 몰라. 조금 몸이 무겁더라도 식수를 챙겨둬야 해, 유사시에는 버리고 도망치면 되니까. 애초에 이 넓은 숲에서, 마수를 풀어놨다고 해도 발견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어?”
그 말대로였다. 남쪽 숲은 넓었고, 그중에서 내가 찍은 마수는 단 한 마리뿐이었다. 이를 수색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아직 조원들은 그 위험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지만, 내가 누차 경고하긴 했으니 마음가짐이 조금이라도 달라졌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엘시 선배의 눈이 곧바로 몽롱해졌다.
“잘했어요, 엘시 선배. 오랜만에 선배다운데요?”
“헤, 헤헤… 원래 나는 이렇다고!”
엘시 선배를 조에 넣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출정을 준비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결전뿐이었다.
**
“……그러니까 수통을 깜빡했다고요?”
화려한 개최 선언과 함께 숲으로 들어온 지 3시간째, 엘시 선배는 쭈뼛대며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져 있었다.
셀린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었고, 세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네, 네가 자꾸 그, 소, 손도끼로 위협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엘시 선배는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숲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실전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전에서 준비 부족은 아무리 실수라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데렉 교수님도 우리를 훈련시키며 누누이 강조하던 내용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럼 오줌 마셔요.”
“나 오줌싸개 아니라니까! 야, 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엘시 선배는 발끈하며 주먹을 쥐었으나, 내가 망토를 거두어 허리춤을 보여주자마자 곧바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서늘해졌다. 나는 싸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손도끼로 도와드릴까요?”
“히이이익! 자, 자, 잘못했습니다… 까, 까불지 않을게요. 사, 살려만 주세요!”
나는 잠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엘시 선배를 바라보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나는 여분으로 들고 왔던 수통 하나를 말없이 건넸다.
고깔모자를 부여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엘시 선배는, 제 눈앞으로 내밀어진 수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요.”
“……으, 응. 고마워.”
그러면서 엘시 선배는 무언가 쑥스럽다는 듯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그녀가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나는 더는 엘시 선배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켰을 때, 문득 내 감각을 사로잡는 미세한 선이 느껴졌다.
그래, 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치 내 신경으로부터 연결된 실이, 팽팽히 당겨지며 나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다음 순간 내 코끝을 스치는, 묘한 향기.
비리다. 그리고 쇠 냄새. 이러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엘시 선배.”
“으, 응? 왜, 왜애?”
엘시 선배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지만, 지금 내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혹시 생리 중입니까?”
그 말에 엘시 선배의 눈이 부릅떠졌다. 셀린도, 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무례한 질문, 평소의 나였다면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내뱉는 대로 질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엘시 선배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 외침을 멋대로 해석한 나는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셀린, 그리고 세리아는?”
셀린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었고, 세리아는 느닷없이 얼굴을 붉히더니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셀린이 허, 하고 헛웃음을 머금으며 내게 물었다.
“이안 오빠, 머리 괜찮아?”
“세리아?”
그러나 거듭된 비난에도 내 질문은 집요하기까지 했다.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귀까지 새빨갛게 되어 입을 열었다.
말이라기보다는 가까스로 새어나오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만큼이나 작은 소리.
“……아, 아니헤, 으으… 아니에요.”
그렇구나,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제야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셀린이, 의아한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그러지 않아도 그 질문에 대해 답해줄 생각이었다.
“그럼 준비해, 찾았으니까.”
이 냄새가 인간의 피 냄새만은 아니기를, 지독히 바라며 나는 씹어뱉듯 말했다.
사냥감이 저 앞에 있다. 아니, 어쩌면 사냥꾼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