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67화 (67/649)

〈 67화 〉 1. 첫 번째 편지(67)

* * *

내 발악과도 같은 외침에 반응하는 속도는 신속했다. 다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일주일간의 지옥훈련은 그 몸에 새로운 본능을 새겨 넣었다.

검이 뽑혀 나오고, 엘시 선배를 보호하듯 셋이 방진을 짰다. 그때까지도 마수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그 시선을 마주한 내 머릿속에 사고의 실들이 엉켜 들었다.

저 거구, 지난번에 상대한 고위 마수의 예를 생각해 봤을 때 어마어마하게 빠를 터였다. 하지만 저만큼 몸집이 크면 나무 사이를 지나갈 수가 없었다.

차라리 검로에 장애물이 생기더라도 숲 안으로 들어가 싸우는 편이 맞을까? 아니,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저 괴물은 이미 숲에 적응을 끝마쳤다. 심지어 주변에는 나무가 쓰러지거나 한 흔적조차 없었다. 그 말뜻은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어도 좁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는 비책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공터에서 요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 땅을 박찼다.

“엘시 선배, 영창!”

“실드(shield)!”

내 말에 호응하듯 엘시 선배의 완드에서 마력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내 몸을 감싸는 단단한 마력의 갑옷.

이래서 마법사가 중요했다. 최소한 즉사에 이르는 일은 막아주니까.

셀린과 세리아가 곧바로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교차하듯 연격으로 몰아치는 것이 중요했다. 누구 하나에게만 주목할 수 없도록,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도 유효타를 먹일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세리아의 검에 맺힌 짙푸른 오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를 제외하면 우리 중에 검으로 저 마수의 가죽에 흠집을 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오직 마수의 감각을 흐트러트리는 데 주력해야 했다. 가죽은 아니더라도, 코나 눈 같은 부위는 칼이 들어간다. 마수가 나와 셀린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면서, 타격을 누적시킨다.

그리고 결정타는 엘시 선배한테 맡기면 된다. 엘시 선배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다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일으키는 파괴력은 무시무시했다.

약점에 직격한다면, 아무리 마수라고 해도 견딜 수 없었다.

세리아가 마수에게 쇄도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뒤돌아 엘시 선배에게 외쳤다.

“엘시 선배, 뿔에 맞춰요!”

“헤이스트(haste), 스트렝스(strength)… 뭐?”

열심히 우리들에게 보조마법을 걸어주고 있던 엘시 선배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시간이 없었다.

벌써 첫 번째 공방이 오고가고 있었다. 세리아가 짓쳐 들며 허공에 은빛 실선을 그렸다. 교과서적인 올려베기,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늑대는, 도리어 몸을 일으키며 검을 피해냈다.

그러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체고를 자랑하던 녀석이었다. 당연히 체장은 더 길었고, 몸을 일으키니 수백 년은 산 거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 체구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신속한 움직임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불평불만을 할 시간은 없었다.

늑대는 덮치듯이 앞발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툭 튀어나왔다. 고양이도 아닐 텐데, 숨기고 있던 그 길이가 꽤 길었다.

커다란 앞발에 걸맞은 길이였다. 발톱의 길이가 어지간한 칼에 버금갔다. 그러나 세리아는 우리 중 최고의 실력을 가진 검수였다.

쾅, 하고 발톱과 날붙이가 부딪혔다고는 믿기지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리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검으로 발톱을 쳐냈다. 푸른 오러가 칼날에서 불타고 있었다.

세리아는 노련하게도 늑대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복부는 상대적으로 가죽이 얇은 편이었다. 그곳을 오러로 가르면 늑대도 무사할 수는 없을 터.

그러나 늑대의 앞발은 세리아가 품속을 파고들기도 전에 다시 휘둘러졌다. 애초에 앞발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검으로 쳐낸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 셀린이 곧바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손에서 빛줄기가 폭사됐다. 그녀의 장기인 발검술이었다.

쾅, 하고 다시 터져 나오는 폭음.

셀린이 전력을 다한 일격은 연격이 불가능하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무시무시했다. 세리아가 이를 악물고 쳐내야 했던 늑대의 일격을 튕겨낼 정도였다.

그 보조에 힘입어 세리아는 이미 늑대의 품 안에 파고든 뒤였다. 아주 짧은 시간, 이대로 첫 번째 유효타를 먹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은 그 순간.

훅, 하고 늑대의 몸이 기묘한 각도로 뒤틀렸다. 아니, 뒤틀렸다고 해야 할까.

마치 연체동물처럼 몸이 휘었다. 그 커다란 몸집이 쭈우욱 늘어나며 허공에 궤적을 새겼다. 어느새 늑대는 셀린과 세리아의 후방을 점한 채였다.

미친, 나는 그렇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수라도 해도 늑대가 연체동물처럼 움직이다니? 가죽과 뼈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심지어 마수는 몸이 길쭉해지는 것만으로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저러니까 지금껏 빽빽한 나무 사이를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을 터였다. 오히려 나무가 많이 자란 곳일수록 저 마수에게 유리했다.

상대는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저 특성을 이용하면 마수는 자유자재로 숲속을 누빌 수 있을 테니까.

공터에서 승부를 보기로 한 내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조금도 반갑지는 않았다. 당장 셀린과 세리아는 당황해서 멈칫한 상태고, 마수는 그 배후를 점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위기 상황이었다. 나는 뛰쳐나갈 시간도 모자라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뽑아야 했다.

그 다음 투척, 화살처럼 쏘아진 손도끼가 회전하며 늑대의 측면을 노렸다.

이제 막 셀린을 덮치려는 듯 쫙 벌어진 저 입 근처에라도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내 투척 솜씨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캉, 하고 회전하던 손도끼가 마수의 이빨과 맞부딪히며 튕겨나갔다. 이빨은 신경이 모여 있는 부위, 일단 한 대 얻어맞으면 아무리 단단한 녀석이라도 아플 수밖에 없었다.

늑대는 크허헝, 하고 구슬픈 소리를 내며 아가리를 뒤틀었다. 셀린을 비껴가며 바닥에 처박히는 늑대.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이빨에 손도끼를 맞은 정도로 마수가 오랜 시간 넋을 놓고 있을 리가 없었다.

“피해!”

내 외침에 흠칫거리고 있던 셀린과 세리아는 곧바로 마수의 곁을 벗어났다. 그 빈자리를 마수의 앞발이 스치고 지나갔다. 채찍처럼 길어진 팔이었다.

서걱, 하고 공기가 절단당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름이 끼치는 소리였다.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으면서도, 앞발로 기습을 노리고 있었단 증거였다.

그대로 있었다간 셀린과 세리아가 양단되었을 터였다. 그녀 둘은 마수의 곁을 벗어나자마자 내 옆으로 다시 모였다.

질린 표정이었다. 마수들에게 기기묘묘한 특성이 있다곤 들었지만 설마 이 수준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모양이었다.

마수는 어느새 길쭉하게 늘어났던 몸을 다시 압축시키고 있었다. 풍선에 공기가 들어가듯 다시 근육질의 거구로 돌아간 뒤였다.

“혹시 공략법 생각나는 거 있는 사람?”

“……도망치는 건?”

셀린의 말이었다. 그녀는 간담이 서늘해진 낯빛이었다. 그야 방금 전에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온 상황이었다. 실전 경험도 부족한 그녀가 감정 동요를 보이는 건 당연했다.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조용히 내 고개가 내저어졌다. 그러다간 저 마수가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 뻔했다.

세리아는 그 와중에도 튕겨나간 내 손도끼를 챙겨 와 내게 건넸다. 마수 토벌을 다녔다더니, 셀린보다는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력도 우리 중에서는 최고니까.

그러한 그녀조차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심각한 눈빛, 그녀가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엘시 선배한테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거야 좋지, 그렇다면 시간을 끌어야 했다. 나는 허리춤에 손도끼를 다시 매달았다.

그때였다. 전조도 없이 늑대의 몸이 포탄처럼 쏘아진 건.

세리아는 본능처럼 몸을 던져 피해냈지만, 셀린은 아직도 넋을 놓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밀치듯 감쌌다.

쿵, 하고 몸 전체를 울리는 충격.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새끼로 추정되는 고위 마수도 이랬다. 전조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몸통박치기.

지금에야 그 비밀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 멋대로 몸을 줄였다 늘였다 하는 놈이었다. 당연히 드러나지 않도록 근육을 웅크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내 몸이 나무 두어 개를 으스러트리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우지끈, 하고 나무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 하고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실드는 물론이고 내부까지 타격이 전해져 왔다.

“야, 괜찮……!”

“신경 쓰지 말고 영창이나, 크으… 계속해요!”

엘시 선배가 당황한 듯 그렇게 내 안부를 물어왔지만, 한시가 급했다. 지금 공터에서는 이미 세리아와 셀린이 마수와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또 다시 마수는 몸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변칙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실드 덕에 즉사는 면했지만, 내장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퉤, 하고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뱉어냈다. 고작 일격을 허용했을 뿐인데 이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팔을 다른 팔로 팍, 팍, 두드리며 억지로 진정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내달려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다.

“이안 오빠, 괜찮……!”

“괜찮으니까 싸워!”

엘시 선배는 이미 영창에 들어가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긴 했지만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동안 보조마법의 영창은 불가능하니, 실드는 이제 없다고 봐야 했다.

감각을 최대한으로 깨워 길쭉해진 늑대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검을 찔러 넣었다.

쿡, 하고 찌르는 느낌은 드는데 가죽이 꿰뚫리는 감각은 없었다. 그래도 따끔하긴 했는지, 불의의 일격을 당한 마수가 울부짖었다. 그 틈을 타 습격을 당하고 있던 세리아가 턱 밑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검을 그었다.

푸슉, 하고 소량이지만 피가 튀겼다. 과연 세리아였다. 네임드 수준의 마수라도 세리아의 오러에는 상처를 입는 듯했다.

마수는 꽁무니를 찌른 나와 처음으로 유효타를 먹인 세리아 중 어디를 먼저 공격해야 할지 헷갈리는 모습이었다. 그때 셀린의 검이 빈틈을 파고들어 마수를 강타했다.

쾅, 하는 소리. 검격이 틀어박혔는데도 폭음이 들려왔다. 가죽을 제대로 뚫지 못했다는 의미였지만, 출중한 마력을 전부 때려 박은 일격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둔기가 될 수 있었다.

마수는 고통을 느끼는지 울부짖다가, 뒷발을 쭉 늘어트렸다. 마치 비 내리는 날의 지렁이처럼.

그리고 긁어내듯 허리 부근에 달라붙은 셀린을 쳐냈다.

“꺄악!”

채찍에 얻어맞는 소리와 함께 셀린의 몸에 감싸져 있던 실드가 깨져나갔다. 뒷발의 발톱이 셀린의 실드에 틀어박혔던 탓이었다.

셀린이 땅바닥을 굴렀다. 엘시 선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어떻게든 움직임을 고정시켜! 지금 간다!”

셀린은 아직 쓰러져 있었고, 그 지시를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뿐이었다.

나와 세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함께 땅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마수는 더욱 흉포한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다음 일격을 맞으면 끝이다. 하지만 유일한 활로는 마수를 쓰러트리는 것뿐이었다. 보다 저돌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수의 몸이 다시 응축되고 있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굳이 그 단단한 근육질의 몸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몸통박치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나와 세리아의 눈동자가 또 한 번 마주쳤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 몸통박치기를 멈춰 세우지 않으면, 엘시 선배의 마법을 직격시킬 수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 그러함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세리아가 곧바로 내 앞을 막아섰다. 아직 실드 마법이 남아있으니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직후 울려 퍼지는 충돌음.

펑, 하고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며 내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세리아도 저 거구에서 나오는 운동력을 흘려내기는 힘들었는지,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나갔다.

마수가 멈칫한 순간이었다.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낀 마수가 다시 몸을 길쭉하게 늘어트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신형이 솟구치듯 쇄도했다. 지근거리, 늑대의 팔조차 함부로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그때 내 허리춤에서 손도끼가 뽑혀 나왔다. 그리고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늑대의 콧잔등 위로, 전력을 다한 내려찍기.

콱, 하고 살점을 헤집고 도끼가 틀어박혔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주둥이를 땅바닥에 처박고 싶었지만, 마수의 힘이 워낙 강해 불가능했다.

그리고 얼굴에 팍, 하고 튀기는 핏물.

목표를 완수한 나는 측면으로 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격통에 마수는 늑대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손도끼가 그 반동을 못 이겨 허공을 날았다. 마수의 피가, 도끼날을 따라 핏빛 무지개를 그렸다.

구슬픈 비명이 압도적인 성량으로 울려 퍼졌다. 웅웅거리며 귓전을 울리는 소음에, 나는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그 다음 순간.

세상이 새하얘졌다.

비유나 농담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세상이 새하얀 도화지처럼 풍경을 지워나갔다. 시각도, 청각도 서서히 그 경계를 무너트렸다.

벼락이었다. 천공에서 내리꽂힌 전하의 창이 세상을 백열시켰다.

지반이 터져 나가고, 열풍이 나무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고작해야 여파에 불과한데도 그 충격파에 내 몸이 또 다시 땅을 뒹굴었다.

엘시 선배의 마법이었다.

이름하여 '빛의 심판', 5서클의 전격 마법.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일점을 향해 내리꽂히는 관통형 마법인데도 폭탄이라도 터져 나간 듯 주위가 어수선했다.

청각이 돌아오자 삐이이­ 하는 이명만이 귀벌레처럼 뇌를 파고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 위력이 약점에 직격한다면 아무리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도 무사할 수 없을 터다.

그러한 확신을 담아, 나는 엉금엉금 기어 땅바닥을 구르던 손도끼를 쥐었다. 전도체라 전하가 파직거리고 있었지만 참았다.

그제야 내 눈이 마수를 향했다.

주둥이를 치켜든 마수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그대로 석상이라도 된 듯이.

지직거리는 전하의 잔재가 대기를 파고들고 있었다. 긴장한 낯빛으로 마수의 상태를 살피던 나와 세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마수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를 노려보기 전까진.

그 뿔은 청색의 전하로 백열하고 있었다. 그 마력이 안구까지 전해진 듯, 칠흑으로 물들어 있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어디를 보더라도 죽음을 목전에 둔 짐승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기등등한 그 눈동자는 먹잇감을 앞둔 맹수의 그것에 가까웠다.

내가 멍하니 마수의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데, 엘시 선배가 비명처럼 외쳤다.

"전격 내성이야! 저 새끼, 전격 내성을 가지고 있어!"

어라, 이래서는 안 되는데.

내 머리가 새하얘졌다. 뿔이 약점이라는 말만 믿고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뿔을 맞고도 저렇게 멀쩡하다고?

얼핏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뿔이었다. 가죽이면 몰라도 뿔을 오러로 절삭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정지한 시간, 새파란 마수의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내 시선이 서서히 마수의 뿔을 살폈다.

지극히 예민해진 감각이 마수의 이마 부근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다 덜컥 걸리는, 아주 미세한 균열.

뿔과 가죽 사이에, 보였다. 틈새가.

다시금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굴렸다. 그 자리를 긁고 지나가는 마수의 앞발.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나는 흙투성이가 되도록 땅을 굴러 후방으로 후퇴했다.

엘시 선배는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이가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더는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나는 엘시 선배한테 외쳤다.

"엘시 선배, 한 번 더!"

내 강권에도 엘시 선배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두려움에 젖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무, 무, 무슨 소리야… 저 자식 전격 내성이라니깐?! 내 마법은 몇 번을 갈겨도 의미 없… 히이이익! 알겠어요! 하, 할게요! 하면 되잖아!!"

물론 엘시 선배의 반항은 길지 못했다. 땅바닥을 구르는 와중에도 회수한 손도끼를 슬쩍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엘시 선배뿐만 아니라 세리아도, 어느새 몸을 추스른 셀린도 무슨 생각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할 거냐고?

"셀린, 세리아! 다시 시간을 끌어!"

기억에 없는 일주일 이후, 유독 내가 잘하는 짓.

즉, 미친 짓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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