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1. 첫 번째 편지(70)
* * *
“델, 핀 유르디나…….”
그러나 내 자그마한 중얼거림은 델핀 선배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랬듯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세리아에게 다가섰다.
세리아가 흠칫 고개를 숙였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시선을 피하고, 미세하게 떨리는 그 몸.
“안심해, 너는 쓸모를 증명했으니까. 최소한 내가 가주로 있는 동안은, 네가 유르디나의 성을 박탈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것은 마치 세리아가 그녀를 위해 사냥감을 잡기라도 했다는 태도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세리아는 누구보다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녀의 칼은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그 칼로 베어낸 마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델핀은 세리아의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느긋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규칙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한다. 그래서 유르디나 가문이라고 했나.
델핀 선배는 나지막이 물었다.
“싸울 거니?”
그러든 말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 세리아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렸다. 어느덧 셀린도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검을 떨어트린 뒤였다.
주저앉는 그녀의 어깨에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셀린!”
나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미친듯이 몸부림을 쳤으나, 페르민 선배의 말랐지만 단단한 몸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팍, 하고 내 뒷목을 쳐서 정신이 흐릿해지도록 만들었다.
기절까지는 하지 않았다. 페르민 선배는 오히려 놀랐다는 눈빛이었다.
“정신력이 대단하군요, 후배님. 감탄했습니다. 출혈량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흐으, 흐으, 하고 거친 숨을 내쉬며 내 눈이 페르민 선배를 향했다. 그는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피투성이가 된 내 왼팔을 바라보았다.
“응급처치라도 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군요. 본래라면 아예 꺾어버려야겠지만…….”
그의 손에 새하얀 광채가 맺혔다. 그리고 스르륵, 쓸 듯이 내 왼팔을 스치고 지나가자 피투성이던 왼팔에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말 그대로 응급처치에 불과했다. 피만 멎게 하는, 간단한 처치. 그럼에도 이러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수도사?”
달구어진 숨소리, 가까스로 내뱉어진 내 중얼거림에 페르민 선배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술이 무시무시하다 싶더니 성국 출신의 수도사였다. 신성력으로 몸을 강화해 싸우는 그들은 피부가 철판 같고, 박투술에도 능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체술을 경계했을 텐데, 검을 들고 다니길래 깜박 속아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그 검술 솜씨마저 수준급이었다.
내게는 분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제 동료들이 제압당한 현실이 세리아를 더욱 분노케 만들었다. 특히 내가 쓰러지자마자 그녀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살기가 어렸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각오를 다지더니, 떨리는 팔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검극을 겨누었다.
델핀 선배는 후후, 하고 우습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애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오렴.”
그 다음 순간, 푸른 오러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마력의 정수가 세 개의 실선을 그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비기, 금사검(???)이었다. 그리고 세리아가 다룰 수 있는 최고의 살인기예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를 썼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델핀 선배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오직 하나.
횡으로 그어지는 금빛의 검로에, 그 모든 실선들이 박살나고 깨져 나간다.
전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있긴 했겠지만 눈으로 쫓아갈 수 없는 속도였다. 무자비할 정도로 단순무식하게 실력의 차이를 보여준 델핀 선배는, 검을 두 번 휘두르지 않았다.
콱, 하고 델핀 선배의 발이 어느새 세리아의 명치 부근에 틀어박혔다. 세리아는 그대로 허공을 찢으며 날아가 버렸다.
이미 마수를 상대하며 부상이 누적되어 있던 그녀였다. 급소에 직격한 발차기의 위력이 무시무시했는지,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땅바닥에서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압도적이다.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토록 강한 세리아인데.
델핀 선배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그녀의 몸가짐에는 한 점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마치 산보라도 나왔다는 듯.
그녀는 망설임 없이 걸어, 죽어가는 마수의 앞에 섰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대단해, 대단해. 이 수준의 마수는 나도 단독으로 상대하기 꺼려지는 괴물인데, 어떻게 쓰러트렸을까? 감탄했어, 손도끼 공자… 옛말로, ‘경천동지(????)’라고 하던가?”
쿨럭, 하고 내 입에서 다시 핏물이 한 웅큼 쏟아져 내렸다. 페르민 선배는 내게 조언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부상이 심합니다, 델핀의 도발이야 흘려들으면 그만이지요. 평정심은 부동심으로부터 나옵니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나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페르민 선배를 흘겨보고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비겁, 커억… 비겁, 하잖습니까…….”
내가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비난이었다. 그 말을 듣고, 델핀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싱긋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잖아, 손도끼 공자.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떡하겠어? 최고의 사냥감은 이 늑대가 될 것이 뻔한데.”
“어, 어떻게… 우, 우리를…….”
“단검.”
나는 그 말에 멍하니 내 품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델핀 선배가 상이라며 내게 남기고 간 단검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델핀 선배는 진작부터 우리를 견제하려고 했단 소리였다.
허, 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삼켰다.
내 잘못이었다. 경계심이 부족했다. 무엇이든 잠재적인 경쟁자가 준 물건이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했어야 했다.
자괴감이, 가슴을 꾹 옥죄어 온다.
마지막 기회를 위해 이를 악물던 세리아는? 일주일간의 지옥훈련에 군말 없이 따라와 준 셀린이나, 우승하자는 약속을 나누었던 엘시 선배는?
“야 이 비열한 년아! 그렇다고 애들을 죽어라 팰 필요는 없잖아! 이미 부상자들이라고!”
엘시 선배는 그렇게 고함을 쳤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시아 선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엘시 선배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시아 선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찡긋하며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내밀었다.
나름대로 인사인 듯했다. 델핀 선배는 엘시 선배를 바라보지조차 않았다.
“엘시,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참 인상 깊네. 꼭 필요 이상으로 폭력을 행사해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던 말썽쟁이가…….”
“그, 그거랑 이게 같냐!”
엘시 선배가 바락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최대한 우리들을 보호하고 싶은 듯했다. 그녀의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에 분한 듯 옅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셀린은, 어깨에 손도끼가 박혔고.
시야가 흐릿해진다. 호흡이 점차 가빠져 왔다.
흐으, 흐으, 흐으으. 내 입에서 숨소리가 새어나오는 빈도가 점차 빨라졌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서서히 더 좁아진다.
시야가 암전했다. 내 귓가에 페르민 선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후배님, 괜찮습니까? 후배님, 후배님?!”
그러나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내 세상은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감각이 차단당한 그 순간.
세계가 뒤집혔다.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생김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피에 젖은 가녀린 손이, 내 가슴팍에 손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팔이 덜덜 떨렸다.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슬픈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울부짖으며 땅을 구르고 싶었다.
품에 안긴 여인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잊지 말아요.”
무엇을? 나는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뒤집어진 세계 속에서 내게 신체의 자유는 없었다.
다만 그 새하얀 손이 가슴팍에 주르륵 핏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진 그때.
후회하지 않겠다.
홀로 중얼거리는, 울분으로 목이 메인 사내의 혼잣말만이.
다시는, 후회하지 않겠다.
그 타는 듯한 금빛 눈동자와 마주하면서, 세계가 다시 한 번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숨이 돌아온다.
**
델핀은 무감정한 눈으로 죽어가는 마수를 내려다보았다. 헐떡이는 숨이 가쁘다. 곧 죽을 테지만, 그래도 직접 목숨을 끊어주는 것이 사냥감을 향한 예의겠지.
그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델핀은 검을 뽑았다. 목표로 하던 사냥감은 이미 잡은 뒤였다. 불쌍한 이복동생과, 그녀에게 처음으로 수치를 준 손도끼 공자.
맥 빠질 만큼 손쉬운 결말이었다. 설마 마수랑 싸우면서 부상을 당했을 줄이야, 그녀로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가슴 떨리는 상대였는데 말이지, 그러나 승패가 결정된 이상 그들에게 줄 관심은 없었다.
물론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행위가 남의 노력을 약탈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살고 있는 세계의 법칙은 그랬다. 강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약자는 뺏긴다.
지금은 그녀가 강자일 뿐이었다. 마을사람들이 고생해서 일군 알곡들이더라도 군대가 쳐들어오면 모조리 빼앗기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였다.
엘시가 빽빽 소리를 지르고, 페르민이 늘 그렇듯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상황이 반전될 여지는 없었다.
그녀의 검이 하늘 높이 치켜들어졌다. 찬란한 금빛 광채가 그녀의 검에 어렸다. 그녀의 오러라면 이 불쌍한 생명에게 안식을 선물해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순간.
“크아악!”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져서, 델핀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팍, 하고 꽂히는 손도끼.
그녀의 얼굴을 아주 미세한 차이로 스쳐 지나가, 그 손도끼는 귀신같은 낙차 운동을 보이며 그대로 마수의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푸슉, 하고 핏물이 터져 나온다. 그제야 마수는 가까스로 이어가던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델핀은 그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눈치 채지 못했다고?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그럴 리가 없었다. 돌아보는 그 순간까지, 날아오는 손도끼를 감지하지 못하다니.
그 말은 곧, 만약 그 손도끼가 그녀를 노리고 던져졌다면.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했으리란 소리가 아닌가.
델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언제나 오만하던 그녀로서는 얼마만에 느끼는지 모를 감정이었다.
그녀의 진홍빛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나.
헐떡이면서, 허벅지를 짚은 채 서 있는 사내였다. 왼팔은 이미 엉망진창이고, 가파른 숨소리에서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애초부터 델핀과 맞서기에는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데 부상까지 당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델핀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왜, 그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지.
델핀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그 주위를 훑었다.
어느새 그를 제압하고 있던 페르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쥐어 싼 채 땅을 구르는 중이었다. 무엇에 당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내는 퉤, 하고 무언가를 뱉어냈다.
살점이었다. 그것이 누구의 살점인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델핀의 눈이 다시금 사내의 눈동자를 향했을 때, 그는 웃었다.
“……어디 한 판 해봅시다, 연분홍 영애.”
미친놈, 델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을 담은 눈빛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