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1. 첫 번째 편지(71)
* * *
묘한 감각이었다. 날뛰는 마력이 야수처럼 혈맥을 타고 흘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는 흐릿하고, 왼팔은 너덜너덜하고.
마력의 격류가 혈맥을 강제로 넓히며 쏟아져 내렸다. 내 몸에 이토록 많은 마력이 잠들어 있었던가? 거친 마력의 흐름이 가상의 핏줄을 긁으며 지나갔다.
아프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뇌를 울리는 듯했다. 온몸의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그럴수록 더더욱 선명히 느껴지는 고통.
몸은 만신창이였다. 호흡이 더욱 가빠졌다. 흐으으, 하고 다급히 들이마신 산소가 폐부를 팽팽히 팽창시켰다.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이곳은, 어디지. 그래, 아카데미 남쪽의 숲이었다. 수렵제가 열리는 장소.
내 눈이 멍하니 나를 흔들어 깨우는 사내를 향했다. 페르민 선배였다. 청각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후배님, 후배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볼이 움푹 들어간 퀭한 얼굴의 사내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과연 신앙심 깊은 수도사다웠다.
물론 성직자라고 모두 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신앙이 깊으면 교리에 따라 성실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이나 깊은 신앙을 지녔기에 수도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피부를 철판처럼 질기게 만들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뜨거운 모래를 몸에 붓고, 그 위를 신성력으로 덧칠해 가며 신체 자체를 하나의 병기로 벼린다.
지금처럼 팔 한 쪽을 쓸 수 없고, 제압까지 당한 상황에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은 아니었다. 그를 제압할 수 있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기습뿐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내렸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배, 페, 흐으으, 르민 선배.”
풀린 동공으로, 멍하니 그러한 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보고 페르민 선배는 더욱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내 자그마한 중얼거림을 듣기 힘들었던지, 그는 내 목소리를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얼굴을 내 곁에 가져다댔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페르민 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겐 이 방법밖에 없었다.
콰직, 하고 연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르민 선배의 눈이 멍하니 나를 향했다. 피가 팍 튀어 오르고, 나는 페르민 선배의 코를 물어뜯고 있었다.
뜨거운 모래를 쏟아부으며 단련한다 해도 얼굴에까지 쏟아부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그나마 약한 부위라고 할 수 있는 코를 물어뜯었다. 그럼에도 질긴 피부였다.
하지만 나는 악을 다해 페르민 선배의 코에서 살점을 물어뜯었다. 페르민 선배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비명을 내지르며 코를 감싸 쥐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페르민 선배의 명치에 발차기를 날렸다.
팍, 하고 마치 두꺼운 가죽을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충격은 제대로 전해졌는지, 페르민 선배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내 몸이 반사적으로 손도끼를 들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페르민 선배의 관자놀이에 손도끼가 틀어박혔다. 물론 날과는 반대되는 방향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리 몸을 단련하더라도 관자놀이까지는 단련할 수 없었다. 테안 같이 마력으로 버티는 것이 고작, 그러나 지금 페르민 선배는 마력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풀썩 쓰러지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그렇게 페르민 선배가 쓰러질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계동작이었다. 마치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듯,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들끓는 마력이 심장을 거치며 맥동하고 있었다. 교차하고 교차하며 죽어가던 몸에 활력이 감돌았다.
내 눈동자가, 델핀 선배를 향했다.
저 자가 내 적이다. 너무나 강한 적이었다. 태양을 닮은,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인.
멀쩡한 상태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무장 상태일 때 고작해야 손 하나를 희생해서 동수를 이루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너무나 멀쩡했고, 나는 팔 하나를 쓰지 못하는데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꺾여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두려움이 들지 않았다.
분노가, 벌컥 가슴팍의 문을 열어젖히고 정수리까지 솟구쳤다. 까닭을 알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색채의 감정이었다. 내 몸이 저절로 움직여 손도끼를 날렸다.
대기를 찢는 도끼날이, 마침 뒤를 돌아보려 하던 델핀 선배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궤도를 푹 꺾으며 마수의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훅, 날카로운 파공성이 뒤늦게 델핀 선배의 옆을 스쳤다.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핏물이 공작깃처럼 튀었다. 델핀 선배라는 아름다운 여인의 배경을 장식하기에는 적당한 연출이었다.
퉤, 하고 내 입에서 페르민 선배의 살점이 뱉어졌다. 나는 흐, 하고 웃었다.
“어디 한 판 해봅시다, 연분홍 영애.”
그리고 미안해요, 페르민 선배. 다음에 밥 한 끼 살 테니까.
나는 페르민 선배에게 작은 목소리로 사죄하고, 칼을 뽑았다.
코를 다치면 울컥울컥 핏물이 차오르며 기도를 막으려 든다. 그러니 한동안 전투에 복귀할 수 없을 테고, 고위 사제를 찾아가면 코 정도는 금세 복구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내에 그러한 판단을 내렸을까.
의미 없는 의문이었다. 흐으, 하고 달아오른 숨을 내뱉을 때마다 뇌리에 과부하라도 걸린 듯 기억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잊지 말라고? 도대체 무엇을.
그 순간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머리를 민 거구의 사내였다. 손도끼가 나를 양단시킬 기세로 내리찍어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마자 공간이 쪼개진다. 어찌나 강한 힘을 담았는지 웅웅거리며 떨리는 공기 소리가 매서웠다.
손도끼가 휘둘러지면, 또 하나의 손도끼가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연달아 휘몰아치는 손도끼의 연쇄였다. 설상가상으로 저 멀리에서는 아이시아 선배가 영창을 하며 마법을 준비 중이었다.
보조마법일까? 아니면 나를 직접 타격하려고 들 수도 있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내 뇌리에 페르민 선배의 움직임이 스쳐지나갔다.
팔이 휘둘러지기 직전, 그 움직임을 제압해서 그대로 땅바닥에 내 몸을 처박던 유술.
성국에서 훈련받은 수도사들만이 쓸 수 있는 비전 박투술이었다. 자세한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날붙이를 휘두르는 틈을 파고들어 팔을 붙잡는 것만 해도 오랜 훈련이 필요할 터였다.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단지 나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손도끼가 다시 한 번 휘둘러지는, 그 미세한 틈새에.
뒷걸음질을 치던 내 몸이 땅을 박차고 들어갔다. 이미 숲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 갑작스러운 쇄도에 당한 적이 있는 올마르 선배였다. 당연히 뒷걸음질을 치며 내 후속타를 대비하려 했지만, 내 목표는 그의 몸이 아니었다.
탁, 하고 내 손이 자연스레 올마르 선배의 단단한 팔을 잡았다. 그 동작이 매끄러워 올마르 선배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봐야 쓸 수 있는 팔은 하나밖에 없었다. 올마르 선배의 거구를 넘길 수 없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넘어간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올마르 선배의 세상이 뒤집히고, 나는 온힘을 다해 그 거구를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이를 악문 내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쿵, 하고 지반이 터져 나간다.
박살난 흙바닥의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마치 올마르 선배의 거구를 중심으로 벼락이라도 내리꽂힌 듯했다.
“커, 커억……!”
올마르 선배의 입에서 울컥, 하고 핏물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가 파다하게 일어 시야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내가 망설이고 있을 틈은 없었다.
올마르 선배의 거체는 지반을 어느 정도 파고들어 있었다. 그 정도의 충격이었으니 당장 움직이지는 못할 터였다.
내 칼이 올바르 선배의 어깨에 쑤셔박혔다.
“끄아아악!”
푹, 하고 날붙이가 근육을 찢는 감촉과 함께 올마르 선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쯤에서 그치지 않고, 칼에 더욱 체중을 실어 더더욱 날을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올마르 선배의 입에서 한 번 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올마르 선배는 덜덜 떨리는 남은 팔로 어깨로 들어가는 칼날을 쥐었다. 올마르 선배의 눈동자에 역력한 고통의 기색이 감돌았다.
나는 올마르 선배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씹어뱉듯이.
“……셀린의 몫입니다.”
푸슉, 하고 칼을 빼자마자 막혀 있던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어지는 검로. 남은 팔의 힘줄까지 끊어버리는 일격이었다.
비명과 핏물이 다시 한 번 허공에 색을 입혔다. 땅에 틀어박히며 누적된 피해가 있을 테니, 이제 한동안 올마르 선배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때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쏘아졌다. 얼음송곳, 아이시아 선배였다.
나는 고개를 기울여 간단히 이를 피해냈다. 내 눈이 자연스레 아이시아 선배를 향했다.
“오, 올마르! 너, 너 진짜……!”
아이시아 선배는 화가 난 듯했다. 오랜 동료가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 나도 그 때문에 머리에 열이 뻗쳐 있었으니까. 내 사나운 눈동자가 아이시아 선배를 노리자, 아이시아 선배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아직은 두려움보다 분노가 큰 듯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더니, 어느새 수십 개나 소환해 둔 얼음송곳들을 차례로 발사했다.
팍, 팍, 팍. 기묘한 발사음과 함께 차례로 쏘아지는 얼음의 탄환들은 기기묘묘한 궤적을 그렸다. 단순한 일직선이 아니었다. 점차 공간을 잠식해서, 마지막에는 필중할 수 있도록 하는 마법이었다.
얼음송곳을 쳐내봐야 점점 더 포위당할 뿐이고, 그렇다고 피하려 하면 점점 더 궁지에 몰릴 뿐이다.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궤도와 그 이상의 공간 감각이 필요한 마법이었다.
그 정도는 돼야, 델핀 선배와 함께 다닐 만한 실력자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상반신을 숙여 쏘아진 얼음송곳을 피해냈다. 그리고 땅바닥을 긁듯이 내 손이 손도끼를 쥐었다. 올마르 선배가 떨어트린 손도끼였다.
내 대응은 간단했다. 그대로 손도끼를 투척하는 것이었다.
허공을 찢으며 손도끼가 회전했다. 얼음송곳들 사이를 비행하는 손도끼의 궤적은 아슬아슬했다. 쏘아지는 얼음송곳들 사이를 스쳐지나가며, 아이시아 선배를 향하는 도끼날.
아이시아 선배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얼음송곳들을 뚫고 도끼날이 제 앞까지 날아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손도끼가 빨라도 이미 시야에 들어온 뒤였다. 얼음송곳 하나가, 손도끼를 향해 쏘아졌고 비스듬히 충돌하는 데 성공했다.
손도끼는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 위로 올라가 포물선을 그렸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손도끼를 보며, 그녀는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팍, 하고 그녀의 종아리에 도끼날이 꽂히기 전까진.
“커흑……?!”
아이시아 선배의 자세가 곧바로 무너졌다.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종아리를 향했다. 그곳에는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후방에서 날아든 것이다.
어떻게, 아이시아 선배는 내게 그런 눈빛을 향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손도끼가, 그대로 원반처럼 반환 궤적을 그리며 아이시아 선배의 종아리를 뒤에서 찍어버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를 대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나는 얼음송곳을 피하며 올마르 선배의 나머지 손도끼를 챙긴 뒤였다. 아이시아 선배의 자세가 무너진 순간,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발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당겨지며 가속도를 더했다. 그야말로 순식간, 아이시아 선배와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이시아 선배는 발악처럼 남은 얼음송곳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무너진 자세에서 쏘아진 얼음송곳은 궤적조차 엉망진창이었다.
그 정도는 검날로 쳐부수면 그만이었다. 잠시 멈칫한 사이, 내 검에서 은빛 오러가 붓처럼 잔상을 남기며 쏘아졌다.
쾅, 쾅, 쾅!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얼음송곳이 하나씩 박살나며 아름다운 잔해를 남겼다. 얼음 조각을 투과하는 빛무리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그 몽환적인 광경을 목도한 아이시아 선배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핼쑥해질 뿐이었다.
그 다음 쇄도를 막을 얼음송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흩날리는 얼음의 잔해를 박차고 나선 나를 보고, 아이시아 선배는 제 머리를 웅크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주저앉은 채였다.
“오, 오, 오지 마! 그만! 그마… 꺄하윽?!”
그녀 앞에 다가선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남은 다리를 찔렀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시아 선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손도끼를 들어 날이 없는 방향으로 새된 소리를 내지르는 아이시아 선배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시아 선배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이제는 비명조차 없었다. 그녀의 몸이 마른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이건 엘시 선배의 몫입니다.”
내 싸늘한 목소리에, 엘시 선배는 당황한 듯 스스로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으, 응? 나, 나?”
그러고 보니 엘시 선배의 발목은 아직도 얼음 족쇄에 묶여 있었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마법도 쓸 수 없는 듯 보이고,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먼저 다가서려 했다.
엘시 선배를 풀어주는 쪽이 우선이었으니까. 내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곧바로 엘시 선배에게로 향했을 터였다.
“……어떻게 한 거지?”
내 걸음이 우뚝 멎었다. 말없이 내 눈이 그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델핀 선배였다.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살짝 미간마저 좁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롭고 도도하던 그녀였다. 지금 보이는 표정 변화만 하더라도 노골적인 감정 표현에 속했다. 그만큼이나 평정을 잃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델핀 선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팔은 욱씬거리고, 몸은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고, 지친 상태에서 너무 무리한 탓인지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태연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셀린도, 엘시 선배도 안심하길 바라면서.
“올마르를 쓰러트린 그 체술, 성국의 비전 유술이지?”
“글쎄요.”
“그리고 아이시아에게 던진 도끼가 그리던 그 기묘한 궤적… 혹시 소드 서클(sword circle)에서 사사받은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요.”
델핀 선배의 미간이 불만스레 일그러졌다.
아무 말도 없이, 금빛과 핏빛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허리춤으로 손이 향했다.
충돌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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