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1. 첫 번째 편지(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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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어둠이 내려앉았으나, 지상에는 빛과 열이 잔류하고 있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들을 땅 위로 끌어내린 듯한 광경이었다. 찬란한 문명의 열기가 대지를 달구었다.
대자연의 빛무리들은 오늘 하루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지상에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달빛만이, 자연과 문명의 경합 속에서도 홀로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수렵제의 끝을 알리는 풍경이었다. 어느덧 아카데미의 남쪽 숲 앞에는 수없이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주말 양일 동안 이어지는 수렵제의 가장 큰 볼거리가 곧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이틀간 진행되는 축제라지만, 내일은 사냥 성과를 축하하는 후야제가 예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수렵제를 대표하는 행사는 누가 뭐래도 오늘 밤 이루어지는 시상식이었다.
아카데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인파가 한곳에 모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노점을 운영하는 학생들조차 시상식이 다가오면 잠시 노점을 닫고 이곳으로 모여들 정도였다.
수렵제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였다. 그해 아카데미 최고의 사냥꾼이자, 가장 주목받는 학생이 된다는 것.
사실 이 무렵이 되면 수상자들이 누구인지는 대강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숲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구경꾼만 수백 명이었다. 그들의 입을 타고 누가 어떤 마수를 사냥했는지 소문이 퍼져 나가기 때문이었다.
4학년의 무슨 선배가 고위 마수로 추정되는 곰 마수를 토벌했다더라, 3학년의 누구는 중급 마수만 수십 마리를 사냥했다더라.
아카데미는 온 대륙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굳이 마수의 마력 등급을 측정하지 않더라도, 재학생들의 눈썰미가 이미 어지간한 사냥꾼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뜬소문에 불과해야 할 수상자들의 정보는 꽤 신뢰도가 높았다. 고작해야 다소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설탕 냄새에 홀린 개미처럼 해질녘이 오면 시상식에 모여들었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때때로 믿을 수 없는 소문이 전해지면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의 무수한 인파는 그러한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어느덧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든 학생들은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상대 앞에는 아카데미의 유명 인사들이 벌써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야, 저기 봐. 황녀다, 1학년 마법학부 수석!”
“야, 야. 말조심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위대한 핏줄을 막 불러도 돼?”
“뭐 어때? 아카데미인데. 그리고 성녀님에, 무도회의 여왕까지…….”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시상식에 참가한 이들의 면면을 읊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라면 대부분 참가하는 행사였다.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거나, 실력이 뛰어나거나, 미려한 외모로 이름이 쟁쟁한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일개 관중으로 자리한 그들 중 몇몇은 내년이 되면 수렵제의 유력한 우승후보로 불리게 될 터였다.
한동안 떠들썩하던 공터는, 어느 노마법사가 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조용해졌다. 마치 전원이라도 내려간 듯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노인이었다. 허리까지 기른 수염이 인상 깊은 그의 이름은 ‘델레모어’, 아카데미에서 오랜 시간 후학을 양성한 교수이자 현 아카데미 총장이었다.
대륙에 몇 존재하지 않는 7서클 마법사인 그는 마스터(master)의 경지를 목전에 두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과연 그가 여생 동안 수많은 천재들을 좌절시킨 마스터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추앙받을 이유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오직 셋밖에 없는 마스터를 제외하면, 그를 압도할 수 있는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토록 무시무시한 실력자였지만 그의 노구에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로서의 신념에 따라 일부러 신체 노화를 방치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엔 비실비실하고, 인자한 인상의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양이었다.
그럼에도 몇 번 걸음을 내딛은 것만으로 수천 명을 침묵시킨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촌로처럼 생긴 마법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그마한 마을 하나쯤은 단숨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괴물이라는 것을.
공터에 임시로 마련된 시상대는 높았다. 그 앞에 서서, 델레모어 총장은 잠시 입을 다물고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공터에 가득 울려 퍼졌다.
“……존경하는 아카데미의 후학 여러분!”
쩌렁쩌렁 대기를 울리는 그 목소리는 압도적인 성량을 자랑했다. 특수한 마법이 적용된 결과였다. 분명 힘없이 떨리는 노인의 목소리에 불과했는데, 그 크기만큼은 수천 명의 귓전을 파고 들기에 충분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음을 직감한 덕이었다.
“우선 올해도 수렵제에 뜨거운 관심을 보여 주어서 고맙습니다. 올해 수렵제에는 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했고, 매년 그래왔듯 상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다소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델레모어 총장은 그 ‘불미스러운 일’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시상대 앞에 선 학생들은 그 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잠깐 동안 다물어졌던 학생들의 입이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대놓고 소란스럽지는 않았지만, 소곤거리는 소리가 귀가 거슬릴 정도는 됐다.
“들었어, 그 델핀 선배가…….”
“손도끼 공자가 구조했다며? 그런데 임시로 치료한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자상의 원인이 도끼 같은 무기로 찍힌 것 같다고.”
“으으, 무서워. 아무리 그래도 귀족인데 어떻게 그렇게 야만적이지?”
“흥, 하급귀족이라 그런 것 아니겠어? 델핀 선배도 분명 비겁하게 기습을 당했거나 했을 거야. 고귀한 유르디나의 핏줄이 고작 하급귀족에 당한다는 게 말이 돼?”
“그, 그런 것치고는 조원 넷 다 도끼 자국이 남아있었다던데… 아무리 기습을 당했어도 손도끼 공자가 네 사람을 한 번에 덮치지는 못했을 거 아니야.”
물론 그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었다. 다양한 의견들이 반영되어 몇몇 증언은 과장되거나, 또는 무시당할지도 몰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결국 소문은 자취를 감추겠지.
유르디나 가문이 이토록 수치스러운 소문을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그것도 가문의 후계자에 대한 낭설이었다. 진위와 무관하게, 오늘 일은 아는 사람들끼리나 떠드는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그러한 미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짧은 자유를 즐겼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입이 다물어진 것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델레모어 총장의 연설이 끝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올해 수렵제의 영광스러운 수상자들을 발표하겠습니다!”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다시 한 번 수천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시상대를 향했다. 그리고 델레모어 총장이 수상자를 하나하나 호명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3위와 2위를 차례로 호명하고, 그 다음으로는 특별상으로 가장 작은 마수를 사냥한 사람과 가장 많은 마수를 사냥한 사람에게 부상이 전해졌다.
귀빈석에 자리한 각국의 고위 인사들은 잠자코 시상대에 오르는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수상자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상을 전달하고, 부상을 발표하고, 수상 소감을 전하는 일련의 과정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그러는 동안 밤은 어느덧 꽤 깊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시상대 앞에 자리잡은 인파가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발표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 수렵제의 주인공이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델레모어 총장은 떨리는 손으로 외눈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진중해진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수십 년 동안 교직에 몸담아 왔지만, 저는 여전히 젊은이들을 지켜보는 일이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같은 청춘들은 늘 상상 이상의 변수를 창출해 내기 때문입니다.”
총장은 그러면서 검지를 살짝 까딱였다. 그러자 웅혼한 마력의 파동이 일어나더니, 곧 무대 뒤에 감춰져 있던 마수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둥실 떠오른 그 마수의 시체를 보고 몇몇 학생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 마수에 익숙하지 않는 1학년들이었다. 그만큼이나 위압적인 거체였다.
동물이라기보다 차라리 나무나 건물에 가까운 크기였다.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길이는 눈대중조차 불가능했고, 그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어지간한 성인 둘쯤을 합친 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손으로 눈을 가리는 몇몇 신입생들과 달리, 2학년 이상의 재학생들은 비교적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도 그들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생명이 떠나간 지 오래인 육체였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고위 마수, 그 이상이다. 어쩌면 이름을 받아야 할 수준일지도 몰랐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이를 깨달은 몇몇 사람들이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수상자는 나타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올해의 수렵제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저희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악이 숲속에 숨어 도사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점에 대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델레모어 총장은 그러면서 허리를 굽혀 사죄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널리 번져 나갔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담긴 소란이었다. 하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는 가능성에 대한 공포, 그리고 하나는 도대체 그 무시무시한 마수를 사냥한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
그 해답은 곧 드러났다. 델레모어 총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공터를 때렸다.
“그러나 어느 용기 있는 학생들의 목숨을 건 사투로, 그 악은 제거되었고 저는 이 자리에서 그들에게 깊고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지금부터 그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겠습니다.”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 압도적인 크기의 시체를 보고 나니 또 한 번의 의문에 머리를 잠식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을 사냥할 수 있는 학생이, 존재한단 말인가?
“우선 마법학부의 4학년, 엘시 라이넬라!”
우쭐한 얼굴을 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단숨에 무대 위로 튀어 올라왔다. 그녀는 커다란 고깔모자를 쓴 채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무척이나 뿌듯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환호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군중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검술학부의 2학년, 세리아 유르디나!”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차가운 낯빛의 여인이 무대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도도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사실 그것이 긴장할 대로 긴장했을 때 나오는 얼굴이라는 사실을 아는 관중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다른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천출이었다. 그녀가 델핀 유르디나가 이루지 못한 유르디나 가문의 과업을 이룬 셈이었다.
구경꾼 사이로 약간의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그 소란이 채 퍼져 나가기도 전에, 또 다음 호명.
“마찬가지로 검술학부의 2학년, 셀린 하스터!”
그동안 참고 있던 환호성을 쏟아붓기라도 하듯, 공터에 축하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검술학부의 2학년이었다. 그중에서도 하급 귀족 여자들의 환호가 높고 컸다. 셀린의 친구가 유독 많이 포진해 있는 곳이었다.
황갈빛 눈동자를 가진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멋쩍은 듯 볼을 살짝 긁적였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피하며 손을 한 번 흔들었을 따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뒤로 넘어갈 듯 그녀의 친구들은 소란을 피웠다.
물론 그 소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이름입니다.”
그 묵직한 선언에, 다시 관중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시상대를 주목했다.
다음으로 나올 이름이 올해 수렵제의 진정한 주인공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수렵제 우승의 영광은 조원들이 고루 나눠 가지지만, ‘조장’이라는 이름값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최근 아카데미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소문에 따르면, 저 무시무시한 괴물을 사냥한 것도 그의 공이 가장 크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를 반죽을 때까지 팼다.
그후에는 고위 마수를 포함한 10마리의 마수를 홀로 토벌했으며, 남부 열왕국의 악명 높은 테안 패거리를 손도끼 한 자루로 박살냈다.
그리고 4학년 검술학부 수석 델핀 유르디나의 방 안에서 칼부림을 벌였고, 오늘은 그녀를 완패시켰다는 이야기까지 도는 사내였다.
폭풍과 같은 한 달이었다. 고작해야 30일,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쌓아온 업적들은 그의 지난 아카데미 생활과 비교해도 더 묵직했다.
그가 서서히 무대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핏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금빛 눈동자.
아카데미의 제복은 핏물로 젖어 더러웠다.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왼팔로 볼 때, 그의 상태는 정상은 아니라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
임시로나마 고위 사제에게 치료를 받았을 텐데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처절한 싸움을 거쳐 왔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좌중은 더욱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피칠갑을 한 모습이야말로, 저 거대한 마수와 사투를 벌였다는 명백한 증거였으니까.
“……검술학부의 3학년, 조장 이안 페르쿠스!”
각국의 고위 인사들의 눈동자가 그를 깊이 응시했다. 침묵에 잠긴 관중들 사이에서 몇몇 시선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성국의 성녀’, ‘무도회의 여왕’, 마법학부의 1학년 수석자 ‘황녀’라 불리는 소녀까지.
쟁쟁한 명성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별과 같은 빛을 흩뿌리는 그녀들조차 오늘 밤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오늘 밤의 주인공은, 오직 하나.
지금 이 순간, 피투성이로 무대 위에 선 사내의 몫이었으므로.
그의 굳게 닫힌 입을 향해 수없이 많은 이목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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