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76화 (76/649)

〈 76화 〉 1. 첫 번째 편지(76)

* * *

“……검술학부의 3학년, 조장 이안 페르쿠스!”

델레모에 총장의 호명에, 각국의 고위 인사들의 눈동자가 이안을 깊이 응시했다. 침묵에 잠긴 관중들 사이에서도 몇몇 시선이 유독 눈에 띄었다.

‘성국의 성녀’, ‘무도회의 여왕’, 마법학부의 1학년 수석이자 ‘황녀’라 불리는 소녀까지.

모두의 이목이 이안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함성이 터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수상자라고 나타난 사내의 몸 상태가 상상 이상으로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힘겨운 전투였을 것이다. 무대 중앙에 웅장한 장식품으로 남은 마수의 시체와 비교하면 그랬다. 좌중이 함부로 환호성을 내지르지 못하는 것도 그 탓이었다.

사투를 넘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내에게, 탄성이나 환호는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 근성과 투지에 경외감을 표하는 편이 알맞아 보일 정도였다.

“조를 대표해서, 앞으로.”

그 말에, 사내는 조용히 델레모어 총장의 앞에 섰다. 총장은 그에게 고급스러운 상패와 자그마한 상자를 전달했다.

“우승 상품으로는, 제국 황가의 비전 영약인 ‘용의 정혈’이 4병!”

와, 하고 그제야 탄성이 군중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마력량을 단숨에 늘릴 수 있는 영약은 값비싼 물건에 속했다. 그중에서도 제국 황가의 비전 영약이라면, 그 가치가 얼마나 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제국 황실이 아카데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못해도 금화 수천 개에 거래될 영약을, 무려 4개나 선물한 것이다. 조원들이 하나씩 나눠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또, 자네에게 마수의 시체를 처분할 권리를 부여하겠네. 이안 군.”

악수를 나누면서, 델레모어 총장은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했다. 구경꾼들은 제 일도 아닌데 괜히 기대가 된다는 듯 이안의 입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야 저만한 크기의 마수였다. 도대체 얼마나 비싼 값에 팔릴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이름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이름이 붙을 걸세. 최소한 1만 골드 이상은 기대해도 좋네.”

델레모어 총장의 확언에 휘파람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1만 골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평민은 평생 동안 그만한 금액을 쥐는 일이 드물었고, 시골 작은 귀족이라면 영지의 1년치 예산안에서나 볼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마저도 최소였다. 그렇다면 제대로 값을 치기 시작하면 얼마나 더 비싸진단 말인가.

숫자는 알기 쉬워서 좋았다. 이안의 피에 젖은 몰골을 보고 긴장한 낯빛을 하고 있던 구경꾼들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해서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개중에는 이안의 친구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술 사라, 임마!’ 그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러한 구호를 반복했다.

이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침묵하다가, 슬쩍 시선을 조원들에게 돌렸다. 그러자 엘시가 가장 먼저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라이넬라 가문의 이 엘시가, 고작해야 금화 정도로 자존심을 굽힐 것 같아? 네 공이 가장 크니, 네 마음대로 해.”

그 다음으로는, 세리아.

“엘시 선배의 말씀대로예요. 선배님 마음대로 하세요.”

마지막으로, 셀린.

“그, 그래! 이안 오빠 마음대로 해! 설령 오빠 혼자 가진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내가 수렵제 우승이라니… 하스터 가문의 부흥에 더 가까워졌어, 에헤헤…….”

이안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듯 시선을 옆으로 치웠다가, 곧 결연한 눈빛으로 상패를 받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측면을 향했다. 관중들이 모여 있는 시상대의 앞.

구경꾼들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안의 입에서 갑작스레 외침이 터져 나왔다.

“……성녀님!”

그러자 군중들과 이안 사이에 하나의 길이 생겨났다.

인파가 갈라지며 자연스레 만든 길이었다. 그 끝에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성녀가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연분홍빛 동공, 그리고 배덕적인 몸의 굴곡까지.

그녀는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요?”

이안은 되돌아오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제 손가락으로 무대 중앙에 있는 마수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을 뿐이었다.

“이만한 제물이면, 엠마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상상도 못한 말이라서, 공터에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성녀도, 관중들도, 그리고 델레모어 총장과 조원들까지도 눈을 동그랗게 쓰고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자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탓이었고, 혹자는 그러한 발상 자체를 떠올려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었으며, 혹자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실행에 옮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얼마간 이안의 금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성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임마누엘.”

그 뜻은 ‘주께서 함께 하시길’, 다시 말해 엠마를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쏟아져 내려고 있었다. 무대의 마지막을 축하하듯이.

웅성거리는 소리, 환호와 박수, 델레모어 총장의 미소 지은 얼굴과 기뻐하는 동료들.

그 모든 물감들이 빛 속에 섞여들어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다.

수렵제의 종막이었다.

**

엠마의 치료는 곧바로 진행되었다. 성녀님께서 일부러 시간을 내준 덕이었다.

나도 치료가 필요하긴 했으나, 일부러 임시 치료만 받은 상태였다. 내가 알고 지내는 성직자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성녀님께 부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 될지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아침에 통보되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촌부 하나가 내 앞에서 몇 번이고 조아리고 있었다. 쿵, 쿵, 땅바닥을 박아대는 그의 머리에 피가 흐를 지경이었다.

“감사, 감사합니다… 크흡, 이, 이 쇤네가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 할지…….”

“이, 이러지 마세요.”

나는 당황해서 곧바로 그를 일으켜 세웠으나, 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엠마의 아버지를 보고 들뜨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살았구나, 엠마.

과연 이름을 받을 수준의 마수였다. 천신 아루스께서 엠마를 져버리지는 않았던지, 소생 가능성이 희박하던 그녀의 몸 상태는 단 하룻밤만에 회복되었다고 엠마의 아버지는 말했다.

그동안 속을 태운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질 만큼 멋진 결말이었다. 진작에 제물을 구할 것을 그랬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인으로! 하인으로라도 평생을 써주십시오… 어차피 제 삶의 희망은 딸년밖에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목숨으로라도 도련님께 은혜를 갚게 해주신다면……!”

“괜찮습니다, 아버님.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친구의 아버지를 하인으로 쓰겠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한참이나 설득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의 아버지는 내게서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못난 놈의 딸내미를, 흐윽… 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내 딸아, 흐어엉…….”

결국 나는 그를 설득하다 못해 달래기까지 해야 했다. 그러기를 한참, 나는 가까스로 그를 떼어낼 수 있었다. 얼른 엠마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내 몸은 겨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부담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내심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저만큼이나 딸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대로 엠마를 잃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엠마의 병실 앞에서, 나는 괜히 긴장이 되어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렇게 결심을 다지고, 병실 안으로.

창문에서는 따스한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 벽면이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그리고 정갈한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코끝을 스치는, 상쾌한 향기.

소녀는 그 풍경화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순백의 이불을 덮은 채로,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뽀얀 피부는 오랜 병실 생활 탓인지 다소 파리한 빛을 띠었고, 그럼에도 그 천부적인 미모를 가릴 수는 없는지 병약한 인상이 더욱 사내의 보호욕구를 자극했다.

은은한 붉은 빛의 머리카락은 햇빛에 비치면 얼핏 짙은 갈색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서히 나를 돌아보는 소녀의 눈동자는 초록색.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그리고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나 보여주었던, 따스하고 상냥한 미소.

“……안녕, 이안.”

그 미소를 보고,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목이 메어서, 혹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아서. 너무나 다행이라서, 그리고 미안해서.

사실은 네가 쓰러지고 나서 몇 번이고 후회했다고, 너에게 제대로 경고했어야 했다고.

멍청했던 나를 지금이라도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고, 짓씹고, 그러다 보니 그 모든 말들이 갈무리 되고, 결국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안녕, 엠마.”

언제나 나누었던 인사 그대로, 소녀와 소년이 재회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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