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77화 (77/649)

〈 77화 〉 1. 첫 번째 편지(77)

* * *

아카데미에 처음 입학한 날,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긴장한 탓이었다. 빗대자면, 미개척 지대에 발을 내딛는 모험가의 심정이었다.

지난 세월을 통틀어도 이토록 오랫동안 가문에서 떨어져 지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아인스턴 영지나 하스터 영지에 몇 달씩 놀러갔던 것이 내 외박 경험의 전부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리운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4년을 낯선 이곳에서 보내라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원해서 한 입학인 만큼, 소문이 자자한 아카데미에서 보낼 청춘이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근대던 가슴은 입학식이 열리는 대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죽여야 했다. 어디를 보더라도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었다. 지금까지는 레토와 함께 붙어 다녔기에 외로움이 덜했지만, 검술학부로 홀로 떨어져 나오니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틈에 내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고위 귀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벌써 이곳저곳을 누비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가문의 자녀들일 터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뿐인 나와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벌써부터 겁을 먹어서 어쩌자는 건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의지를 다지려던 순간.

“아, 아얏!”

어느 소녀가 내게 부딪혀 왔다. 인파가 몰리다 보니 이리저리 밀려 나가다 실수한 모양이었다. 내 눈이 슬쩍 그녀를 향했다.

순박한 눈망울이었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보고 느낀 감상은 그랬다. 심록의 푸르름을 닮은 연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나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죄, 죄송합니다! 도, 도련님. 부디 용서를…….”

그 말을 듣는 즉시 내 눈이 소녀와 마찬가지로 멍청해졌다.

무슨 소리일까, 잠깐 동안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던 내 눈에 울상을 지은 소녀의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원단이 좋지 않았다. 보급품을 쓴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아카데미 제복을 굳이 고급스러운 원단을 찾아 쓰곤 했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여동생의 등쌀에 못 밀려 값비싼 금액을 치르고 멋진 제복을 하나 맞춰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알 수 없는 반응을 종합하면, 답은 하나였다.

평민이구나.

지금 생각하면 실례가 아닐 수 없지만, 그때 나는 조금 신기하다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던 것 같다. 기숙사에 입사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이틀째, 나는 비로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실체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에서는 신분고하가 없다. 빈부격차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실력, 그것이 공정과 평등을 지향하는 아카데미가 유일하게 추종하는 가치였다.

마치 당장이라도 벌을 받을 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를 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느덧 긴장이 풀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소 호의를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이 아니야.”

“하, 하지만 그러면 무어라 불러드려야…….”

“이안.”

그러면서 나는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흠칫, 놀라 몸을 굳히던 그녀도 시간이 지나자 조심스레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수께끼라도 발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아카데미의 규칙이 사실은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확신을 심어주기로 했다.

“내 이름, 이안 페르쿠스야. 앞으로 잘 부탁해, 친구.”

소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멀뚱멀뚱 내 얼굴과 내밀어진 손을 번갈아보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에야.

“……네, 네.”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을 뿐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연금학부 출신이었고, 귀족들이 워낙 많아 겁을 잔뜩 집어먹다 보니 어쩌다 검술학부의 자리까지 밀려왔다고 들었다.

그녀의 이름은 엠마. 내가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사귄 평민 친구였다.

“무슨 생각해?”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과거를 헤매던 시간축이 다시 되돌아온다. 이곳은 병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있던 소녀는, 어느새 몇 년의 세월을 거쳐 보다 성숙해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은 소녀의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는 조금 무서워하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두려움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카데미 생활도 벌써 3년째였다. 절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나름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인지라 얼굴을 본 적은 꽤 많았다.

지금까지도 나를 무서워한다면 그것대로 상처가 될 만한 일이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입학식날?”

정곡을 찔린 내 눈동자가 움찔, 떨렸다. 조금 놀랐다는 눈으로 엠마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뜻모를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하여간 은근히 감이 좋은 여자였다. 남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그때는 영락없는 시골 소녀였는데 말이야.”

“그러는 너는 귀족 도련님이었잖아?”

“대신 그만큼 숙녀분께는 친절했지, 내가 너 연금학부 자리까지 데려다준 거 기억 안 나?”

쿡쿡, 엠마는 입을 가리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병색이 온전히 가신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웃는 모습만 보아도 나는 마음이 놓였다.

비로소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엠마도, 그녀의 아버지도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

그녀가 쓰러진 이후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내 탓인 것 같아서, 그때 말릴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으니까.

뒤늦게나마 그 어긋난 자리를 되돌려 놓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수만 골드의 재화를 벌 기회를 놓치긴 했으나, 친구의 목숨과 금화를 저울에 걸 만큼 나는 돈이 급하지 않았다.

엠마는 잠시 미소를 짓다가, 이내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흘깃 내게 시선을 던졌다.

과거를 더듬는 이들만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네. 그때 인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대단할 것도 없는 통찰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인연이란 게 다 그렇지 뭐, 어쩌다 마주쳐서 어떻게든 이어져 오고.”

“응 맞아. 하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거든, 귀족 도련님이랑 친구가 될 줄은.”

또 ‘귀족’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엠마는 늘 그랬다.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귀족’과 ‘평민’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고 있었다. 사실 이는 비단 엠마만이 아니라,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모든 평민들의 특징일지도 몰랐다.

계급의식이 옅은 귀족도 있는 반면에, 짙은 귀족도 있었다. 나야 전자에 속하니 편하게 대하면 그만이지만, 후자가 평민들을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엠마가 그러한 기색을 보여도 굳이 이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렇게 말하는 엠마가 무척 쓸쓸해 보여,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엠마, 말했잖아. 어차피 아카데미에서는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다고. 그러니 너와 내가 친구가 된…….”

“알고 있어.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친했나?”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친한 줄 알고 지내던 친구한테 들으면 일주일 동안은 악몽처럼 뇌리를 헤집을 만한 말.

그러나 엠마는 조금 다른 뜻이 있어 보였다. 그녀의 힘없는 시선이 나를 향했다.

“들었거든, 1만 골드가 넘는다며. 나를 살리려고 신께 공양한 마수 사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엠마의 반문 또한 진심이라 나는 다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엠마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평민이야! 1만 골드짜리 은혜 같은 거 갚을 수도 없어. 어디서 내 목숨을 판다 그래도 그 십분지일도 받지 못할걸? 그런데 너는 어떻게 망설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 멋대로 내린 결정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뭘 원해?”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엠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무얼 하면 될까? 페르쿠스 가문의 전속 연금술사로 살아가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내 몸이라도 원해?”

“엠마.”

내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흘러나왔다. 그러나 엠마는 불안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자그마치 1만 골드다. 평민은 평생 일해도 만질 수 없는 돈이었다. 심지어는 고위 귀족들조차 그만한 금액이 오고가는 거래에는 많은 신경을 기울인다.

단위가 달랐다. 무슨 짓을 해도 갚을 수 없는 돈, 그것이 엠마에게 이토록 부담이 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오직 엠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어쩌면 나도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내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엠마의 마음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마음을 알았더라도 내가 내릴 결론은 하나뿐이었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어,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엠마!”

결국 내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엠마는 흠칫, 몸을 떨며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엠마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살아.”

느닷없는 말이었다. 엠마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몇 번 깜박이더니, 멍한 반문이 돌아왔다.

“……뭐?”

“살라고, 평소처럼… 그리고 그래야 했던 것처럼.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고, 네 꿈대로 약초꾼들이 다치지 않는 물약을 만들고. 그렇게 돈을 벌고, 아버지를 모시면서, 살라고. 행복하게.”

속사포처럼 쏟아진 말이었다. 그래서 엠마는 얼떨떨하게 내 눈동자만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 눈을 들여다보면 내 진의를 알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아무리 바라보아도 어쩔 수 없을 터였다. 지금 나는 단 한 톨의 거짓조차 섞지 않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제야 내 진심을 알아준 것일까, 엠마의 떨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나는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유일한 소망이야. 그리고 네가 내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고.”

한참 동안이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마음만 전해진다면 그만이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조용히 착석했다. 침묵이 오래 가다 보니 괜히 멋쩍은 기분이었다. 내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살짝 시선을 돌린 찰나.

푸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진원지는, 당연히 엠마.

“푸흐, 아하, 아하하하하핫!”

“……왜 그래, 또.”

그러지 않아도 조금 부끄러웠던 나는, 그렇게 소심하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엠마는 소리 높여 웃다가, 이내 쿡쿡거리며 제 입가를 가렸다.

어떻게든 진정하려는 듯했다.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너, 너무 이안 같은 말이라서… 쿡쿡, 웃겼어. 바보, 멍청이, 호구. 그러다 나 같은 평민 계집애한테 이용만 당하는 거야.”

“아주 저주를 퍼부어라…….”

나는 그녀의 말에 삐친 듯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비로소 엠마의 기색이 편안해졌다. 마음의 짐을 모두 털어내기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다소 홀가분해졌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괜히 부채의식에 빠져 끙끙거리지 않을까 걱정이었으니까.

그러나 엠마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런데 이안, 여자한테 함부로 그러는 거 아니야.”

따스한 미소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웃음, 나는 엠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걸까, 평민들은 세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옅은 호선을 그리고 있는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고, 창밖의 햇살을 받아들이는 소녀의 머리카락은 유독 붉은 빛을 띠었다. 적갈빛의 머리카락.

수줍게 고백하듯이, 소녀는 말했다.

“그러면, 착각을 해버리거든.”

“……무슨 착각?”

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나 엠마에게서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그저 고개를 내저으면서.

“으응, 아니야. 어차피 이미 늦어버렸으니까.”

애절한 눈빛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마는 것이다.

“……큰일났네, 나.”

그 모습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감히 그 감상에 언어를 입혀 내뱉지는 못했다.

몇 년 전의 인연이, 또 다시 기묘한 매듭을 짓는 순간이었다.

**

병문안이 끝난 후, 나는 곧바로 치료실에 입원해야 했다.

처음에는 내일 찾아올 생각이었다. 오늘 밤에는 수렵제의 후야제가 있었고, 그곳에서 수렵제에 참가한 조는 각자 남쪽 숲 앞의 공터에 식탁을 배정받는다.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음식과 술이 공급되는 주연(??)이 밤새 이어진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심지어 나는 수렵제 우승자라서, 무려 식탁을 4개나 배정받을 수 있었다.

아는 친구들도 초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선 레토는 무조건 부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러한 내 계획은 곧 암초를 만나고 말았다. 바로 성녀님이었다.

“바로 찾아오셔야 합니다, 이안 형제님. 아셨죠?”

그렇게 말씀하는 성녀님이 워낙 무시무시한 눈빛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대로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싱긋 웃는데, 어째서인지 한기가 느껴졌을 뿐이지.

치료실에 입실한 나는 그렇게 성녀님의 눈치나 살피고 있었다. 내 팔에 잠긴 붕대를 속상한 표정으로 갈아주고 계시던 성녀님은, 이내 샐쭉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이안 형제님, 수렵제에는 참가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그,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다행스럽게도 내 핑계는 완벽했다. 가난한 친구의 치료비가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다니, 얼마나 천신께서 옳다 여기실 이야기란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성녀님께서도 할 말이 없으셨는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것이 조금 귀여워 나는 머릿속에 잘 새겨두기로 했다.

붕대를 감느라 성녀님의 여성스러운 굴곡이 스치듯 내 팔을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왼팔의 신경이 제대로 되살아나지 못했다는 점이 오늘만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내가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는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한 성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분도 여자셨죠?”

“네, 뭐…….”

그 질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나는 일단 그렇게 둘러대고 말았다.

그럼에도 성녀님에게서 엿보이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시지를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흐응,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수렵제에 참가한 조원들도 전부 다 여자고.”

“네, 뭐.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의도하고 모아놓더라도 여자들만 셋이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수렵제 조가 그렇게 짜이다니.

그것도 나로서는 나름 최선의 인선을 고민한 결과였다. 그것도 전부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인들로만.

이를 행운이라 해야 할지,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불행이라 해야 할지.

참 알 수 없는 우연이었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 감탄을 터트리던 그 찰나.

“……저보다, 그 여자들이 더 소중했나 보죠?”

그 은근히 싸늘해진 목소리에, 내 고개가 삐걱이며 돌아갔다.

그곳에는, 싱긋 미소를 지은 성녀님의 얼굴이 있었다. 자애로운 그 미소가 오늘따라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래서 저와 나눈 약속까지 어기고 수렵제에 나간 거잖아요. 그렇죠? 이안 형제님.”

단숨에 내 간담이 서늘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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