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78화 (78/649)

〈 78화 〉 1. 첫 번째 편지(78)

* * *

성녀님을 달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지난번처럼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하하 웃으며 성녀님을 바라보았는데, 아무리 웃는 낯으로 바라보아도 성녀님의 기분이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나도 표정을 굳혔다. 성녀님은 진심으로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하기야 납득할 만한 사유가 있더라도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쪽은 나였다. 성녀님이 화를 낼 당위성은 충분했다. 나는 쩔쩔 매면서도 최선을 다해 성녀님을 달래야만 했다.

내 정성이 통한 것일까, 싸늘한 미소로 일관하던 성녀님에게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것이 흥, 하고 새침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마저도 원판이 워낙 예쁘다 보니 그림이 됐다. 귀여워서 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맛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와 함께 존재감을 드러내는 젖가슴.

아니지, 아니야. 불순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성녀님을 위로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천신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먼저 네 곁의 아프고 힘든 이웃들을 도우라. 그들에게 한 일이 곧 내게 한 일이라.’라고.”

“그래도 한 마디 언질 정도는 줄 수 있었잖아요? 정말,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랬다면 나는 숲 앞의 공터에서 성녀님께 귀를 붙잡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이나 성녀님은 내가 수렵제에 참가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섣불리 반박을 했다간 상대의 속만 긁는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누군가를 달랠 때는 우선 공감을 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성녀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다는 듯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친구를 구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그리 무모한 짓을 벌이겠습니까?”

“네.”

그렇군요, 나는 단호한 성녀님의 대답에 입을 꾹 다물었다. 팔짱을 낀 채 그 연분홍빛 눈동자로 나를 흘겨보고 있던 그녀는, 곧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못 말린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이안 형제님인 거겠죠.”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나는 물끄러미 성녀님을 응시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잖아요?”

그 물음이, 내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렇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테고, 세리아는 평생 동안 델핀 선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엠마는 그대로 시름시름 앓다 죽었겠지.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싸움이었다. 팔을 꿰뚫리고, 피를 토하고, 내장은 진탕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성녀님의 그 말이, 마치 유일한 위안이라도 되는 듯해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나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테니까, 내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리고 가까스로 짜낸 한 마디.

“……네.”

그러면 되었다는 듯, 성녀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더듬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한 번 속상한 기색이 어렸다.

“마기가 깊이 파고 들었어요. 반영구적인 후유증이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나마 신성력으로 응급처치를 해서 다행이지, 골수까지 침범했으면 절단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겉모습은 멀쩡해졌는데, 아직도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왼팔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무뎌졌다. 감각뿐만 아니라, 왼팔의 모든 움직임이 그랬다.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반응속도가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다시 처음부터 검술을 훈련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만큼이나 팔 하나는 검사에게 소중했다. 이토록 미세한 후유증이 남아도 지금껏 쌓아온 검술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린다.

목숨 값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엠마와, 죽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학생들.

남모르는 희생을 했다며 혼자 폼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럴 만한 나이는 이미 지났다.

단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 일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기초부터 다시 검술을 쌓아올리는 편이 맞다고.

물론, 그 길은 지난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도 많았다.

내 고질적인 한계, 마력량을 해결해 줄 영약이 바로 그것이었다.

수렵제의 우승 상품으로 받은 ‘용의 정혈’은 황실의 비보였다. 그 효과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지금 내 마력량의 배 이상의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검술이야 지금껏 정진한 세월이 있으니 몇 년만 고생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선천적인 마력량을 늘릴 기회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즉, 길게 보면 오히려 내게는 실보다 득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절로 쓴맛이 감도는 입 안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녀님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각오했던 일입니다.”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성녀님은 미심쩍다는 눈으로 나를 흘겨보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고민하듯 살짝 시선을 피했다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이안 형제님.”

내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자, 성녀님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 비밀 하나만 만들까요?”

“……?”

느닷없이 무슨 비밀을 만든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그러한 의문을 품기도 전에, 성녀님은 품에서 자그마한 핏빛 구슬을 꺼냈다.

본 적이 있었다. 유렌이 성국에 공수해 왔던 ‘혈정’, 듣기로는 성 한 채 값이라고 들었는데.

성녀님은 망설임 없이 그 혈정을 기도하듯 모은 두 손 사이에 넣은 채로, 신성력을 일으켰다.

어어, 하는 사이 무시무시한 신성력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 은빛의 돌풍은 내 왼팔로 스며들더니,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지금껏 둔해져 있던 감각이 미쳐 날뛰는 듯했다. 나는 비명을 내지르려다가, ‘비밀’이라는 낱말을 떠올리고 그대로 이를 악물었다.

통증은 길지 않았다. 단 몇 초, 그것만으로 내 팔의 후유증은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내 눈이 멍하니 성녀님을 향했다. 성녀님은 연분홍빛 눈동자 하나를 찡긋, 감아 보일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벌컥 일으켜졌다. 내 입에서 토막난 말이 새어나왔다.

“그, 그, 그거 성 한 채 값이라고!”

“네, 맞아요.”

“성녀님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비밀’이겠죠?”

그렇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성녀님은 모았던 두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올린 혈정의 모습을 내게 확인시켜 주었다.

멀쩡했다. 아주 미세하게 작아져 있긴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한테 쓴다면 몰라, 가벼운 후유증 정도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나눠서 쓸 수 있어요. 물론, 원칙적으로는 성국에 허가를 받아야겠지만…….”

그러면서 성녀님은 은근한 시선으로 내게 어떠한 반응을 재촉했다. 나는 곧바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좋아요.”

만족했다는 듯, 성녀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마지막까지도 얼떨떨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라 물었다.

“성녀님,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대로 성녀님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 혈정을 쓰는 것은 성녀님께도 위험부담이 가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안 형제님… 형제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러면서 성녀님은 그 굴곡 있는 젖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선 네 곁의 약자들을 도우라. 그것이 곧 내게 한 일이라.’”

천신교의 경전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청히 서 있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인용한 구절이었다.

“선행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럼 부디, 천신께서 당신을 굽어보시길. 임마누엘.”

그녀의 인사를 성호로 맞받으며, 나는 치료실을 나섰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오후.

어쩌면 신께서 이곳을 굽어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고,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

수렵제가 끝난 후, 다음날 밤에 벌어지는 후야제에서는 광란의 술자리가 이어진다.

우선 ‘수렵제’라는 큰 고비를 넘은 회포를 풀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제 곧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활의 달이 지나면 수레바퀴의 달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슬슬 1학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기말고사 기간이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낙제는 곧 퇴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말고사 기간에는 모든 학생들이 기를 쓰고 공부와 수련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오늘이 아니면 더는 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술을 빼고 싶어도 내일부터는 먹고 싶어도 못 마신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젊은 청춘들의 속성이었다. 결국 네 발 짐승이 되어 구토와 함께 땅바닥을 구르게 될 운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새벽녘이 되면 아카데미 곳곳에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시체들이 범람할 것이 뻔했다. 매년 그래왔고, 올해도 그럴 것이며, 내년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아카데미의 진풍경이었다.

물론 나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술잔을 가득 채운 뒤 단번에 비웠다. 나뿐만 아니라 같은 자리에 앉은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

3학년은 이제 4학년에 나갈 실습 파견을 대비해서, 조금 더 난이도가 낮은 실습을 나가는 것으로 시험을 대체한다. 물론 그 전에 교양 강의 등의 이론 시험에 필수적으로 응시해야 하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점수는 그 ‘실습 시험’에 걸려 있었다.

그날이 가까워지면 다들 수련뿐만 아니라 몸 상태를 관리하는 데도 예민해진다. 술을 마실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 그 욕망을 모조리 털어버리는 편이 옳았다.

셀린은 나와 레토가 앉은 테이블에 잠시 얼굴을 비치더니, 이내 제 친구들을 모아둔 테이블에 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수렵제에서 우승을 했다는 것은 아카데미 최고의 실력자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셀린의 몸값도 폭등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하스터 가문의 부흥을 염원하는 그녀로서는 이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그러고 보니, 그 델핀 선배는 어떻게 됐대?”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받은 레토는 황당하다는 얼굴이 됐으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오늘 종일 엠마의 병문안이니, 치료니 하며 바빴으니까. 소문을 수집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에 반해 레토는 한가하지 않은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대답했다.

“잠적했다던데? 그 이후로 소식이 없대.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고.”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내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부디 너무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네. 살다 보면 지기도 하는 거지, 뭐.”

“……네가 할 말이냐?”

그렇게 레토를 비롯한 친구들과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취객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엘시 선배였다. 그녀는 제 패거리들을 이끌고 왔는데, 어딘가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지난번에 엘시 선배와 함께 내게 박살이 났던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쭈뼛거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일까, 하고 엘시 선배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내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키 차이가 있어 내가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동무를 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엘시 선배의 앙증맞은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핫! 다들 인사해, 내 새 동생이야! 이름은 이안 페르쿠스라고, 많이 들어봤지?”

엘시 선배는 벌써 꽤 취했는지, 그렇게 말하는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그러는 엘시 선배의 패거리는 아직 취기가 덜 오른 탓인지 어색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절로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엘시 선배한테 조용히 속삭였다.

“저, 엘시 선배? 아무래도 선배님들께서 불편해 하시는 것 같은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너도 내 동생인데, 한 가족처럼 지내야지! 야, 테마르. 너 여기 와 봐! 우리가 좀, 응? 좆같은 과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모두 용서하고 지내야지!”

그러나 술에 취한 엘시 선배는 한층 더 독선적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패거리를 윽박 지르기까지 했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쯤 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푸하하핫! 그때 그 델핀 년의 얼굴을 너희가 봤어야 하는데! 나를 보고 얼마나 두려웠던지… 히이이익?! 사, 살려주세요!”

손도끼를 슬쩍 보여주자마자 엘시 선배는 자존심이고 뭐고 내팽겨친 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커다란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려 들었는데, 그러면 마치 제 시야가 가려지니 덜 무서우리라 판단한 듯했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엘시 선배, 말 잘 들어야죠.”

“네, 넷… 에, 엘시 말 잘 들을게요. 오, 오줌싸개든 뭐든 할 테니까아……!”

그러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나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곧바로 엘시 선배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엘시 선배의 패거리는 더욱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폭주하는 엘시 선배를 막을 방법은 이것만이 유일했다.

“자, 그럼 얼른 가서 친구분들이랑 남은 시간 재밌게 보내세요.”

이제 슬슬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나는 그렇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엘시 선배는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의아한 시선을 그녀에게 향하자, 엘시 선배는 얼굴을 붉히면서 괜히 발로 땅바닥을 긁었다.

“……조, 조금만 더 쓰다듬어 주면 안 돼?”

그 말을 듣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시 선배의 패거리는 더욱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이었고, 레토는 마치 쓰레기를 보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네가 이렇게 하라며.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후야제의 가장 중요한 손님은 마지막에 찾아왔다.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내 눈이 슬쩍 뒤를 향했다.

달빛을 유순히 받아들이는 그 회색 머리카락, 그리고 맑고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짙푸른 눈동자.

“……그, 이안 선배.”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게 제안했다.

“다, 단 둘히! 으으… 단 둘이, 어디 가지 않을래요?”

이제 달마저 기울기 시작한 야심한 밤, 단 둘이서 밀회를 가지자고.

그렇게 말하는 세리아는, 볼을 붉힌 채 제대로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묘한 분위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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