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1. 첫 번째 편지(79)
* * *
달빛이 커튼처럼 쏟아져 내리는 공터, 심야의 정적을 딛고 두 남녀가 섰다.
이안과 세리아였다. 사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세리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뒷짐을 진 손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여인이 긴장할 때마다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느덧 세리아의 부족한 사회성에 적응해 버린 이안은, 그녀가 긴장을 풀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인내는 귀족의 미덕이었으니까.
느긋한 마음으로 사내가 말을 기다리기를 한참, 소녀는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시린 달빛을 받은 그녀의 회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살짝 볼을 붉히고 있던 그녀의 고개가 곧장 숙여졌다. 귀족이 귀족을 대할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명백히 상급자를 대하는 예우.
깊이 굽혀진 허리는 직각에 가까웠다. 사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공터에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 감샤… 으으, 감사했습니다. 이안 선배님!”
고작해야 감사인사를 전하려고 그토록 긴장했단 말인가.
사내는 헛웃음을 지으려다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의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하기야, 이처럼 평범한 일에도 덜덜 떠는 것이 세리아답긴 했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제는 귀여워 보였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유르디나의 싸가지’라는 별명은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덧 감정표현도 꽤 풍부해진 그녀였다.
고작해야 한 달이었지만 세리아와 수많은 일을 겪었다. 웃긴 일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얼굴만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어느새 이토록 가까운 사이가 되다니.
이안은 묘한 인연을 느꼈다. 그래, 이것도 편지가 오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나도 고마웠어, 세리아.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고개 숙이지 않아도 돼.”
“하, 하지만…….”
하지만 세리아는 머뭇거리고 있을 뿐, 굽힌 허리를 펴지 못했다. 이상한 데 고집을 부리는 점까지 참 그녀다운 대응이었다.
이를 모를 리가 없는 이안은, 단 한 마디로 그녀를 제압했다.
“그럼 나도 고개 숙일까? 우리 둘 다 서로한테 사의를 표하고 싶은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닷! 다, 당장 설게요!”
세리아는 튕겨 오르듯 펄쩍 뛰며 곧바로 고개를 들어 자세를 바로 했다. 누가 보면 무서운 선배가 불쌍한 후배의 기강을 잡는 듯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한 두 남녀가 인식하기로는 그랬다. 그래서 사내는 더욱 느긋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고 있는 세리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속은 조금 편해졌어?”
담백한 질문이었다. 사내의 질문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있었기에, 세리아는 곧바로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아래로 향했다. 하염없이 땅바닥을 바라본 지 한참, 세리아의 입에서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모르겠어요.”
그렇겠지, 아직 젊고 어리다지만 일평생 동안 가지고 있던 그림자였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런다고 마음에 드리운 어둠이 온전히 가시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리 허리춤에 매달아 둔 수통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듯해서, 그는 물을 들이키며 갈증을 달랬다.
단 둘이 되어서야, 세리아는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얼떨떨했거든요. 내가 진짜로 언니를 이긴 걸까? 사실은, 제 승리가 아니라 이안 선배의 승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한 일은 얼마 없으니까…….”
“네가 없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거야.”
이안의 언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단단한 확신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세리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달빛이 안개처럼 퍼진 숲에서,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사내.
수통의 물을 벌컥이며 들이키는 모습조차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세리아에게 ‘이안 선배’라는 존재는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존경의 감정은 동경으로, 그리고 그 감정은 또 다시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하나씩 걸음을 옮겨가며 그녀의 감정에 형형색색의 색을 입혔다. 세리아는 그것이 때때로 신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색무취의 삶이었다. 색맹처럼 그녀의 세상은 흑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인간이 무의미하고, 심지어 그녀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던 그 나날.
세리아는 스스로에게 감정이 없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존재하긴 하겠지만, 턱없이 희미해서 남들과 같이 웃고 떠들 수는 없었다.
남부 열왕국의 밀림에 사는 리자드맨, 독에 중독되면 팔이든 다리든 망설임 없이 잘라내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세리아에게 어울렸다.
감정도, 즐거움도, 전부 다 잘라내고 오직 검에만 매진했던 인생.
그 삶에 느닷없이 빛이 드리웠다. 어쩌면 이복 언니를 이긴 일보다도, 그것이 더욱 얼떨떨해서 세리아는 실감이 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안 선배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잖아요.”
“네가 없었으면 못했어. 마수를 잡아주고, 델핀 선배의 뒤를 기습해 줘서 가능했던 거지.”
제 활약을 뽐낼 법도 한데도,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어조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세리아는 가슴이 조금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 판단은 믿을 수 없어도, 이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그만큼 세리아는 이안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소녀의 질문이 던져졌다.
“……그러면 이제,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될까요.”
무슨 악몽인지, 사내는 굳이 묻지 않았다. 세리아가 시달릴 만한 악몽이라면 오직 하나뿐.
어머니가 쫓겨나던 날의 기억이었다. 세리아는 그날 이후 미친 듯이 검에 매진하며 살아왔다. 가문에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서, 늘 두려워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델핀 선배에게 꺾이며 살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가슴 속에 심어진 악몽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뿌리로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서녀라는, 그녀의 명확한 한계가 빛과 어둠처럼 대비되어 강조되었으니까. 델핀 유르디나는 승자이자 적통이었으나 세리아는 아니었다.
패배자이자 천출, 그것이 세리아 유르디나의 삶을 수식하던 낱말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제 델핀 유르디나에게서 승리를 가져왔다. 후계자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는 이겼다.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는 유르디나 가문이었다. 함부로 세리아를 무시하거나 쫓아낸다는 소리를 꺼낼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어머니와 달리, 세리아는 스스로 약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러니 남는다.
그 논리 구조에 중대한 오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안은 당장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침묵하고,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입에서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니, 힘들겠지. 그런다고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잖아.”
직설적인 말이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하다고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아가 보이는 반응은 잔잔할 따름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픈 미소를 머금은 소녀는 달빛을 받아 더욱 처량했다.
그날의 악몽은 이기고 지는 것 이상의 문제였다.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그녀의 상처가 말끔히 나을 리가 없었다. 단지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뿐.
다소 우울해질 뻔했지만, 세리아는 퍼뜩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 선배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수백 번 감사를 전해도 모자랐다.
괜히 울적한 분위기를 연출해 봐야 단 둘만의 자리를 만든 의미가 없었다. 조금 더 감사를 전하고, 그리고 또.
무엇을 해야 할까, 세리아의 사고가 돌부리에 걸린 듯 턱하고 막혔다.
그러고 보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지 않나? 심야의 공터, 취기가 오른 남녀가 단 둘이 모여 있다. 용건은, 할 말이 있어서.
아무리 인간관계에 무지한 세리아라도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고백이었다. 그리고 이안을 불러낸 쪽은 세리아였으므로, 용건이 있는 것 또한 그녀일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의 눈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괜히 손끝이 화끈해지고, 그녀는 꼼지락거리며 손가락을 더듬거렸다.
그, 그렇지만 나는 이안 선배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감정은 ‘우정’이 아닌가. ‘사랑’은 조금 더 특별한 감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사람만 보면 가슴이 뛰고, 홀린 듯 그 눈동자에 매료되고, 물 먹은 솜처럼 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오른다고.
물론 이안 선배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멋있고, 믿음직스럽고, 굳이 따지자면 이상적인 배우자에 가깝긴 했지만.
어떻게 감히 그녀 따위가 이안의 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망상으로 헝클어지기 시작한 세리아의 사고회로는 단시간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다. 어느덧 사내가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그, 세리아.”
훅, 하고 사내의 존재감이 열풍처럼 다가왔다. 세리아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소 멋쩍은 표정이었다. 시선을 살짝 피한 채, 사내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괜히 수치심을 달래 보려는 듯했다.
세리아는 생각했다. 위험했다고, 심장이 멈출 뻔했다. 그 까닭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눈동자는, 서서히 사내의 내밀어진 손을 향했다.
목걸이였다. 자그마한 팬던트, 은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겉면에는 꽃 한 송이가 양각되어 있었다.
여섯 장의 꽃잎, 은이라 그 색감을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만약 칠한다면 하늘색이겠지.
‘세피아 꽃’이었다. 얼떨떨한 눈동자가 다시금 사내를 향했다.
사내는 남은 손으로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 볼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오로지 취기 탓만은 아닐 터였다.
“선물이야. 지난번에, 어머니가 좋아하셨다고 했지?”
멍하니, 소녀는 제 앞에 내밀어진 팬던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금속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세리아는 하염없이 팬던트에 양각된 꽃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 선배에게도 말한 적이 있었다. 이 꽃만 보면 유독 마음이 편해진다고.
그래서 준비한 걸까. 세리아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입술만이 달싹이며 공허한 울림을 만들 뿐이었다.
“꽃은 꺾으면 시들어 버리지만, 팬던트는 계속 남잖아. 그러니까, 그… 앞으로는 악몽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꼬옥, 하고 세리아는 팬던트를 소중히 손에 쥐었다. 머리가 새하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불쑥,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감정이 들불처럼 일어나 증기처럼 솟구쳤다. 한참이나 팬던트를 내려다보던 세리아의 고개가, 다시 한 번 벌컥 들려진 그 찰나.
세리아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안은 흘깃흘깃 세리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평소대로의 이안이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세리아는 달랐다.
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더욱 격렬히.
단지 그와 얼굴을 마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홀린 듯 금빛 눈동자에 매료되며, 물 먹은 솜처럼 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오르는 이 감각.
이것도 ‘우정’인가? 조명이라고는 달빛밖에 없는데, 왜 세상은 몽환적으로 변하고 그녀의 가슴은 총천연색으로 물드는가.
그 해답을 도무지 도출할 수 없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음에 들어? 그러면 좋겠는데.”
좋아하냐고?
그 물음을 받고 나서야 세리아는 깨달았다. 무심코 속으로 탄성이 터져 나온 덕이었다.
아, 무척이나.
그래, 당신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래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도무지 멈출 길이 없었다.목이 메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네, 너무나.”
그제야 세리아는 깨달았다. 가슴을 간질이는 이 연분홍색 감정의 이름을.
'세피아 꽃'의 꽃말은, ‘첫사랑’이었다.
*
레토는 머리를 긁적이며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늘의 주인공인 이안이 돌아오지 않으니,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술에 취해서 어디 뻗어있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웃긴 일이었다. 수렵제의 우승자가 술을 이겨내지 못해 숲에 널브러지다니.
귀찮음을 억지로 이겨내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느 공터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
셀린이었다. 레토는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야, 셀린. 너 뭐하…….”
그러나 셀린은 아무런 말도 돌려주지 않았다. 단지 입술을 짓씹더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툭, 하고 레토의 어깨를 치고도 아무런 사과의 말이 없었다. 레토는 허,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왜 이래, 혹시 그날인가?
그러면서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뒤에서 짜증스럽게 내질러지는 셀린의 경고를 들어야 했다.
“……그쪽 공터는 가지 마, 이 눈치 없는 새끼야!”
무슨 소리람. 레토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공터 안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소중히 꼭 쥔 채로 울고 있는 소녀와, 당황해서 그녀를 달래고 있는 이안의 모습.
레토는 그제야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야 셀린의 반응이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이래서야, 술을 마시자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씁쓸한 마음에 혀를 몇 번 차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셀린이 너무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장대한 갈등의 서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레토는 그렇게 휘적이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달빛이 아름답던 날의 일이었다.
**
후야제를 마친 밤, 나는 간만에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수렵제에서 우승했고, 그 과정에 인명피해는 전무했으며, 결과적으로 엠마도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편안한 기분이었다. 처음에 편지가 왔을 때는 어쩔까 싶었지만,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다만 아직도 ‘세피아’라는 예명이 마음에 걸렸다. 미래에서 온 편지의 내용을 돌이켜 보면, 그 조건이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세리아였다.
혹시 먼 미래에는 나와 세리아가 연인이 되는 걸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력도 출중하고, 미모도 훌륭하고, 가문의 위세도 대단한 그녀와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내가 연인이 된다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여러 잡념들을 떨쳐내며 의식이 암전하고, 다시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꼈다.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더듬거리며 침대 머리맡 근처에 위치한 탁자를 짚었다. 그리고 수통을 들어, 수분을 식도에 퍼붓는다.
그러고 나서야 정신이 맑아졌다. 아직 시간은 새벽녘, 수련을 나갈 시간이었지만 전날 과음을 했으니 좀 더 잠을 자는 편이 맞았다.
그렇게 다시 몸을 눕히려던 내 눈에, 얼핏 본 적이 있는 광경이 틀어박혔다.
달력이 넘어가 있었다.
활의 달에서, 수레바퀴의 달로. 나는 아직 달력을 넘기지 않았을 텐데.
단숨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었다. 내 눈이 곧바로 탁자 위를 훑었다. 그러자마자 눈에 띄는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가 하나.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이를 바라보던 나는, 곧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봉투를 쥐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편지였다. 그것도 내게 온, 7년 뒤의 편지.
“……이런 시발.”
아무래도 미래의 내 약혼자께서는,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는 듯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