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
* * *
이제는 낯익은 꿈이었다. 어느 사내의 기억.
천막 위로 군단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였다. 평야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였다. 지치고 다친 병사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일말의 희망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눈동자.
마치 건어물 같았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조롱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저기 봐 까마귀들이 왔는데?”
“도주의 달인들이라지?”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사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갑옷 위에 걸친 새까만 망토를 여미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사내를 제지하는 병사는 없었다. 붉은 색의 군막, 지휘관이 머무르고 있을 천막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랬다.
그 안에는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자세한 생김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피로에 젖은 그 눈동자만이 뇌리에 틀어박혔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경.”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내는 절도 있는 자세로 고개를 숙였으나, 쌓인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여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단지 흘깃 그의 존재만을 확인했을 뿐.
탁, 하고 서류가 탁자 위에 떨어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제야 여인은 지친 눈동자를 사내에게로 옮겼다.
사내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도에서 동부전선의 상황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상황이라?”
그녀는 흐, 하고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여인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천막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천막 너머, 전장을 보여주었다.
피로 물든 땅, 파먹힌 시체들, 까마귀들이 울부짖으며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 저 너머, 육편으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있었다.
무심히 그 풍경을 응시하고 있던 여인은, 사내에게 말했다.
“늘 비슷해요. 병사는 부족하고, 유능한 기사는 없고, 적들은 나날이 늘어나면서, 한계에 봉착한 지 오래죠. 하다못해 보급품이라도 제때 주던가.”
“……제도에 돌아가면 건의해 보겠습니다.”
사내의 말에도 여인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표정.
그후에는 한참 동안이나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심히 전장을 응시하던 여인의 눈동자는, 어느새 암울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발, 부탁해요. 이제는 버틸 수가 없어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서부전선과 북부전선의 상황도…….”
사내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그 전에, 여인이 손가락으로 전장 너머를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살점으로 만들어진 나무.
누가 보아도 자연에 속한 존재는 아니었다. 지금껏 어떠한 감정의 편린도 내보이지 않던 사내의 눈동자에, 비로소 흐릿한 두려움이 깃들었다.
“……델피렘이, 오고 있어요.”
파르르 떨리는, 공포와 증오로 점철된 목소리.
나를 응시하던 여인의 그 눈동자가 마지막이었다.
헐떡이면서,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또 다시 그 알 수 없는 꿈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현실감, 그리고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베개.
깨질 듯한 두통과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괴로웠다. 나는 항상 머리맡에 두고 자는 수통에 담긴 물을 벌컥이며 들이키다가, 이내 위화감을 눈치 채고 말았다.
넘어간 달력과 탁상 위에 놓인 정체불명의 편지.
“……이런 시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미 전례가 있던 일이었다. 내 손이 재빨리 편지 봉투를 뜯었다.
내 눈이 문장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To. 사랑하는, 나의 이안 페르쿠스에게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요즘은 유독 그 감정에 대한 고민이 깊어요.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 생이별을 한 지 몇 달이 지나서인지 알 수 없네요.
돌이켜 보면 사랑이란 하나의 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트기 전까지는 도무지 눈치를 챌 수가 없죠. 그러다 어느덧 그 크기를 키워가더니, 이제는 제 가슴에 그늘을 가득 드리우고 있네요.
물론 당신에 대한 이야기예요. 순진한 저를 꼬시더니,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열이 뻗칩니다. 솔직히 고백하세요. 일부러였죠?
그해의 실습 파견을 굳이 고아원으로 정한 것도 그래요. 주위의 마물을 정찰하고 소탕하는 의뢰라면 곳곳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중에는 페르쿠스 영지에 위치한 마을도 있었고요.
귀족이라면 마땅히 가문의 봉토를 지키기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당신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죠. 그렇다면 당신이 굳이 그해의 실습 파견을 고아원으로 정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저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남자가 오래 전부터 내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구나!’
그래서 연애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제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논 거죠.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 못된 바람둥이에게 천신의 심판이 있기를.
그리고 또축복이 있기를.
만약 당신이 제게 미리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면, 그마저도 감사해요. 사랑이란 이토록 무서운 감정입니다. 당신의 여인이 되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모든 과거가 축복이며 인연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당신에게 반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이안. 제게행복이란 감정을 알려주어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의도가 불순하더라도 그날 당신이 보여주었던 영웅적인 분투를 폄하할 수는 없겠죠.
성적에 딱히 도움이 되지도, 누구도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지만 당신은 약자들을 위해 검을 들었고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그들을 지켜냈습니다.
그때 알았어요. 얼핏 보기엔 무시무시하고 숨기는 것도 많은 사람이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고.
그날부터였어요. 당신에게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그 전까지는 위협을 느낄 뿐이었는데, 무심코 당신에게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저를 협박하지 않았다면, 습격을 물리치고 둥지까지 파괴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순진한 소녀였던 제 마음을 가지고 놀았음에, 사랑의 열병으로 한참이나 끙끙 앓았음에, 그리고 결국 당신의 곁에 설 수 있었음에.
모든 것이 주의 은총입니다. 임마누엘.
당신이 보고 싶어요, 이안. 언제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추신 1: 제국의 싸가지가 최근 대륙 서단에 있는 아란코트로 발령을 받았다죠? 꼴좋네요.
추신 2: 제도에 있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천신께서는 모든 세상을 굽어 살피고 계십니다. 바람을 피운다면 마땅한 벌이 내릴지니.
From. 먼 곳에 있는 사랑을 떠올리며, 루시아로부터.
제국력 571년 수레바퀴의 달 두 번째 날에.
여전히 수수께기 같은 말로 가득 찬 편지였다. 나는 잠시 이마를 짚은 채로, 여러 가지 내용을 갈무리했다.
지난 편지는 ‘수렵제’더니, 이제는 ‘실습 파견’이었다. 시기로 볼 때 곧 시작되는 기말고사 대체 실습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곳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고? 도대체 왜?
‘습격’이라는 표현은 보기만 해도 흉흉했다. 지난 수렵제 때도 그랬지만, 목숨을 건 전투를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왜 천신께서는 내게 이러한 시련을 내리신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신전에 가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 전에 줄글을 훑어내리던 내 눈이 덜컥 멈추었다.
보내는 사람이 쓰여져 있는 곳이었다. 미래에서 편지를 보낸 이의 이름은, ‘루시아’.
'세피아'가 아니었다.
나는 허탈해서 헛웃음을 터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잖아, 완전……."
아무래도 미래의 나는, 약혼자를 여럿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증발해 버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일단 편지를 품에 넣으려던 나는, 편지지 뒷면에 적힌 글씨를 보게 되었다.
'순명(??)'
휘갈겨 써진, 홀로 필체가 다른 두 글자.
나는 말없이 그 글씨를 응시하고 있다가, 편지지를 품에 넣었다.
이상하게도 그 낱말이 유독 깊이 내 뇌리에 새겨졌다.
**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지만, 내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선 강의를 나가야 했다. 수련도 해야 했고, 영약도 먹어야 했다.
‘용의 정혈’은 영약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섣불리 먹었다가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데렉 교수님 같이 믿을 만한 고수의 지도 하에 복용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용의 정혈’을 챙기려던 내 손길은, 곧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용의 정혈’이 담긴 상자가 비어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자 폭포수처럼 혈도로 쏟아져 내리는 마력의 흐름.
화들짝 놀란 나는 곧바로 날뛰는 마력을 진정시켜야 했다. 몸에 깃든 마력의 양이 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용의 정혈’을 이미 섭취했다는 뜻이었다. 내게는 그러한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데.
“돌겠네…….”
두려웠다. 또 다시 기억을 잃은 것이다. 그 사이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을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지난번에는 세리아를 반죽을 때까지 팼다. 그후 어떻게든 수습을 하긴 했지만, 아직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이가 박박 갈렸다.
결과적으로 잘 풀리긴 했으나, 그 과정이 무척 험난했다. 안정지향적인 내 성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한 달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설마 또 감당 못할 짓을 저질렀을까 싶기도 했다.
내 실력은 한 달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성장했다. 세리아나 엘시 선배 같은 든든한 동료도 있었고, 데렉 교수님처럼 무슨 일이든 믿고 상담할 만한 스승도 생겼다.
어지간하면 내가 곤란할 일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슬금슬금 고개를 치켜드는 불안감을 억지로 누그러트렸다.
다행스럽게도 밖을 나서자마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지는 않았다.
속닥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려오긴 했지만, 그야 나에 대한 여러 소문이 이미 널리 퍼졌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기야 또 사고를 쳤으면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를 가장한 원수지.
그러한 안일한 생각을 하며 걷고 있던 그 찰나.
훅, 하고 무언가가 내 팔을 당겼다. 인접한 건물과 건물 사이,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그 완력이 상상 이상이라 나는 저항할 틈도 없었다. 그리고 쿵, 하고 바로 벽면까지 밀쳐지는 내 몸.
어안이 벙벙해진 내 눈이 범인의 모습을 훑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은을 녹여 실로 짠듯한 은빛 머리카락, 뭇 사내의 심장을 간질거리게 하는 연분홍빛 색채의 눈동자.
그리고 불온한 생각을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배덕적인 몸이 연이어 내 시각을 강타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녀님이, 어째서?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적의와 증오가 흘러넘치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무슨 속셈이야?"
무슨 소리냐고, 그렇게 묻기도 전에.
성녀님은 내 멱살을 쥐며 외쳤다. 원한과 분노로 달구어진 목소리.
"무슨 속셈이냐고 묻잖아!"
그것은, 차라리 원수를 대하는 모습에 가까워서.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