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81화 (81/649)

〈 81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

* * *

아카데미는 평등을 지향한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실력만 있다면 우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낙제를 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위 귀족이더라도 아카데미가 들이미는 잣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는 창립 이후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한 고위 귀족의 수가 증명하고 있었다.

못해도 수백 명, 바깥에는 기세가 등등한 제국의 5대 귀족조차도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순간 일개 학생에 불과했다. 오히려 명문가일수록 자녀가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길 뿐, 아카데미에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이나 아카데미는 신뢰를 받는 교육기관이었다. 평가기준이 엄격하다는 점에서만큼은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재학생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진정으로 ‘평등’하냐고 묻는다면, 몇몇 재학생들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제 아무리 아카데미라도 권력을 눈치를 아예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제국 5대 귀족의 자제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황족이나 각국의 최고위 인사가 입학하면 아카데미 또한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특혜를 베풀어야 했다. 혹여나 그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핑계거리를 만들어 놓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 올해 입학한 마법학부의 1학년, 황녀가 그랬다. 황위 계승서열은 한참이나 밀린다지만, 그럼에도 용의 피를 이은 소녀였다. 아카데미는 그녀를 위해 별관까지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

따스한 햇빛이 은빛 머리카락에 반사되며 흘러내렸다. 맑고 뽀얀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독 존재감을 발하는 연분홍빛 색채의 눈동자.

신학부를 상징하는 사제복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색정적인 여체의 굴곡을 모두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육체에는 신성과 죄성이 공존했다.

성녀였다. 천신 아루스의 총애를 받는 처녀이자, 당대 오직 한 명의 여인에게만 승계되는 영광스러운 칭호.

물론 대략 30년을 기준으로 새로운 성녀가 등장하긴 하지만, 최소한 그 이전까지는 ‘성녀’라는 이름이 천신교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천신 아루스의 존재를 증명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천신은 제 살점으로 인간을 빚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문명과 신앙을 가르치는데, 그 첫 번째 제자가 대대로 수제자의 칭호를 계승시켜 온 것이 ‘교황’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법률에 따른 전통에 불과했다.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성국의 추기경들이었다.

반면 성녀는 유독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소녀로, 인간이 임의로 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성녀에게는 천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상징성이 있었고, 성국 또한 그 존재를 무척 소중히 여겼다.

대우를 따지자면 대주교 이상 추기경 미만이었다. 성국의 최고위직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므로, 당연히 아카데미 또한 그녀에게 특혜를 베푸는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장소였다. 신전에 딸린 자그마한 건물, 일명 ‘태양의 쉼터’.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화려한 장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갈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성녀를 비롯해 그녀를 호위하는 성국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이곳에 머무르곤 했다.

그러나 금번의 성녀는 특별취급을 유독 싫어해 호위 인력도, 사용인도 최소한으로만 갖춰 두었다고 들었다. 그마저도 주로 야밤에 경비를 설 뿐이지, 낮에는 그녀가 신용하는 호위기사인 유렌만이 호위를 선다고.

과연 그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태양의 쉼터에 들어서서, 2층에 있는 응접실에 올 때까지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말하자면 독대였다. 성녀님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과 단 둘이 마주할 수 있다니, 그것도 치료실이 아닌 곳에서.

행운이었다.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지금 성녀님이 보이는 태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 나지막한 물음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검지가 제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감아냈다.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자애롭고 상냥하다’라는 평가와는 거리가 먼 광경이었다. 나는 그래서 더욱 얼떨떨한 기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그 성녀님이 맞나, 이 여자가?

따스하던 눈동자는 이미 날카롭게 나를 훑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쾅, 하고 성녀의 손바닥이 탁자를 강타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킨 성녀는 상반신을 굽히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다음, 으르렁거리며 외쳐지는 고함 소리.

“그게 말이 돼?! 당신, 진짜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는데…….”

그러지 않아도 위축되어 있던 나는, 성녀님의 분노를 보자마자 곧바로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경건하게 선언했다.

“천신께 맹세코 진심입니다.”

“주를 망령되게 이르면 천벌 받습니다, 이안 형제님?”

“하지만 사실인데요.”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성녀님은, 내 억울한 표정을 마주하고도 믿어주는 기색이 없었다.

하아, 하고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 뿐.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그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죠? 잘 알겠습니다, 이안 형제님.”

진짜인데, 나는 억울한 눈빛으로 성녀님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러면서도 한결 누그러진 눈빛으로 그녀는 내 시선을 피했다.

인상 깊은 태도 변화였다. 직전까지는 울컥해서 분노와 증오로 얼룩진 말을 토해내더니, 이제는 내게 다소 위축된 듯 보이기도 했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희미한 공포.

한동안 말이 없던 성녀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퉁겼다.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앞으로 서류 한 장이 날아왔다. 마법인가? 신성력으로는 불가능한 재주였다. 아티팩트를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성녀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

스르륵, 미끄러지는 서류는 정확히 내 앞에서 멈추었다. 경지에 달한 힘 조절이었다.

내가 의외라는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기밀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때 일은 없는 셈 치고, 준비한 정보나 내놓으란 소리 아니에요? 하, 참. 얼마나 대단한 조직이길래…….”

‘기밀’과 ‘조직’, 나와는 조금도 인연이 없는 낱말들이었다.

잠깐 그러한 의문이 스쳐지나갔으나, 성녀가 건넨 서류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다. 나는 서류를 들고 서서히 그 안의 정보를 살폈다.

지도와 함께 몇몇 곳이 표시되어 있었고, 그곳에 위치한 시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지형으로 볼 때 대륙 동부로 보였고, 표기된 시설들은 이름으로 짐작컨대 아마도 고아원.

내게는 하등 쓸모가 없는 정보였다. 다만 나는 그 순간 편지의 내용이 하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아원’, 그래. 내가 실습을 간 곳은 고아원이라고 했다.

“요구한 대로, 성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고아원의 목록이에요. 대부분은 너무 많은 고아들을 보호하고 있는 탓이죠.”

서류를 찬찬히 읽어 내리는 내 눈동자가 깊어졌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어도, 이것이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을 풀어낼 단서라는 사실은 명확해 보였다.

그렇다면 일단 챙기고 보는 편이 맞았다. 나는 서류를 깔끔히 반으로 접어, 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으레 그랬듯이 감사의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정보는 도대체 어디에 쓸 예정이에요?”

“모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로서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는 대답이기에 나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용건은 이게 전부인지 성녀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다소 무례한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항의하기에 내 머리는 너무나 복잡해진 뒤였다.

도대체 기억을 잃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적의 넘치는 성녀의 태도도, 두 번째 편지의 내용도, 알 수 없는 일투성이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만 나는 몸을 돌리기 전에, 가장 신경 쓰이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성녀님.”

무슨 일이냐는 듯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살짝 치켜떠졌다. 본론을 재촉하는 그 눈빛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본모습입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성녀님은 입을 다문 채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깊은 날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안 형제님, 모두에게는 다양한 일면이 있지요… 자애롭고 상냥하기만 한 고아 소녀가, 어떻게 성국의 무시무시한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평소의 모습은 가식…….”

“아니요, 아니요. 그것도 제 일면이에요. 다만 상대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대해야 할지가 달라질 뿐이죠. 그리고 이안 형제님은.”

성녀의 입가에 싱긋, 하고 자애로운 미소가 맺혔다. 내가 알고 있는 성녀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를 응시하는 그 연분홍빛 눈동자는 싸늘할 뿐이라서.

“이제, 이렇게 대해야겠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동안 괜히 잘해줬네요.”

나는 그저 씁쓸한 기분으로 방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성녀는 딱 봐도 내게 그간의 일을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렇다면 물어볼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언제나 성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충직한 호위기사.

유렌이었다.

**

내가 태양의 쉼터에서 걸어 나오던 찰나의 일이었다.

은빛의 실선이, 쏘아진다.

목표는 내 목젖,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이를 쳐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한 데다 찌르기에 담긴 힘도 강해 온전히 그 궤도를 비틀지는 못했다.

카가각, 하고 두 개의 검이 서로의 날을 갈아가며 저항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그럼에도 쏘아진 빛살은 기어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데 성공했다.

얕은 상처였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오는 정도.

그러나 내 대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치명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용의 정혈’로 마력과 함께 신체능력이 강화됐기에 망정이지, 한 달 전의 나였다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에 이르고 말았을 터였다.

내 당황한 눈초리가 검을 든 사내를 향했다. 내게 얇은 검을 찔러 넣은 사내는, 옥색 꽁지머리에 선이 얇은 중성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유렌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잠시 나를 살피더니, 김이 샜다는 듯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한 마디.

“……뭐야, 다시 약해졌잖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허, 하고 황당한 심정을 담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럼에도 유렌은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 뿐이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해, 이안. 사정에 대해서는 듣고 있었어. 기억을 잃었다면서?”

“……문밖을 지키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나는 호위기사니까. 당연히 너와 성녀님이 나누던 대화도 모두 들었고.”

그러면서 유렌은 짝, 하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내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악수를 하길 바랐던 듯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반응이 없자 차선책을 택한 모양이었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누님의 저 앙칼진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온 대륙을 통틀어도 몇 명 없거든.”

“그다지 기쁘지는 않은데…….”

기습을 당했으니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유렌의 친근한 태도에 마음을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검사가 돼서 뺨에 칼 좀 스친 것 가지고 울고불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을 내려야 했다.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유렌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믿어주는 거야?”

“그럴 수밖에 없지, 방금 확인해 봤잖아. 네 실력.”

그는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이고는, 팔짱을 꼈다. 그의 고개가 곧 무언가를 납득했다는 듯 끄덕여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렌의 추론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눈빛이 너무 달라졌길래, 긴가민가했거든. 그런데 기억을 잃었다면 아귀가 맞아. 너는 잠시 누군가에게 빙의당했던 거지. 유일한 의문은, 아무리 타인의 육체에 빙의하더라도 기술까지 재현하기는 힘들다는 건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그는, 아무래도 한참 동안이나 관련된 추론을 늘어놓을 듯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빙의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그쯤에서 그의 말을 끊고 들어갈 필요성을 느꼈다.

“눈빛이라니?”

“응? 아아, 그거… 그때의 너는 워낙 피로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지.”

‘피로한 눈빛’이라, 얼마 전에도 그러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첫 번째 편지를 받기 전, 기억이 사라졌던 일주일. 그때와 같은 증언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미래에서 온 편지와 관련이 깊은 현상이라는 뜻이었다. 유렌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그러한 해답을 도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래에서 편지가 날아온다는 상황부터가 비정상적이었으니까. 유렌의 추론을 굳이 참고 들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보다 중요한 의문을 해결하기로 했다.

“유렌, 부탁 하나만 하자.”

그의 고개가 갸웃, 하고 기울었다. 그리고 말해보라는 듯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

“혹시, 내가 기억을 잃은 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내 질문에 유렌은 잠시 내 시선을 피했다. 고민에 잠긴 듯했다. 그러던 그는, 곧 팔짱을 풀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우선, 내 어깨에 칼빵 놓은 건 기억나냐?”

아니,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삐질삐질 새어나오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내며, 속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동안의 나는, 또 다시 미친 짓을 저지르고 다닌 모양이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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