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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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인간들이 그렇듯, 성녀의 일상 또한 늘 비슷했다.
새벽녘에 일어나면 기도를 드린다. 그 뒤에는 식사를 하고, 신전으로 향해 환자들을 돌본다. 그러다 강의를 듣고, 경전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또 환자를 돌보기도 하고.
쳇바퀴와 같은 삶이었다. 그러나 성녀는 그에 대해 불만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고아원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몸을 떨던 어린 시절에 비하자면, 무엇을 해도 나은 인생이었다.
잠자리도 따뜻하고, 밥도 제때 나오고, 지나치며 인사를 나누는 사람마다 경애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녀를 우러러 본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대접이었다.
그녀는 그 점이 못내 뿌듯했다. 고아로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는, 은근히 인정욕구에 목말라 있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는 자애롭고 상냥하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그따위 애송이는 성국의 정치판에서 아귀다툼을 벌일 수 없었다. 알려진 바와 달리 성녀는 계산적이었고 영리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특정한 일면만을 보여주었을 따름이었다.
환자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성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고, 때로는 치료를 받을 수 없는 형편의 환자들도 몰래 치료해 주기도 했다.
‘성녀’라는 신분은 그녀를 아카데미에만 두지 않았으니까.
바깥으로 나가면 그녀의 옷가지라도 잡고 싶어 하는 민중들이 천지였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신전을 찾아갈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신의 은총은 햇살처럼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아닌가.
물론 신성력 또한 한정적인 자원이었다.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성녀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때때로 세상은 약자에게 너무나 잔혹했다.
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는데,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라니.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던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그 아픔을 모른 척하기는 힘들었다.
무리까지는 하지는 않았다. 단지 힘이 닿는 선까지만,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만 성녀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하지만 은혜에 목마른 대중의 존경을 사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거 들었어? 성녀님께서 얼마 전에 이웃마을을 들렀는데 말이야…….”
“어쩜 그렇게 마음이 고우실까? 우리 같은 천것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다니!”
얼마 가지 않아 민중들 사이에 성녀의 이름은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웃긴 일이었다. 성녀에게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손짓과도 같았다. 그만큼이나 간단한 작업에 불과한데도, 대중은 성녀가 어마어마한 희생이라도 감내한 듯 소리 높여 찬양한다.
속으로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성녀는 그러한 마음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성도 사이에서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녀의 영향력은 막대해진다. 굳이 거부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이처럼 그녀의 선행에는 언제나 선의와 계산이 반반씩 존재했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성녀는 평소처럼 신전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한적한길목에서 낯익은 사내를 마주쳤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이안 페르쿠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고 있던 것으로 보아 일부러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성녀는 그를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머금었다. 상대는 최근 그녀가 가장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갑작스레 높은 명성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카데미의 모든 사건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일취월장한 실력까지.
친해져서 나쁠 것 없는 상대였다. 또, 성녀는 그에게 은근한 호기심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귀족과 평민에게 두루 친절한 사람은 몇 명 봐온 적이 있었다. 당장 성녀도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평민 계집애 하나를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귀족은, 보기 드물었다. 아니, 단적으로 말해 난생 처음이었다.
성녀도 여인이었다. 그리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고아 출신이라는 꼬리표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그녀였다.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는 사내에게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또,마주칠 때마다 힐끔힐끔 그녀의 몸을 훔쳐보는 꼴이 웃기기도 했고.
성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사내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를.
그 때문에 불쾌할 때도 많았다. 무능한 주제에 성욕만 강한 수캐들의 음험한 시선을 받을 때마다, 성녀는 그들에게 신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에 비하자면, 이안은 나은 편이었다.
유능한 사내였으니까. 그리고 유능한 인간은 쓸모가 많으므로, 곁에 둘수록 좋았다. 그녀의 외모도 이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은근슬쩍 좋아하는 티라도 내주면, 착각에 눈이 벌개져 모든 것을 바치려는 사내들은 수두룩했다. 이안도 그중 하나가 되어 준다면 나쁠 것 없었다.
물론 얼마간 지켜본 결과, 이안은 그렇게까지 한심한 사내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호감은 티를 낼수록 좋았다. 사내들이란 본능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여인을 지키려는 습성이 있었으므로.
따라서 성녀가 이안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악할 수 있었다.
호감이 반, 계산적인 목적이 반.
어느 쪽이든 미소를 짓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녀는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는, 이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연이네요, 이안 형제님. 이처럼 반가운 얼굴을 마주친 것 또한 천신의 은혜입니다, 임마누엘.”
그러나 오늘따라 사내의 눈빛이 이상했다.
언제나 빛을 품고 있던 그 금빛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피로감만이 느껴질 뿐.
성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한 눈동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래, 오랜 시간 사투를 벌인 병사들이 그러한 눈빛을 하곤 했다. 마수와 끝없는 싸움을 벌이는, 최전선의 베테랑들.
인류의 적인 마수와 싸우는 이들이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최전선에 몇 번 파견된 적이 있는 그녀였기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수많은 죽음을 넘어선 자의 눈동자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안 페르쿠스는 마수 사냥조차 얼마 전이 처음이었다고 들었다.
첫 사냥에 고위 마수를 포함해 10마리가 넘는 마수를 토벌하다니, 무시무시한 재능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 눈빛은, 오직 수없이 사선을 넘은 경험만이 벼려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녀가 고민에 빠진 사이, 사내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뗐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성녀의 앞에 섰다.
본래라면 힐끔거리며 성녀의 젖가슴이라도 훔쳐보았겠지만,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여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무척 지친 목소리로,
“성녀님, 잠시 둘이서 이야기라도 나눌까요.”
담백하게 제안했을 따름이었다.
성녀는 잠시 고민했다. 남녀가 단 둘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만큼 관계가 진전되었다는 뜻이었다. 평소라면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안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것이 성녀의 생존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위험한 인간이다. 피 냄새가 짙었다. 유형화된 감각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직감을 파고드는 파고드는 요소들이 그랬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성녀는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이내 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움을 가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안 형제님. 하지만 하필 다음 일정이 바빠…….”
“책은 침대 밑에 잘 숨겨두셨습니까?”
우뚝, 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성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미동조차 없었다. 조곤조곤 이어나가던 말이 끊긴 것은 물론이었다. 대신 성녀는 무시무시한 것이라도 본 것 마냥, 부릅뜬 눈을 이안에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한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성녀는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이안이 읊기 시작한 내용은 유렌조차 모르고 있는 그녀 최대의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취향이 독특하시더군요. 굳이 여성이 남성에게 구속되어 성교를 나누는 내용만…….”
“……그, 그만!”
결국 성녀는 참지 못하고 그렇게 외치고 말았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귀까지 새빨개진 지 오래였다.
주먹을 쥔 채, 여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한계를 넘은 수치심에 동공이 빙빙 돌고 있었다. 성녀는 곧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부, 불경합니다! 신성 모독이에요! 이안 형제님, 실망했습니다! 종교 재판에 회부하겠어요!”
“아니, 이건 성녀님께서 읽는 책 이야기…….”
“아, 아무튼!”
성녀는 그렇게 다급히 이안의 말문을 막았다. 그리고 혹여 누가 이 이야기를 듣기나 했을까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더니, 다급히 이안의 소매를 쥐었다.
“……그, 그렇게 원하신다면 자리를 바꾸죠!”
그리고 질질 끌 듯이 사내의 몸을 끄는 성녀. 이안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것이 태양의 쉼터에서 비밀스러운 회담이 열리게 된 전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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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렌은 왜 있는 겁니까?”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태양의 쉼터의 2층, 응접실에 들어선 그는 성녀의 옆에 시립하듯 선 마른 체구의 사내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유렌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싱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이안은 그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단지 물끄러미 그 금빛 눈동자를 성녀에게 향했을 뿐.
성녀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이안 형제님. 아시다시피 괜한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사실 아무래도 좋았지만, 성녀가 유렌을 굳이 대동한 까닭은 그녀의 직감 때문이었다.
본능이 자꾸만 저 사내를 볼 때마다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저것은 맹수라고,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이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을 짐승이라고.
그러나 불안한 점도 있었다. 혹시나 이안이 그 ‘침대 밑의 책’ 이야기를 꺼낼까 싶어서였다.
아무리 성녀와 유렌이 남매 같은 사이라도 그러한 은밀한 비밀까지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안이 그러한 정보를 어디서 캐냈는지가 궁금했다.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 은밀히 경계의 기색이 어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이안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정보를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국의 지원을 받는 고아원, 그중에서도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어야 하고 대륙 동부에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침묵, 성녀의 의아한 눈빛이 이안을 향했다.
우선 그 정보를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러한 정보를 성녀에게 요구하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 그러한 정보를 수집할 능력은 충분했다. 성국에서 그녀가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은 막대하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성국 내부의 정보를 굳이 외부에 유출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마찬가지였다. 성녀는 난감하다는 눈빛으로한숨을 내쉬었다.
“이안 형제님, 아무리 형제님과 제 사이가 가까워도 성국 내부의 정보를 드릴 수는…….”
“아인델 총주교께서는 무탈하십니까?”
느닷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말로도 성녀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 연분홍빛 눈동자를 이안에게 향했다.
이안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그는 곧 생각을 정리했는지, 특유의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그분의 실각을 노리는 세력이 있다고 들어서요. 머지않아 추기경이 되실 분인데, 정치적인 약점을 잡히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누가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걸까요?”
멍하니, 성녀와 유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인델 총주교를 실각시키려는 사람이 누구냐니, 그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성녀 본인이었으니까.
아인델 총주교는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교계 인사였다. 개혁 성향인 성녀와는 오래 전부터 마찰을 빚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아인델 총주교의 측근으로부터 비리에 대한 단서를 전해듣고, 실각을 위해 암중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 얼마 전.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성녀는 지금껏 성국 정치 전면에 부상한 적조차 없었다. 단지 배후에서 계획을 세우고 조정하며, 차근차근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을 뿐.
그런데, 어떻게?
사실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기밀이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안뿐만 아니라, 그에게 정보를 유출한 인물까지 전부 다 털어내서 새로운 계획을 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이안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것. 설령 폭력을 동원하더라도.
그렇게 성녀와 유렌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그때.
“……덤비시죠.”
피로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성녀와 유렌은 침묵하고 있었으므로, 그 진원지는 자연스레 하나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 그는 여전히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성녀와 유렌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그제야그는 그 금빛 눈동자를 움직였다.
차가우면서도 잔잔한 눈동자, 이사내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일순 성녀의 결심을 뒤흔들었다.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유렌은 출중한 실력을 가진 검사였다. 성녀와 합공을 한다는 가정 하에, 패배한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기가 더 힘들 만큼.그럼에도 성녀는 사내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내는 찻잔을 제 입가로 가져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인 것 같은데.”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렇다면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유렌의 검이, 빛살을 그으며 찻잔으로 쏘아진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