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83화 (83/649)

〈 83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

* * *

전투 몰입.

집중력이 극한에 다다르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감각이 곤두서고 공기의 저항감조차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 순간.

혹자는 이를 ‘검사의 시간’이라 불렀다. 근접 박투를 즐기며, 생과 사의 경계를 타넘는 이들이었다. 이 또 다른 시간축에서 살아가는 주민 중 검사가 많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유렌이었다. 그의 시야가 포착하는 세계가 현저히 느려지고 있었다.

검이 서늘한 빛을 뿜는 찰나, 칼집에서부터 이어지는 은빛의 실선이 그려진다. 초를 초로 쪼개더라도 이 신속의 발검을 목격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유렌은 알고 있었다.

들켰다.

어느덧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그의 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그 눈동자만이 홀로 움직이는 듯했다.

느긋하게 찻잔을 들고 있던 그의 분위기가 반전했다. 찻잔이 솟구치며 허공을 날았고, 그 틈새로 폭사되는 검광.

은빛 실선이 솟구치는 칼날과 부닥쳤다. 캉, 하고 허공에 불꽃이 튀겼다. 그 반발력에 유렌의 검이 살짝 튕겨 나갔다.

유렌의 눈이 깊어졌다.

선공을 가했는데도 늦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안의 실력이라면, 이 속도에 대응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당연하다는 듯 검을 튕겨냈을 뿐만 아니라, 그새 손도끼까지 뽑아들고 있었다. 유렌으로서는 그 속셈을 알 수 없어 마땅한 대응을 내놓을 수 없었다.

이안의 의도는 곧 드러났다. 그의 손도끼가 망설임 없이 식탁을 찍어 내렸기 때문이었다.

우지끈, 목재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렌과 이안 사이를 가르고 있던 자그마한 식탁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목재 파편이 마구잡이로 튀어 올랐다. 유렌은 본능적으로 파편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것이 실책이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사내의 신형이 쇄도했다. 어느새 검을 칼집에 다시 갈무리한 이안은, 손에 손도끼만을 들고 있었다.

근접전에서 짧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사정거리가 길수록 유리한 것은 어느 전투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간격이 너무 좁을 때.

유렌은 아차 싶어 재빨리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캉, 하고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며 시야를 어지럽힌다.

손도끼는 짧은 만큼 빨랐다. 이안은 노련한 지휘자처럼 손도끼로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연달아 울리는 충돌음이 마치 가악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칼과 불꽃의 리듬 속에서, 유렌은 단지 손도끼를 쳐내기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말렸다. 유렌은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공방은 단 두 번뿐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유렌의 열세는 명확해 보였다.

당장 상황을 반전시킬 요인이 없다면,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무릎을 꿇어야 할 터였다. 벌써부터 손도끼를 쳐내는 손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지근거리였다. 차라리 검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유렌이 망설이던 그때.

“유렌!”

성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새하얀 광휘가 유렌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신체능력.

유렌의 눈동자가 희열이 스쳤다. 그래, 이 반전이 필요했다.

박자를 타고 있던 이안의 연격에 균열이 발생했다. 유렌의 대응 속도가 너무나 빨라진 탓이었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민해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듯 뒤로 빠져나가더니, 거리를 확보한 그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은빛 검광이, 일직선을 그린다.

칼날이 대기를 가르며 쏘아졌다. 파공성마저 양단하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일격.

급작스러운 가속이었다. 대응하기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눈에 익은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르게 쏘아진 검이었다.

이건 통한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유렌이 걸음을 내딛은 순간.

훅, 하고 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안이 몸을 옆으로 튼 것이다. 그리고 마치 이를 축으로 회전이라도 하듯 유렌의 검이 그를 비껴갔다. 그러나 유렌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늦었다. 이안이 보법을 밟는 순간, 이미 유렌의 검은 그의 지척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그런데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듯이, 유렌은 튕겨 나가며 빈 공간을 절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기에 유렌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내딛은 발을 축으로, 그렇게 불안정한 자세에서 사선으로 올려 그어지는 검로.

곧바로 불똥이 튀었다. 캉, 하고 울려 퍼지는 두 날붙이의 파열음.

예상대로였다. 어느새 손도끼가 엄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휘두르는 이안의 눈동자는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이 침착했다.

마치 닭의 목이라도 내려치는 듯했다.

하지만 유렌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검과 도끼가 맞부딪히자, 그는 그 반탄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확신했다.

신체 능력은 유렌의 우위였다. 발 하나만을 딛고 선 검격이었는데도 막상막하였다. 그렇다면 정자세로 쏘아진 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렌의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다시 제자리를 찾은 그는 횡으로 검을 그으려고 했다.

어느덧 달려든 손도끼가 없었다면 말이다. 수평으로 그어지는 손도끼를 막지 않으면, 그의 머리가 장작처럼 쪼개질 듯했다.

우선 방어가 먼저였다. 그의 검이 치켜세워진 그 찰나.

콰직, 하고 들릴 리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릅떠진 눈이 유렌의 경악을 증언했다. 그 시선을 쫓아가 보면, 이안의 손도끼가 그의 어깨에 틀어박혀 핏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횡으로 그어지던 손도끼가 아닌가. 그런데 그 검로가 폭포수처럼 직각을 그리더니, 유렌의 어깨를 그대로 작살내 버렸다. 물리 법칙을 무시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때, 유렌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검술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대륙의 온갖 기기묘묘한 검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신음처럼 무어라 이름 하나를 내뱉으려 했을 때의 일이었다.

“소드 서… 크아악!”

유렌의 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섬광처럼 칼날이 날아와 그의 남은 어깨를 관통했다. 더는 고통을 참을 수 없었던 유렌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 어깨에서 피가 철철 넘쳤다. 어깨 관절이 박살났으니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했다. 이대로 이안의 승리로 전투가 끝나는 듯했다.

갑작스레 등 뒤에서 다가온 일격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정권이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진 주먹은 그 자체로 하나의 흉기와 같았다. 성녀의 기습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성녀 또한 호신을 위해 성국의 비전 무술을 익히곤 했다. 신성력으로 신체 능력만 강화해도 어중이떠중이 검사들은 압도할 수 있었다.

그에 수도사들이 익히는 유술이 더해진다면, 당연히 그 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내질러진 주먹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피해냈다. 훅, 하고 허공을 가르는 주먹.

연격이 이어질 터였다. 그럼에도 이안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 전에, 성녀의 배후를 습격하는 물건이 있었으니까.

찻잔이었다. 전투의 첫 시작 때 공중으로 띄워 올렸던 찻잔, 그것이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성녀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찻잔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던 성녀의 눈빛에 당혹감이 어렸다. 체공시간을 생각했을 때 찻잔이 지금에야 떨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실전 경험은 그녀에게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게끔 만들었다.

콰직, 하고 찻잔이 허공에서 터져 나가며 찻물을 흩뿌렸다.

성녀가 무심코 주먹으로 찻잔을 쳐내고 만 것이다. 직후 다시 자세를 잡고 이안을 노리려던 그 순간.

성녀의 세계가, 뒤집혔다.

어느덧 엄습한 이안이 성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제 어깨 위로 성녀를 넘겨버렸다.

대륙에는 온갖 무술이 존재했지만 이토록 순식간에 품 안을 파고들 수 있는 유술은 유일했다.

성국의 비전 유술, 달 뒤집기.

쿵, 하고 성녀의 몸이 대리석 바닥과 충돌하며 충격파를 일으켰다. 커헉, 하고 성녀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팔을 비틀며, 성녀를 뒤집고 제압했다. 등 뒤로 팔이 꺾인 채, 땅바닥을 향하고 있는 성녀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 또한 대다수의 유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지만, 그 능숙한 연계 동작이 너무나 익숙했다. 성국의 비전이 분명했다.

하지만 외인은 성국의 유술을 배울 수 없는데, 불신을 담은 눈동자가 이안을 향했다. 그러나 그의 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다, 당신… 흐으, 누, 누구야.”

어찌나 놀랐는지 거칠어진 숨을 삼키면서, 성녀는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이안은 잠시 고민하듯 입을 다물었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측면을 향했다가, 다시 성녀에게로 향했다. 흔들림 없는 금빛 눈동자와 떨리는 연분홍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

그 다음 순간, 우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흐으, 크으으읍!”

이안이 그대로 성녀의 팔을 꺾어버린 것이다. 어깨 관절이 박살나는 고통에 성녀는 신음하며 땅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유렌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그가 비명처럼 외쳤다.

“누님! 이안 너 이 새끼……!”

“다리까지 아작 나기 싫으면, 조용히 해라.”

그 두 마디로 끝이었다. 유렌은 분한 눈빛이었지만, 그대로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그러든 말든 태연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저벅거리는 걸음걸이는 그가 원래 앉아 있던 의자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걸터앉아, 아무 말도 없이 성녀를 내려다보았다.

성녀의 눈동자에 희미한 공포가 어렸다.

이 인간, 아무런 망설임이 없다.

폭력을 행사하려 들 때는 내적 갈등이 있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여인이고, 성국의 고위 인사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사내는 그까짓 건 상관없다는 듯, 마음먹은 즉시 성녀의 팔을 꺾어버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성녀’라는 신분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경악과 공포가 담긴 시선을 그를 향하더라도, 이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지 피로한 눈빛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

“……이안 페르쿠스.”

무슨 소리일까, 잠시 고민하던 성녀는 그제야 자신이 던진 질문을 떠올려 냈다.

‘당신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

참으로 적절하면서도 또 부적절한 대답이라, 성녀는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미친 새끼.

감히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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