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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84화 (84/649)

〈 84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5)

* * *

태양의 쉼터 2층, 응접실 안에서는 온갖 집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우선 반 토막이 난 식탁과 깨져나간 찻잔들이 그랬다. 나무와 유리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에 튀어 있었다.

오늘밤 사용인들이 찾아오면, 화들짝 놀라 성국에 보고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승패는 명확해졌지만 그 후폭풍 또한 무시무시할 것이 분명했다. 성녀는 성국의 최고위직이었고, 대외적인 이미지 또한 훌륭했다.

만약 이안을 고발하려고 들기라도 한다면?

시골 자작의 차남에 불과한 그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안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성녀는 소름이 돋았다. 도무지 이 인간의 속내를 읽어낼 수가 없어서.

다만 흘러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짓누르면서,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조소였다. 그녀가 이안에게 물었다.

“당신, 감당할 수 있겠어?”

금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피로만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마치 감정이란 것이 거세되기라도 한 듯했다.

성녀는 이를 갈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위협을 가했다.

“나는, 성녀야… 당신이 무어라 하든 간에 찍어 누르고 당신을 화형대에 세울 만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예를 들어, 내가 당신한테 겁탈당할 뻔했다고 말하기라도 하면?”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누명을 씌워본 적은 없었지만, 성녀는 굴욕감과 수치심에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무력으로는 패배했지만, 세상은 단 한 사람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와 정치, 그에 수반하는 온갖 구조들이 개인을 지탱하는 동시에 구속하고 있었다.

이안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저토록 괴물 같은 실전 박투 솜씨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규모 난전에 한정된 이야기.

진정한 실력자들이 집단으로 나선다면 그도 당해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성녀의 위협에도 이안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 흥미조차도 엿보이지 않는 금빛 연못.

단지 사내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시죠.”

그러는 이안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탄해서, 도리어 당황한 쪽은 성녀였다.

“……뭐?”

“그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몸을 다시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성녀의 눈빛이 잠시 두려움에 잠겼다. 혹시 화가 나 또 다시 해코지를 할까 무서운 듯했다.

그러나 이안은 성녀에게 딱히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단지 창문 쪽으로 걸어가, 뒷짐을 진 채 바깥의 정원을 감상할 뿐이었다.

여유인가, 허세인가.

성녀는 그것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유렌의 눈동자가 잠시 마주쳤다. 그러나 유렌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우선 정체부터 캐내야 했다. 성녀가 다시 한 번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방금 전에 쓴 기술, 성국의 비전 유술이잖아.”

이안이 경고한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렌도 가세했다. 그는 신음을 억누르면서, 노골적인 의심의 눈빛을 이안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직각으로 꺾이던 도끼의 궤적… 소드 서클(sword circle)의 비전이지?”

둘 다 외인부전(外人不?)을 원칙으로 하는 조직의 비기였다. 당연히 한 인간이 두 가지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사내는 했다.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어 성녀도 유렌도 함부로 그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안은 두 사람의 질문에도 심드렁한 태도였다.

“누구겠습니까?”

“지금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

짜증스럽게 되물으려던 성녀는, 그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자 곧바로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 싸늘한 눈빛을 받고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는 할까?

사내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성녀의 앞으로, 그리고 무릎을 꿇고 성녀와 눈을 마주했다.

“성국도, 소드 서클도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보안을 지켜온 만큼, 통상적으로 두 조직의 비기를 동시에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다시 입을 연 성녀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가능성에 말끝을 흐렸다.

그래,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오직 두 조직의 기밀을 훔쳐올 때만 가능하다. 그 강자들이 즐비하고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곳에서 비기를, 어떻게든.

최소한 성녀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옆에서, 허공이 핏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부릅떠졌다.

핏빛의 마력이었다. 그것이 허공에 난해한 문자를 그리고 있었다. 은은한 열기가 느껴지는 글자였다.

그러나 성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문자는 마력이 억눌린 상태에 불과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방 하나쯤은 불꽃으로 태워버릴 만한 힘이 저 문자에 깃들어 있었다. 성녀의 경악이 이어졌다.

“……요, 용혈 문자(?血文子)?! 당신, 제국 황실 소속이었어?”

‘용혈 문자’. 제국 황실에 내려오는 비전 마법이었다.

이 마법의 특징은,부여받는 즉시 주술적 이해 없이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다시 말해 검사도, 사제도, 심지어는 길거리의 촌부조차도 용혈 문자를 받으면 그 안에 새겨진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용의 후예를 자처하는 제국 황실만이 부여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고대에 마법을 창안했다는 용들의 언어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는 소문만이 무성한 비밀 중의 비밀.

황실 소속의 첩보 조직이나 근위대나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성녀가 도출할 수 있는 논리적 귀결 또한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 사내는 제국 황실 소속이다. 그러한 가설을 채택하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성국과 소드 서클이 아무리 대단해도 제국 황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제국 황실이 마음만 먹는다면, 두 조직의 비기를 훔쳐냈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인델 총주교의 첩보를 입수한 경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라는 신분 또한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제국 황실의 칼로 벼려져 온 인간일 테지, 그렇게 가정하면 그 괴물 같은 실전 박투 솜씨도 이해가 갔다.

성녀의 눈동자에 혼란이 몰아쳤지만, 사내는 성녀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굳이 우리가 척을 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작해야 고아원에 대한 정보, 그 정도만 전해 주시면 끝날 일인데.”

은근한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그러한 말을 들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제안이었지만, 상대가 제국 황실 소속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성녀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갈등이 어렸다. 아무리 성녀라도 제국 황실과 마찰을 빚는 것은 부담이 너무 컸다. 하물며 상대는 그녀에게 성국의 비전 기술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까지 했다.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비밀이 폭로당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성녀는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물었다.

“협력을 바라는 사람이, 내 호위기사의 어깨를 박살내고 내 팔까지 꺾어?”

“먼저 덤빈 쪽은 그쪽 아닙니까.”

“……네가 협박했잖아!”

성녀는 억울해서 소리쳤지만, 사내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정보도 하나의 힘입니다. 승패가 정해졌으면 더는 어린애처럼 굴지 마시죠.”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성녀는 굴욕감에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도, 항복 선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협력할게. 대신 아인델 총주교의 일은 비밀로 해줘.”

“당연한 말씀을.”

용건이 끝나자 사내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성녀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완패였다.

무력뿐만이 아니었다. 내심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정보력과 협상에서마저 패배해 버렸다.

상대가 제국 황실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분하고 슬픈 마음이 치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열패감을 곱씹고 있을 때였다.

문득 성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사내는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멈춰 선 채 망설이는 눈동자.

그 눈빛이 낯설었다.

사내가 처음으로 보인 인간적인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가 내보인 감정은 단 둘뿐이었다.

적의, 혹은 살의.

어느 쪽이든 인간의 감정은 아니었다. 삶을 추종하는 동물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정일 뿐.

하지만 금색 눈동자가 다시 성녀를 향했을 때, 그 눈에는 연민과 괴로움마저 담겨 있어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성녀는 멍해졌다. 너무나 극적인 변화라서.

사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짜내듯이 말했다.

"……분합니까?"

울컥, 하고 성녀는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었다.

당연하지 않느냐고, 일방적으로 시달리다 항복 선언까지 했다.

유렌은 어깨 관절이 박살났고, 그녀 스스로도 짓이겨진 신경에서 전해지는 통증으로 신음을 억지로 눌러 참고 있는 와중이었다.

분하다.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차마 그 말을 뱉어내지 못했다. 단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을 뿐.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

"순명(??)하십시오."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성녀는 단지 한참 동안이나 주저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

나는 유렌의 진술을 듣고 난 뒤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뿐이었다.

성국? 소드 서클? 심지어제국 황실?

헛소리뿐이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빙의 탓이라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델핀 선배가 내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쳐 버렸지만, 그 질문에서도 두 가지 낱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국'과 '소드 서클'의 비기.

도대체 어떻게?

유렌은 내가 제국 황실 소속의 고위 마법사에 의해 빙의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과거의 일을 모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걷고 있던 그때.

"……오."

그 자그맣게 들려오는 탄성에, 나는 그 진원지를 돌아보았다.

갈빛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녹빛 눈동자가 거울처럼 내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을 만한 인상이었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내게 말했다.

"돌아왔구나, 이안!"

레토 아인스턴.

얼마 전에도 본 얼굴이었지만, 볼 때마다 반가운 친구였다.

나는 내 절친한 친구에게 곧바로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손이 곧 그에게 붙잡혔다.

내 의아한 시선이 그를 향하기도 전에, 레토의 입이 열렸다.

"따라와, 네 기억상실증에 대해 알게 된 게 있으니까."

느닷없는 말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멍하니 레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소 진중해진 얼굴로, 한 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대화를 나눴거든, 얼마 전에… 그놈이랑."

'그놈', 그 호칭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기억을 잃은 동안의 '나'였다.

수수께끼를 해소할 결정적인 단서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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