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85화 (85/649)

〈 85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6)

* * *

아카데미는 드넓다.

얼마나 넓으냐면, 아카데미에서 1년 내내 머무르는 학생들조차 그 규모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였다.

새내기 때 지리를 익힌다고 해봐야 자주 다니는 학습동 위주로 기억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 외의 장소를 꿰고 있는 학생들은 드물었다.

2학년쯤 되면 그래도 아카데미의 비밀스러운 장소들을 알게 된다. 선배들로부터 전해듣거나, 유독 탐구심이 뛰어난 학생들이 아카데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함께 다니는 친구끼리 공유하는 ‘동선’이라는 것이 생겨나곤 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 지름길과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길마저도 서슴없이 드나들게 된다. 슬슬 아카데미의 지리에 통달하는 시기였다.

4학년은 아카데미에 머무는 시간보다 실습 파견을 나가는 시간이 더 많으므로, 실질적으로 아카데미의 지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학년은 3학년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리고 나와 레토는 3학년이었다.그렇게 적극적으로 아카데미 내 부지를 탐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몇몇 구석진 장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이라든지.

아카데미의 중심지에는 온갖 건물들이 몰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건물 사이의 공간이 특히 좁은 구간이 존재했는데, 그곳이 마치 골목을 연상시킨다 해서 ‘골목길’이라 불리는 장소였다.

소문에 따르면 괴짜들이 모인 동아리 하나가 동아리방으로 향하는 문을 숨겨놨다고도 전해지는데, 내게는 딱히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나 레토가 골목길을 이용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워낙 으슥한 곳이므로, 남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습하고 냄새 나는 골목길에 기대, 레토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도 내 모습을 찬찬히 뜯어 살피는 중이었다. 그의 고개가 곧 끄덕여졌다. 만족했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내가 알고 지내던 이안이 맞네.”

그 말에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 말고 이안이 또 있겠어?”

“있던데?”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내 입이 또 다시 다물어졌다. 나는 무슨 뜻이냐는 듯, 물끄러미 레토를 쳐다보았다.

그는 굳이 뜸을 들이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면서, 내게 단언했을 뿐이었다.

“일단 너, 기억을 잃었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그거 빙의 맞더라.”

침묵, 나로서는 마땅히 내놓을 대답이 없었다.

내심은 이중인격이라든가, 그러한 반전을 기대했지만 레토의 말을 들어 보니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이토록 확신을 가질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애초에 내가 익힌 적도 없는 비전 기술을 사용하던 녀석이었다. 내 또 다른 인격이라는 가능성은, 지나치게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에 불과했다.

나는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듯 레토를 응시했다. 그는 괜히 상심하지 말라는 듯, 혀를 쯧쯧 차면서 말을 덧붙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의 네 영혼이 일시적으로 빙의하는 거야.”

“……그게 가능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편지도 날아오는 마당에.”

다만, 그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목소리를 진중하게 내리깔았다.

“물론,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야. 자, 들어 봐.”

그렇게 레토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며칠 전, 그와 ‘그놈’이 마주쳤을 때의 일이었다.

**

레토는 그날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차였는데, 마법학부 학생들이라면 으레 매일 한 잔씩은 마시곤 하는 음료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힘드니까.

수면부족과 만성피로로 인해 편두통에 시달리는 마법학부 학생들이었다. 강제로라도 두뇌에 활력을 돌게 하지 않으면, 매일 주어지는 학습량을 따라가기조차 버거웠다.

퀭한 눈빛을 하고 어기적거리며 걷던 레토의 눈에 사내 하나가 비친 것은 그때였다.

검은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외모만 보면 귀공자처럼 생겼지만, 손도끼만 들면 야수가 되어버린다는 소문이 무성한 그의 절친한 친구.

이안 페르쿠스였다.

그는 곧바로 손을 들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야, 이게 누구야? 수렵제 우승자 이안 페르쿠스 경 아니신가. 기말고사 대체 실습 준비는 잘…….”

그러나 그 순간, 그를 향하는 금빛 시선을 보고 레토는 입을 다물었다.

지독한 피로감이 느껴지는 눈이었다. 차라리 그대로 죽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안식이라 받아들일 만큼, 절절한 고통이 묻어나오는 눈동자.

레토는 곧바로 낯빛을 굳혔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 안녕. 레토.”

그 메마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레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난번의 그 녀석이다.

그때는 긴가민가했지만, 이후 기억을 잃었다는 이안의 증언을 듣고 이제는 알고 있었다. 최소한 그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쯤은.

레토는 그 순간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무시해야 하나? 만약 빙의라면, 이안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영혼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자극해 보는 것은 하책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어도 저 ‘이안’이 앞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알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지난번에도 유르디나의 싸가지를 반죽을 때까지 패는 기행을 저지르지 않았나.

레토의 명민한 두뇌에 몇 가지 가능성이 불꽃처럼 잔향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의 선택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 이안. 그러고 보니 너, 그거 들었냐?”

“……뭘?”

그의 지친 눈빛이 레토를 향했다. 레토는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니, 아직도 못 들었어? 쯧, 하여간 정보가 느리다니까. 잠깐 따라와 봐.”

“아니, 나는 그다지 관심 없…….”

그러나 레토는 사내가 무어라 말을 하든 말든 그를 질질 끌었다. 처음에는 조금 저항하던 사내도,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순순히 따라 들어왔다.

도착한 곳은 골목길이었다. 그곳에서, 레토는 사내에게 물었다.

“……너, 누구냐?”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레토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이것이 레토의 최선이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난동을 부린다면, 빙의한 영혼이 정체를 들켰다고 생각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레토와 사내, 단 둘뿐.

설령 레토에게 정체가 들킨다고 해도,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 정체를 은폐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난동을 부릴 가능성은 존재했지만 그럴 확률은 낮았다.

이안이 기억을 잃었던 지난 일주일 동안에도 저 ‘이안’은 나름대로 일상을 잘 소화해 냈다. 최소한 본능보다는 이성이 앞서는 상태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공을 들인 빙의체라면, 고작 한 사람한테 정체를 들켰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겠지.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했다. 레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이유였다. 그의 손은 벌써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만약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곧바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레토는 만일을 대비해 만들어두었던 품속의 스크롤을 떠올렸다.

장당 수백 골드를 호가하는 물건인데, 하여간 친구를 잘못 둔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렇게 레토가 긴장한 낯빛으로 사내를 유심히 살피기를, 한참.

사내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야, 이안 페르쿠스.”

“헛소리 하지 마.”

사내의 말에 답하는 레토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적의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안은 그렇게 안정된 자세로 걷지 않아, 더 가볍지… 그리고 소문에 관심이 많아서 내게 캐묻기까지 하던 놈인데, 그거 들었냐고 물어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사내는 침묵했다. 레토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 있음에도 담담한 태도였다.

그는 후우, 하고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진짜야, 나는 이안 페르쿠스야. 네가 아는 이안이 아닐지는 몰라도.”

단서였다. 그리고 사실상 고백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레토가 아는 ‘이안’이 아니라는 소리는, 그가 레토와 알고 지내던 이안과 다른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레토의 눈동자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지금 아카데미 괴담을 취재하러 온 게 아닌데.”

“정 의심스러우면 확인해 보든가.”

사내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조금도 거리낌 없는 태도, 레토는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도 곧바로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

“셀린이 마지막으로 이불에 오줌을 싼 나이는?”

“열두 살, 셀린은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내가 2학년 때 에리엘이랑 헤어진 이유.”

“술집에서 걔네 언니랑 바람피우다 걸렸잖아, 에리엘이 워낙 쪽팔려 해서 소문까지 퍼지진 않았지만.”

“그럼 내가 새내기 때 도박판에서 꼴아박은 돈은?”

“200골드? 2년치 용돈 날려먹었다고 했으니 그쯤 될걸.”

씁, 레토는 입맛을 다시는 수밖에 없었다.

대답만 놓고 보면 이안이 확실했다.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지내며 공유한 추억들이었다. 절대 외부로 유출될 리가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혼란이 어리자, 사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이안 페르쿠스라고. 다만 조금 먼 곳에서…….”

“……혹시 미래에서 왔냐?”

문득 생각나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단지 레토를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레토는 직감했다.

미래에서 온 것 맞구나, 그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얼마 전에 들었다면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넘어갔을 소리였다. 하지만 이안이 지난번에 언급한 ‘편지’도 있고,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미래의 이안이 빙의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로서는 놀라운 기연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레토는 평생을 연구에 전념할 주제를 얻은 셈이었다.

레토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잠시 후.

그 위대한 기적의 체현자 앞에서, 레토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입을 뗐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더니.

“……야, 이 새끼야! 아무리 미래에서 왔더라도 내 친구 몸 빼앗은 건 맞잖아!”

곧 강렬한 분노가 담긴 외침으로 화했다.

흥분한 레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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