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86화 (86/649)

〈 86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7)

* * *

“야, 이 새끼야! 아무리 미래에서 왔더라도 내 친구 몸 빼앗은 건 똑같잖아!”

그렇다. ‘미래’라고 해봐야,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였을 곳에서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의 이안은 미래의 이안과 별개의 인간이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와 영혼의 개입을 받은 뒤였다. 당연히 지금의 이안이 걸어갈 길은 미래의 이안이 걸어왔을 길과 달랐다.

그 증거가 ‘기억상실증’이 아닌가. 이는 두 인격이 서로 동화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만약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되었다면 기억도 공유할 테니까.

즉 지금 레토로서는 난데없이 ‘미래의 이안’이란 영혼에게 ‘친구 이안’을 빼앗긴 상황이었다. 화를 내지 않는다면 비정상이었다.

레토의 연약한 주먹이 휘둘러졌다.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뒷걸음질을 쳐 주먹을 피해냈다. 그리고 레토가 씩씩거리며 두 번째 주먹을 날린 순간.

턱, 하고 레토의 손이 사내에게 붙잡혔다.

사내의 입가가 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쓴웃음이었다. 지금껏 그가 보여주었던 얼굴 중 그나마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오랜 시간 머무를 수는 없으니… 단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사내의 해명에도 이미 달구어진 레토의 머리는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제 품을 더듬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스크롤이라도 쓸 기미였다.

그때였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레토의 몸이 빙글 회전하며 사내와 레토의 자리가 맞바꾸어졌다. 그리고 벽면으로 밀쳐지는 레토.

등 뒤로 팔이 꺾여진 자세였다. 도무지 그럴 전조가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레토는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했다.

그러나 그의 빛은 여전히 활활 타고 있었다. 핏발 선 눈으로, 레토가 입을 열었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노골적인 적의였다.

“해야 할 일……? 그 잘난 ‘해야 할 일’ 때문에, 지난번에 이안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 그런데 얼마나 네 장난질에 어울려 줘야……!”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으니까.”

담담한 말이었다. 어떠한 고저도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목소리.

레토는 단번에 냉정을 되찾았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짙은 회한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마치 찬물을 맞은 듯, 서늘해진 그의 시선이 멍하니 사내의 금빛 눈동자를 쫓았다.

흔들림이 없었다. 진실이라는 뜻이었다. 최소한 레토가 읽어낸 바로는 그랬다.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가, 닫기를 여러 번.

벽면에 밀쳐진 채로, 레토는 가까스로 하나의 질문을 짜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레토…….”

사내는 진지한 낯빛으로, 그렇게 읊조렸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조언을 건넸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세상이 허락하지 않거든, 그러다 다칠지도 몰라.”

그것이 끝이었다.

사내는 이제 레토가 진정했다고 생각했는지, 레토를 밀치듯 풀어주고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레토는 엉거주춤 자세를 바로잡으면서도,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 사고의 끈이 복잡하게 얽혀 들고 있었다.

모두가 죽는다니, 도대체 왜. 그리고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이안만이 미래를 알 수 있는 거지?

그 수많은 문제들이 의문부호의 실뭉치로 엉켜 들었다. 지금까지 주어진 단서로 이 실뭉치를 푸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는 것.

“……왜 돌아온 거야?”

걸음을 옮기려던 사내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흘깃 레토를 향했다. 레토는 혹시 그의 마음이 바뀌어 떠나가기라도 할까 싶어, 재차 물어야 했다.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오는 것, 인세의 마법사들은 이루지 못할 기적이잖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했겠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거야? 그리고, 왜 하필 너고?”

사내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의 눈동자가 측면을 향했다가, 이내 제자리에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패자니까.”

‘실패자’라니, 또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레토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의 밖으로.

그 행선지를 짐작할 수 없었던 레토는, 당황한 와중에도 소리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야, 어디 가!”

“사람 만나러.”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답했다.

“……델핀 유르디나, 그 여자를 만나기로 했거든.”

레토는 그 말을 듣고, 단지 황망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쫓았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레토는 그 이후, 사내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고 했다.

오늘 나를 만나기 전까진.

**

레토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침묵했다.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도 많았다.

나는 우선 레토에게 물었다.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니?”

“그럴 줄 알았다, 하여간 검술학부 녀석들이란…….”

쯧쯧, 하고 혀를 차면서 레토는 허공에 빛의 실선을 그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었다.

본래 마법진을 새길 때 쓰는 기법이지만, 경우에 따라 이처럼 해설을 위한 도구로 동원되기도 했다. 반짝거리는 새하얀 실선이 수직으로 그어졌다.

레토는 실선의 하단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이게 과거야. 그리고 이대로 쭉 미래로 간다고 하자.”

그의 손가락이 실선을 따라 올라가며, 상단까지 닿았다. 그리고 그가 내게 물었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뭐, 다시 중간쯤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야?”

그러자 레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실선의 중간쯤 되는 위치로 옮겼다. 그의 녹빛 눈동자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이 다음은? 이미 그려진 미래를 쭉 따라가게 되는 걸까?”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턱을 쥔 채 고민에 빠졌다. 오래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무언가 달라지겠지?”

“좋아, 그럼 새로운 미래를 그려보자고.”

그리고 그는 대각선으로 빠져나가는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졸지에 나뭇가지처럼, 중앙을 기점으로 두 개의 선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내 의문을 담은 눈동자가 레토를 향했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자, 봐. 중간을 기점으로 두 가지 미래가 존재하게 됐지?”

“과거로 돌아왔으니 첫 번째 미래는 소멸하는 거 아니야?”

“잘 생각해 봐, 그럼 과거로 돌아온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그 첫 번째 미래의 결과물이 ‘나’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끄응, 하고 침음을 삼키며 미간을 좁혔다.

이제야 레토가 하고 싶은 말이 이해가 갔다. 나는 레토에게 확인 차 물었다.

“그러니까 저 대각선의 미래가 ‘나’고, 저 직선의 미래에서 온 게 나한테 빙의한 ‘나’다?”

“바로 맞췄어, 시간이라는 건 지울 수 없는 도형 그리기와 같아. 일단 한 번 그려지면 절대로 지울 수 없지. 말하자면, 그 ‘이안’이 과거로 돌아온 순간 또 하나의 가능성의 세계가 생긴 거야. 너와 그 ‘이안’이 과거를 공유하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이유지.”

차라리 인격이 통합됐다면 모를까, 레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걸리는 점이 있었다. 지금도 내 품에 자리하고 있는, 미래에서 온 편지.

그것이 증언하는 세계는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레토에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받은 편지도 미래에서 왔잖아. 오히려 그 편지는 그대로 지키지 못하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레토는 그 문제 또한 간단하다는 듯, 대각선으로 그어진 두 번째 미래의 끄트머리를 짚었다.

“이곳에서 온 거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축 자체가 통째로 흔들린 거야. 어느 가능성의 세계에서 편지가 날아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아. 물론, 네가 편지를 받은 이상 지금의 세계는 그에 한없이 가까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고 해야겠지?”

복잡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레토의 설명을 통해 어떻게든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즉 내게 빙의하는 미래의 ‘나’와, 7년 뒤의 미래에서 날아온 연애편지는 각각 다른 미래에서 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본 꿈속의 사내도, 미래의 ‘나’인 걸까?

나는 그 피로 젖은 풍경화를 떠올렸다.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지던 전장, 시체들이 즐비해서 ‘죽음’이라는 낱말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그 광경을 재현할 수 없었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맞이해야 했을 종막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쓸쓸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간담이 서늘했다.

편지의 내용을 따르지 않으면, 그러한 미래가 당도한다는 뜻과 같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미래에서 날아오는 편지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했으니, 보낸 이가 여러 명이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편지의 내용이었다. 이를 최선을 다해 따르다 보면 미래의 내 연인들도 하나둘씩 그 정체가 밝혀지리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레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탄이 어린 눈빛으로 내 절친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쭐한 표정이었다. 스스로 거둔 성과가 꽤 만족스러운 듯했다.

내 손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입에서 상찬의 말이 절로 나왔다.

“레토, 제법인데? 네 덕분에 좀 감이 잡혔어.”

“하, 내가 좀 유능하긴 하지. 넌 나한테 술 좀 사야 돼.”

술을 사라니, 그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레토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에 신뢰가 가득 맺혔다.

나는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레토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내 질문에 레토는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야, 네가 알아서 해야지.”

“……?”

그 무성의한 대답에, 나는 멍하니 레토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소의 배신감마저 깃든 시선이었다.

그러나 레토는 오히려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그럼 내가 생각하리? 당장 그 편지의 내용도 모르는데?”

무어라 반박하려 입술을 달싹였다가, 그대로 닫았다.

레토의 말은 틀린 부분이 없었다. 계획을 짜려면 정보가 있어야 하는데, 미래에서 온 편지의 내용은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말고사 대체 실습인가.

나는 ‘이안’이 성녀에게 요청했던 정보에 생각이 닿았다.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아마도 그 ‘고아원’이 미래와 연관이 있을 터였다.

그것이 비록 첫 번째 미래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로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으니, 우선은 그가 찾아두었던 정보부터 시작하는 편이 맞았다.

레토는 고민에 잠긴 내 모습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신경이 쓰였는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델핀 선배를 만나러 간다 그랬지?”

델핀 선배라, 그러고 보니 수렵제 이후로 잠적했다고 들었는데.

그 외에도 또 하나 생각나는 여인이 있었다. 내게 처음으로 미래에서 편지가 날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준 사람.

엠마였다. 내 마음속에서 두 개의 선택지가 저울에 매달렸다.

하나는 태양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 델핀 유르디나.

나머지 하나는 포근하고 상냥한 미소가 인상 깊은 소녀, 엠마.

둘 중 하나를 만나는 편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겸사겸사, 기말고사 대체 실습을 함께 갈 조를 모으기도 해야겠고.

아무래도 엘시 선배도 찾아가야겠지.

나는 곧바로 머릿속에서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은 탓에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다. 기말고사 대체 실습 기간은 코앞이었다.

실습 파견 지역을 정하고, 조를 짤 때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그 안에 어떻게든 정보와 전력을 모아야만 했다.

피 냄새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

그날 저녁, 아이달로스 관에서 나는 델핀 선배를 찾으러 갔다. 그러나 사용인에게 내가 전해들은 소식은, 내심 예상하고 있던 대로였다.

“그, 유르디나 님께서는 지금 신전 집중치료실에 입원하셔서…….”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그럴 것 같긴 했다. 다만 집중치료실까지 갈 상처까지는 아니었길 바랐을 뿐.

또 다시 나를 마주할 델핀 선배의 반응이 도무지 예상이 가질 않아서, 내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속으로 한탄했다. 미래의 '나'를 향한 불평이었다.

참 참을성이 없는 인간이라고,내 평화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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