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87화 (87/649)

〈 87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8)

* * *

하늘에서는 어슴푸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느덧 해질녘.

아카데미의 남쪽 숲은 수렵제 때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고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리가 났던 곳이었다. 비단 축제의 열기 탓만은 아니었다. 본래라면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 네임드급 마수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명명되기로는 ‘창자 수집가’, 다행스럽게도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아카데미 측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카데미는 곧바로 조사단을 꾸렸고, 낮에는 수십에 달하는 조사단원들이 숲을 오가는 소리가로 부산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낮은 태양의 시간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해는 아루스의 간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천리에 반하는 부정한 것들은 햇빛에 닿으면 힘을 잃고, 이는 마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설처럼 빛에 닿자마자 불타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약화되는 것만큼은 맞았다. 마수들 또한 마력으로 탄생한 삿된 존재들이었으므로.

반면 태양이 저물고 칠흑의 장막이 드리우면, 악신 오메로스의 시간이 돌아온다. 마수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밤하늘에 뜬 달은 아루스의 오른쪽 눈을 상징했다. 밤이 되어서도 천신의 감시는 계속된다. 그럼에도 어둠이 곳곳에 드리우면 달빛이 닿지 않는 곳도 생기기 마련.

아직 숲에 어떠한 위험이 남아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사단원들도 밤이 되면 숲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새와 풀벌레만이 호젓이 우는 이곳.

태양을 닮은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벌써 밤이 찾아온 듯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보였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숲의 공터에는 오직 둘뿐이었다.

젊은 청춘 남녀를 두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싸늘했다.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그러니까 델핀은 입술을 짓씹으며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면 흑발의 사내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단지 피로한 눈빛으로 여인을 응시하고 있을 뿐,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여인은 그것이 못내 분한 듯했다.

씹어뱉듯이, 그녀의 미성이 정적에 잠긴 공터에 파열음을 일으켰다.

“……오랜만이야, 손도끼 공자.”

‘손도끼 공자’라 불린 사내, 그러니까 이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흥미 없다는 듯 슬쩍 동공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델핀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뿐.

흘러나오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어려 있었다.

“용건은?”

짧고 담백한 내용이었지만, 많은 사실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첫 번째, 용건이 있는 쪽은 델핀이었다. 그녀가 이안을 불러냈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귀찮은 기색으로 미루어 보아 이안은 그다지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델핀이 무언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델핀의 핏빛 눈동자가 진한 살의를 발했다. 그녀가 말했다.

“전해들은 대로야. 재결투를 요청하는 거지.”

“가문까지 들먹이면서?”

조롱하듯 내뱉어진 목소리에, 델핀은 눈을 감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대로였다. 델핀은 이안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이곳으로 불러낸 것이다. ‘유르디나’라는 이름까지 운운해 가며.

명예로운 행동은 아니었다. 그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델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괴로운 낯빛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가해자의 기분까지 맞춰 줄 생각은 없었던 듯했다.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추가타를 가했다.

“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쩔 수 없잖아!”

델핀은 더는 참지 못하고, 제 비겁한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강변을 시작했다.

그녀는 필사적인 눈빛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퀭했다. 외치는 목소리에는 울먹이는 기색마저 섞여 있었다.

델핀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 며칠간의 심경을 토로했다.

“누, 눕기만 해도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잠을 자려고 해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어난다고! 분하고 수치스러워, 가슴에 불길이 인 것만 같아… 술을 아무리 들이켜도 그 불꽃이 도무지, 도무지 꺼지지를 않는다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받아들여야지, 그게 패자의 의무니까.”

그 느긋한 말에 델핀의 눈동자가 사납게 변했다.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살려달라고 빌 때, 기분 좋았어?”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 금빛 눈동자에서는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델핀은 더욱 분했다. 그녀를 지난 며칠 동안 악몽에 빠트린 그날의 악몽이, 그에게는 기억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날 깨끗이 승복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면 이토록 수치스럽고 화가 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도끼로 어깨를 찍히고, 마지막 순간 어디에나 있는 계집애처럼 살려달라고 비명을 내질렀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광오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던 그녀였다. 그 상처를 계속 끌어안기에는 아직 패배의 경험이 부족했다.

“……오늘은, 살려달라고 빌지 않을 거야.”

그 각오가 서린 단단한 목소리에도 이안에게서는 아무런 표정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흔해빠진 조소나, 곤혹스러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는 평탄한 목소리로 되물었을 뿐이었다.

“애초에 내가 싸워야 할 이유가 뭐야? 그렇게 추하게 승리를 거둬 봐야, 자존심에 상처만 가지 않나?”

“추하든 아름답든, 승리는 승리니까.”

델핀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발검의 대기 자세였다. 어떻게 보면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 대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델핀 유르디나라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것이 비겁하든 어떻든, 이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토록 승리에 집착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첫 번째 패배조차도 충격적이었는데, 그 결과가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델핀은 그렇게 몇 번으로 스스로를 책망했다. 오랜 갈등의 결론이 지금부터 시작될 결투였다.

부끄럽긴 해도 이제 와서 물릴 생각은 없었다.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결투라면, 생사결?”

“당연히, 이따위 수치를 안고 사느니 죽고 말겠어.”

대가문의 후계자치고는 꽤 무책임한 말인데, 이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편안한 자세였다. 근육은 하나도 긴장되어 있지 않았고, 눈빛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잔잔했다.

그럼에도 델핀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몸을 긴장시켰다. 일전에 이안이 보여준 적 있었던, 소드 서클의 비기가 떠올랐다.

소드 서클의 몇몇 수련자들은 일부러 저러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드 서클의 검술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자세에서 쏘아지더라도 차이가 없었다.

즉, 저 자세에서도 얼마든지 치명적인 검격을 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델핀은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시야가 점차 명료해진다. 인식하는 범위가 좁아질수록, 그녀의 기감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상대는 강하다. 그 며칠 사이 수렵제의 우승 상품으로 받은 영약을 복용했다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때는 온갖 변수와 더불어 세리아에게 기습까지 당했다. 그러고도 이안은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쥐어야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녀를 단독으로 상대할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가문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단 둘이서만 만나자고 한 것이다.

치졸한 짓이었지만 델핀은 이미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 못할 짓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정적이 내려앉은 공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핏빛 눈동자와 금빛 눈동자가 서로의 움직임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아주 짧은 평화의 시간.

팟, 하고 델핀이 땅바닥을 박차고 나서며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각력에 투사되어 찢어발겨진 공기가 마구잡이로 비명을 내질렀다.

빠르다. 델핀은 승기를 직감했다. 그 어느 때보다 속도에 주안점을 두고 내달린 결과였다. 어느덧 그녀의 몸은 이안의 지척에 도달한 뒤였다.

찬란한 황금빛 오러가 그녀의 검에 응축되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며 주위를 왜곡시켰다.

그리고, 일섬.

횡으로 베어진 공간이 파직거리는 소음을 일으켰다. 그 속도와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대기의 흙먼지가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러나 감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델핀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그러나 정답은 멀지 않았다. 저 앞에, 보였다.

단 한 걸음 물러난 채로, 곧바로 검을 뽑으며 달려드는 사내의 모습이.

마치 야수와 같은 속도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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