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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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걸리는 감각이 없어 멍해졌던 델핀의 눈에, 그림자 하나가 비쳤다.
단 한 걸음 물러난 채로, 곧바로 검을 뽑으며 달려드는 사내의 모습이.
귀신같은 공간 감각이었다. 오러도 경지에 이르면 칼날의 길이보다 더욱 긴 범위에 상흔을 남기곤 했다. 당연히 거리를 재기는 더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이를 한 끗 차이로 피해냈다. 그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델핀은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멍하니 생각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사내의 신형이 엄습하고 있었다. 파고들기 전에 막아야 했다.
델핀은 걸음을 내딛으며 검을 내찔렀다. 폭사되는 금빛 검광이 일직선을 그렸다.
거리 감각을 혼란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그렇지 않으면 검을 거두는 데 급급하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다음 순간.
훅, 하고 델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델핀의 눈동자가 일순 멍청해졌다. 본능적으로 측면을 훑는 그녀의 눈동자.
그곳에서 사내가 검을 찔러 오고 있었다. 망설임조차 없는 찌르기, 달려오는 방향을 트는 전조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그는 어느새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델핀은 이를 악물고, 검을 내찔러 가던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허공에서 칼과 칼이 부닥쳤다. 불안정한 자세라 델핀의 검에는 전력이 담겨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캉, 하고 허공에 불꽃이 새겨지며 사내의 검이 튕겨 나갔다.
그때 델핀은 다시 발을 내딛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쇄도해서 해질녘의 연무를 추기 시작했다.
카각, 캉. 날과 날이 마찰하고 소름 끼치는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델핀은 우월한 신체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내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묘했다.
델핀이 한 걸음을 내딛어도, 그녀와 사내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반대로 뒷걸음질을 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석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일정 거리 이상으로 좁히려고 들면 척력이 발생하듯이, 그녀는 어느새 절묘한 거리 안에 있었다.
사내가 찌르고, 그녀는 막아낼 수밖에 없는 거리.
발재간이 제법, 이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온갖 강자들을 만나본 그녀조차도 이 수준의 보법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발놀림만으로 한정한다면 델핀의 완패였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공방이 이어지자, 어느 순간 델핀의 눈에 은은한 열기가 어렸다.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파고들어 주마, 델핀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무리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 찰나만큼은 틈을 내주게 되겠지만, 이를 반전시킬 기술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유르디나 비전 검술, 금사검(???).
사자의 손톱처럼 여러 개의 검로가 동시에 그려지는 기술이었다. 실초와 허초를 구분할 수 없는 검술이었고, 때로는 실제로 여러 개의 실초가 그려지기도 했다.
그녀의 이복동생 세리아는 아직 경지가 부족해 3개의 검로밖에 그리지 못하지만, 델핀은 무려 5개의 검로를 동시에 그릴 수 있었다.
그 정도라면야, 잠깐 주도권을 빼앗기는 정도는 얼마든지 무마가 가능했다.
결심을 마친 델핀의 행동은 빨랐다. 그녀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강제로 제 몸을 간격 안으로 밀어넣었다.
자연스레 이안은 다음 대응을 구상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델핀은 무작정 파고들고 있었고, 이안은 느긋하게 한 걸음 물러나는 것만으로 준비를 끝마칠 수 있으니까.
승부처였다. 델핀도, 이안도 이를 직감한 듯 눈동자가 깊어졌다.
찰나와 찰나를 쪼개는 시간, 델핀의 검이 좌하단을 찍었다.
황금의 검로를 그리기 직전이었다. 이안의 눈동자가 멈춘 시간 속에서 홀로 움직여 델핀의 검극 위치를 확인했다.
금사검의 준비 자세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알고 있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금사검이었다.
애초에 이안은 델핀이 억지로 간격을 파고드는 순간, 도리어 거리를 벌렸어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투척술에 조예가 있는 그가 아닌가.
차라리 변수를 만들어 델핀의 행동반경을 억제하는 편이, 더 승산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미 늦었지만, 델핀은 그렇게 희열이 담긴 눈빛으로 허공에 금빛 실선을 그렸다. 무려 다섯 개. 그녀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모든 검로가 박살나기 전까진.
델핀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 이안의 검이 좌하단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려지는 일곱 개의 은빛 실선.
델핀의 다섯 검로는 하나하나 격추되어, 남은 두 개의 검로가 그녀의 신체에 내리꽂혔다. 급히 마력을 일으켜 막아냈지만, 이미 치명타였다.
컥, 하고 핏물이라도 토해낼 듯 델핀은 숨 막히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이 최후였다.
폭음이 터져 나왔다.
압축되고 압축된 시간 속에서 무려 열두 개의 검로가 그려졌다.
주위의 대기가 엉망진창으로 찢겨 나갔고, 그 충격파를 오롯이 감내하기에 델핀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그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검을 회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박살난 오러를 덧씌우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충격파가 델핀의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곧바로 튕겨나가 땅을 굴렀다.
시야가 이리저리 반전되는 경험은, 델핀에게는 드문 것이었다. 그대로 공터 끄트머리의 나무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틀어박힐 때까지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질어질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본 것이 현실인지조차 긴가민가했다. 좌하단으로 떨어지는 검과, 그 직후 동시에 그어지는 여러 개의 검로.
금사검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비전 절기, 외인 따위가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사내가 그린 검로는 총 7개였다. 다시 말해 금사검에 관한 숙련도나 이해도 자체는 그가 더 높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델핀은 유르디나 가문의 적통이었으며, 정당한 후계자였고, 또 검술의 천재였다.
그러한 그녀조차도 아직 다섯 개를 그리는 데 그칠 뿐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그녀의 아버지나 일곱 개를 그렸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유르디나 후작은 마스터의 경지를 목전에 둔 어마어마한 실력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시야가 채 돌아오기도 전.
푹, 하는 소리가 그녀의 어깨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어쩐지 익숙한 감각이었다.
신경을 달구어진 쇠로 지지는 듯한 통증, 도끼날이 그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흐으… 끄으윽!”
델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손에 쥐고 있던 검마저 놓쳐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다시 검을 쥐려고 했다. 이를 악문 그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대로 패배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잔혹했다.
팍, 하고 날아온 칼날이 그녀의 나머지 어깨에 쑤셔 박혔다.
느닷없는 고통이었다. 제대로 돌아오지도 않은 시야로 땅바닥을 더듬거리며 기던 델핀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흐으, 끄으… 꺄아아아아악!”
참고 참았던 비명이었다. 델핀이 내지른 소리는 길고 높았다. 고통을 참느라 이를 너무나 악물었던 탓에, 지쳐 버린 턱 근육이 덜덜 경련했다.
델핀의 시야가 흐릿하게 뜨였다. 그녀는 흐으, 흐으, 하고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서, 저승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주홍빛으로 타는 해질녘의 노을을 배경으로, 사내는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델핀의 청각을 자극하며 공포를 고조시켰다.
무감정한 금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은 채였다.
마치 델핀과의 승부쯤은 별 거 아니었다는 듯.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델핀 유르디나, 아무래도 오해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다가온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어깨에 틀어박힌 도끼 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일말의 배려조차 없이 거칠게 뽑아버렸다.
“끄으, 꺄으으윽……!”
델핀은 입술을 짓씹으며 비명을 참아내려 했지만, 새어나오는 신음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사내는 서슴없이 도끼로 그녀의 종아리를 내리찍었다.
팍, 하고 터지는 핏물.
여인의 손이 절로 제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몸을 웅크리면서, 고통을 호소하듯 꿈틀거리는 처량한 여체.
“흐으, 끄으…아으으으윽……!”
“나는, 네 알량한 협박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야.”
그 모습을 보고도 사내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고저가 없었다. 단지 무릎을 굽히고, 델핀의 머리채를 붙잡아 강제로 눈을 마주쳤을 뿐.
고통과 눈물로 범벅이 된 눈동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내는 덜덜 떨리는 여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왜, 유르디나 따위를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지?”
그 목소리에서는, 한 점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델핀은 통증과 공포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진짜로 유르디나 가문이 무섭지 않은 것이다.
아주 조금조차도.
델핀의 안색이 창백히 질렸다.
그것을 신호로, 또 다시 도끼가 그녀의 종아리 근육을 쪼갤듯이 내리쳐졌다.
핏물과 함께 여인의 비명이 허공을 수놓았다.
델핀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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