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89화 (89/649)

〈 89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0)

* * *

도끼가 은빛 실선을 긋는다. 그럴 때마다 터져 나오는 신음과 핏물.

날붙이가 직격할 때마다 델핀은 처량한 비명을 내질렀다.

몸을 웅크리고, 꿈틀거리며 최대한 고통을 참아내 보이기도 하고, 이도 악물어 보았지만 날 것의 통증은 도저히 참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꺄으, 흐으… 아아아아악!”

어느덧 델핀의 팔다리 중에는 멀쩡한 곳이 하나 없었다. 살갗을 꿰뚫은 도끼날은 근섬유마저 찢어발겼고, 몇몇 상처에는 새하얀 뼈가 드러나 있을 정도였다.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어깨뿐만 아니라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난자당했다. 줄줄 흐르는 핏물만으로도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이 유력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바늘처럼 델핀의 척수를 찌르고 올라왔다. 비명을 내지르던 그녀는 이제 그마저도 지쳤는지, 헐떡이며 이안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망설임이나 괴로움 따위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희열이라도 감돌았으면 좋겠는데,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델핀은, 풀린 동공을 하고도 그것이 못내 두려웠다.

마치 스스로가 도살장의 가축이라도 된 것 같아서.

도축장의 백정들이 가축의 뼈와 살을 가를 때 저러한 표정을 하고 있을 터였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단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표정.

“흐으, 으… 주, 죽여…….”

지나친 고통에 새된 소리를 내지른 대가로, 그녀의 목은 어느덧 쉬어 있었다.

자신만만하고 도도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여인은 단지 애처로운 표정으로, 하도 이를 악물어 덜덜 떨리는 턱 근육조차 진정시키지 못하며 애원할 뿐이었다.

죽여 달라고.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귀족의 명예를 걸고 한 생사결이었다. 죽음 따위는 각오했다.

일대다도 아니고, 일대일로 싸워 패배했다. 검사로서도 귀족으로서도 완패였다. 그녀는 수치를 감내할 바에 차라리 죽기를 택했다.

사내가 조금 더 자애로운 상대였다면, 델핀이 패배를 시인한 순간 더 이상의 폭력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델핀이 이미 경험한 바 있듯 이안은 ‘자애’라는 낱말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무자비하다. 오히려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이안이 검사로서 가진 장점이었다.

서슴없이 폭력을 사용하고, 제 몸이 다치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 승리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과 야수와도 같은 전투 감각은 실전에서 수많은 변수를 탄생시킨다.

어찌 보면 델핀과 이안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다만 델핀이 만사에서 승리를 추구한다면, 이안은 칼을 뽑았을 때만 승리를 추구했을 뿐.

만약 또 하나 비슷한 점을 찾아본다면, 패배자에게는 어떠한 동정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일 터였다.

바로 지금처럼, 델핀의 애원을 들은 사내의 도끼질이 멈칫했다.

“……죽여 달라?”

“그, 래… 흐으, 끄… 차, 차라리 죽여…….”

이안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델핀은 흐느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그렇게 간원했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는 고문에 가까운 통증과 출혈에 혼탁해진 지 오래였다.

쉬고 싶었다.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최후의 순간까지는 존엄하게 있고 싶었다. 상대가 다른 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안 페르쿠스라는 인간은 애초에 유르디나 가문을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후과를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는 인간은 아니었다. 델핀은 그 점에 희미한 기대를 걸고, 이안에게 애걸했다.

“어, 어차피… 흐, 주, 죽일 생각이었잖아? 그, 렇다면 차라리 빨리…….”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잠시 측면을 향했다. 고민에 잠긴 듯했다.

“부, 탁… 부탁이야… 너, 너무 아파. 흐, 흐으윽… 끄으…….”

델핀의 눈가에 맺힌 이슬이 방울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핏물에 흥건히 젖은 그녀의 몸뚱아리 중에서, 유일하게 맑은 액체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이안의 침묵은 짧았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일 생각은 없는데.”

그 말에, 흐느끼던 델핀의 울음소리가 일순 멎었다.

풀려 있던 핏빛 눈동자에 빛이 되돌아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이안을 향했다.

살려준다고?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긴 했다. 제국의 5대 명문가는 제국 황실을 제외한 누구 앞에서도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귀족의 명예를 건 결투라도 후계자를 죽이는 것은 두고두고 후환으로 남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델핀에게 깔끔한 승복을 이끌어 내고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낫겠지.

문제는, 지금 그 말을 뱉은 상대가 그러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재단할 수 없다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면 델핀이 이 꼴이 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제 그녀의 몸에는 성한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지의 힘줄이 찢겨나갔다. 바둥거리고 싶어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웅크리는 것만이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이미 선을 넘은 지 오래였다. 혹시, 생명을 미끼로 델핀에게 협상을 거는 것일까.

델핀의 눈동자에 희미한 기대가 걸렸다.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거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것은 동등한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다.

즉, 델핀의 자존심과 목숨을 모두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감돈 순간.

콰직, 하고 이안의 도끼가 다시 델핀의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생각지도 못한 통증에 델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끄으으, 아으, 아아악……!”

“……죽음은 꽤 사치스러운 최후거든.”

그러면서 그는 옷깃으로 도끼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그 탓에 옷에 핏자국이 남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그의 제복은 델핀에게서 튄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이안은 도끼를 허리춤에 매달고, 아직까지도 델핀의 어깨에 박혀 있던 칼을 뽑아냈다.

“아으으, 꺄악!”

핏물이 울컥, 하고 흘러넘쳤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정도의 출혈량이었다. 하지만 델핀과 같은 초인에게는 죽음조차 다가가기를 꺼린다.

언젠가 죽긴 하겠지만, 아직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력이 전력을 다해 핏물을 생산하고 있을 테니까.

이안은 피로 물든 칼날에 오러를 덧씌웠다.

은빛 오러가 점차 응집되더니, 서늘한 예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백열하는 칼날이 지상에 강림한 달처럼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델핀의 눈이, 다시 멍청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저 오러의 응집도는, 아무리 마력이 많다고 해도 재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최소한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나 최상급.

다시 말해 델핀의 수준에 이른 검사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였다. 그러나 상대는 이를 무리 없이 재현해내고 있었다.

이안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다시 물끄러미 델핀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눈동자와 핏빛 눈동자가 마주치자, 사내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유르디나, 알고 있겠지? 마력에 의한 상흔은 신성력으로도 치료하기 힘들다는 걸. 물론 아카데미에는 고위 사제들이 있어 어지간하면 괜찮겠지만…….”

그 말을 들은 델핀의 눈동자가 다시 이안이 든 칼날을 향했다. 찬연한 은빛을 뿌리고 있는 오러, 누가 보아도 순도 높은 마력이었다.

저 정도라면, 아무리 고위 사제라도 완치시킬 수 없었다. 후유증이 남을 터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델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 오러로 팔을 쑤시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다리는?”

“뭐, 뭘 하려는 거야.”

델핀의 목소리는 공포로 흥건히 젖어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이 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토록 그녀를 괴롭히던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좁아진 느낌이었다. 오로지 그녀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금빛 눈동자만이 세상에 존재했다.

무서웠다. 델핀은 오들오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그래도 성녀가 있으니 일상생활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니지… 제물이 있으니 다져놓다시피 해야, 앞으로 검을 들 수 없으려나?”

그 말이, 송곳처럼 델핀의 뇌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녀는 숨을 들이킨 채 얼어붙고 말았다.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다니,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평생을 매진한 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검술이란 들숨과 날숨과도 같았다. 삶과 결부되어 있어, 그것이 사라진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검을 휘두르며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그 길만을 걸어오며 살아왔는데.

그런데 그 검을, 내 평생을 빼앗아 가겠다고.

델핀의 머리가 새하얗게 표백됐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허감과, 그 뒤를 잇는 공포가 홍수처럼 가슴에 넘실거렸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싫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리까지 다져놓으면 되겠지. 유르디나의 재력을 동원하면, 그래도 어떻게든 걸을 수는 있을 거야.”

“그, 그만…….”

델핀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젖어 애처롭게 경련했다. 그러나 사내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우선은 어깨 연골을 박살낼 거야. 그 다음에는 손목 힘줄.”

“그만해애…….”

“검을 들지 못해도 재산은 충분하니, 일평생 편안히 지낼 수 있겠지. 이만하면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나쁘지 않은 거래…….”

“……그만!”

결국 델핀은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 비명만큼은 저잣거리의 계집아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진홍빛 눈동자.

항복 선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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