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1)
* * *
“……그만!”
결국 델핀은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울먹거리는 눈동자가 이안을 향했다. 그는 입을 다문 채로, 무슨 일이냐는 듯 델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델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꿈틀거리면서,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뒤집었다. 피에 젖은 흙냄새가 비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검만큼은, 검만큼은 잃을 수 없었다. 지금껏 그녀가 갈고 닦아온 모든 것이었으니까.
여인의 처절한 애걸이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줘.”
굴욕적이었다. 수치심으로 눈시울이 붉어졌고,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다시는 검을 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컸다.
델핀은 반응이 없자 더욱 초조해졌다. 그녀의 입이 더욱 비굴한 말을 저도 모르게 읊기 시작했다.
“요, 용서… 용서해줘, 제발 부탁이야. 파, 팔만큼은…….”
“무릎 정도는 꿇어.”
싸늘한 목소리에, 델핀의 눈동자가 멍하니 위를 향했다. 사내의 적막한 금빛 시선이 그녀를 꿰뚫기라도 할 듯 내리꽂히고 있었다.
“귀족의 대결이야, 그리고 생사결이고. 네 목숨 값이 그 정도밖에 안 돼? 무릎이라도 꿇고, 제대로 성의를 보이라고.”
델핀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절절한 진심이 묻어나오고 있어 감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땅을 기면서 애걸하지 않았느냐고, 내 자존심은 이미 박살날 대로 박살나지 않았으냐고.
당신에게 다시는 대들 수 없을 만큼 산산조각 내놓았는데, 아직도 부족하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안이 다시 검을 치켜든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아등바등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깨가 반쯤 박살나고, 힘줄도 끊겨 운신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마력을 동원하니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었다.
다만 그 속도는 현저히 느렸다. 나름대로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델핀은 이안이 그새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입술이 잘근잘근 씹혔다. 울컥, 하고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이미 자존심 따위는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굴욕감으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잘못…….”
“다시.”
델핀은 이를 악물었다. 무릎까지 꿇지 않았냐고,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사나운 기세로 고개를 치켜든 그때, 델핀은 다시금 그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말았다.
한 점의 흔들림조자 없었다.
사내는 진심이었다. 만약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를 태세였다.
그리고 델핀의 팔과 다리를 다진 고기처럼 만들어 버리겠지. 앞으로는 검을 쥘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부상을 남기기 위해서.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 델핀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그녀는 얼른 다시 고개를 쳐박고, 그 명민한 두뇌를 필사적으로 굴려 무엇이 문제였는지 파악해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공손한 어조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주, 주제도 모르고… 흐윽.”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가고 싶었는데, 흐느낌이 섞여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이안은 그것까지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단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 델핀의 입에서, 수치와 굴욕으로 범벅이 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덤벼서… 흑, 그, 그러고도… 흐으윽, 모, 목숨을 구걸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머리를 조아리며, 델핀은 이안의 발끝에 이마를 찧었다.
신하가 황제에게 보이는 예였다. 대단한 굴욕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델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부, 부디 자비를. 흐윽, 베풀어 주세요… 흐어엉…….”
흐느낌은 곧 울음소리로 화했다. 한동안 델핀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이안은, 그제야 서서히 검에 맺힌 오러를 거두어들였다.
울고 있는 여인을 발아래에 두고, 이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델핀 유르디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델핀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안 또한 돌아오는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몇 마디를 홀로 이어갈 뿐이었다.
“그동안 너무 좁은 세상에서 살았어. 유르디나 가문도, 아카데미도 세상은 아니야. 바깥에는 온갖 강자들과 괴물이 넘쳐나지.”
스릉, 하고 칼날이 검집 안을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투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대수해의 흡혈귀를 상대해 본 적이 있나? 악신과 계약한 마인들은? 또 제국과 성국, 열왕국 사이에서 암약하고 있는 암흑교단의 사제들은 어떻고?”
그는 그러면서 등을 돌렸다. 이제 떠나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당하면, 목숨을 잃거나 평생 검을 못 잡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상대를 가려가며 덤비는 편이 좋을 거야.”
델핀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서는, 등 뒤를 흘깃 쳐다보는 금빛 눈동자가 허공에 빛을 박아 넣고 있었다.
“……다음은 없다. 물론, 오늘 살려준 목숨 값은 따로고.”
그 말을 듣고 델핀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세차게 떨렸다.
사내는 그렇게 떠나갔다. 마지막 말만을 남기고.
“귀족이니까, 포션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 사람은 불러두겠어.”
마수가 오면, 알아서 하든지.
그 무심한 한 마디를 끝으로 그날의 해가 저물었다.
사내가 떠나간 뒤에도 델핀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였다. 단지 수치와 굴욕을 곱씹으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을 뿐.
그녀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
“죄송하지만, 유르디나 님께서는 면회를 거부하고 계십니다.”
신전 앞, 나는 오늘의 당번인 듯한 신학부 학생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도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집중치료실에 입원할 수준의 부상이었다. 델핀 선배가 ‘나’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건 명약관화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델핀 선배와 같은 실력자를 집중치료실에 입원시키다니, 미래의 나는 무슨 마스터(master)라도 되는 걸까?
시시한 망상이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마스터라고 하면 대륙에서 견줄 자가 없는 강자들이었다. 무도나 마도의 길의 극한에 이르러 그 자체로 세계의 법칙을 비트는 존재들.
조건만 갖춰진다면 군단 하나를 동원하더라도 쓰러트릴 수 없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제국의 검공.
성국의 성자.
남부 열왕국의 대마녀.
현존하는 대륙의 마스터는 이 셋뿐이었다.
일단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강자가 길게는 수백 년을 살아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스터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내게는 그만한 재능이 없었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검재(??)가 가장 뛰어난 세리아나 델핀 선배조차도 마스터에 경지에 도달할지 알 수 없는 판국이었다. 만약 내게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면, 3학년 검술학부 수석쯤은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내가 홀로 피식거리며 웃고 있자, 신학부 학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눈빛이었다.
그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한 번 내 고민이 깊어졌다.
어떻게 해야 델핀 선배를 만날 수 있을까.
구질구질한 사정을 설명해 봐야 믿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미래에서 온 내 영혼이 잠시 내 몸을 차지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한다니.
그 자리에서 나를 입원시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델핀 선배의 마음을 돌리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럴 만한 방법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종이와 필기구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신학부 학생은 여전히 내가 미심쩍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최근 아카데미에 내 명성이 높아진 덕일까, 그는 곧 내 말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려니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가 손바닥 크기의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나는 종이에 펜으로 슥슥 문장을 하나 적어내고는, 그대로 두 번 접어 신학부 학생에게 건넸다.
“이 쪽지를 델핀 선배에게 전해주시겠어요? 제가 보냈다고 하면 알 겁니다. 그런데도 면회를 받지 않겠다면, 포기하죠.”
신학부 학생은 얼떨떨한 눈치였지만, 일단 내 말을 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가 곧 신전의 기나긴 복도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되돌아온 그는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는 감탄하며 내게 말했다.
“유르디나 님께서 면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측근들조차 들여보내지 않으셨는데, 도대체 무슨 수를 쓰신 거죠?”
“하하하, 비밀입니다.”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사내의 질문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 쪽지에 쓰인 문장이 그런 내용이라는 것을.
‘또 쳐맞기 싫으면, 면회 받아요.’
그것이 내 최선이었다. 설득은 길고, 협박은 짧았으므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신학부 학생의 안내를 따라 델핀 선배의 병실로 향했다.
부디 너무 심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투과해 들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방,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나도 몇 번이고 들린 바 있고, 병문안으로도 온 적이 있었으니까.
그곳에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상반신을 일으킨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델핀 선배였다.
내게는 여러모로 악연이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협력을 구해야 할 입장이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저, 델핀 선배?”
그제야 여인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갔다. 그리고 나를 향한 채로, 핏빛 눈동자는 몇 초간 멍하니 가라앉아 있었다.
드디어 그녀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