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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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머리카락에 핏빛 눈동자, 그리고 새하얀 피부까지.
오똑한 콧날과 강렬한 색채를 발하는 동공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유전과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차라리 ‘조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미모가 인상 깊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북방계 미녀.
그녀의 이름은 ‘델핀 유르디나’였다.
갸름한 턱선과 꼿꼿한 눈매는 그녀의 드센 성정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귀족 영애다운 외모였다.
그러나 지금, 명문가의 후계자로서 늘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무기력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힘없이 살짝 벌려진 입과, 흐리멍덩한 눈동자. 나를 마주하고 있는 델핀 선배의 몰골이란 그랬다.
그렇게 몇 초간 빛이 사라진 동공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던 그녀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감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 핏빛 눈동자에 처음으로 스친 감정은, 놀람.
그리고 뒤를 이어 수치와 공포, 절망 등이 응어리지며 눅진한 침전물을 이루었다. 꿀처럼 권태가 흘러내리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제 아픔만이 남아있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델핀 선배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녀는 약간의 물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왜 왔어?”
나는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말해서 돌려줄 만한 대답이 없었다.
그럴싸한 용건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델핀 선배와 ‘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그 전말을 듣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러한 질문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은 불가능했고, 자연스레 대화를 유도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델핀 선배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그것이 가능할까 싶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녀가 내게 보이는 감정은 온통 부정적인 것밖에 없었다.
곤란했다. 하하호호 웃으며 잡담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에 그녀와 난 이미 너무 머나먼 길을 걸어온 듯했다.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병문안도 오면 안 되는 사이였습니까?”
“……그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였다. 델핀 선배의 어깨가 옅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홍빛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델핀 선배의 눈동자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이나 분하고 수치스럽다는 뜻이었다.
내가 아는 델핀 선배는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강함을 숭상했고, 약자처럼 보이기를 경멸하는 철의 여인이었다.
다시 말해, 저 눈물은 증거나 다름없었다.
델핀 선배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는 증거.
자존심이든, 정체성이든, 그 무엇이든 엉망진창으로 짓밟힌 자만이 저렇게 처연한 얼굴을 할 수 있었다.
내게 하소연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애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를 비웃으러 온 거야? 네가 짓밟아 버린 인간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아니,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듯한데…….”
“아니면 왜? 혹시나 내가 또 주제 파악 못하고 너한테 보복이라도 하려 들까 봐?”
하, 하고 델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구슬프기 짝이 없었다. 델핀의 물기 어린 눈동자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먹으로 이불을 꼭 쥔 채, 그녀는 한동안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게 날카롭게 쏘아보려다가, 이내 나와 눈을 마주치자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는 제 모습이 더욱 처량했는지, 델핀 선배는 얼른 소매로 제 눈가를 닦아냈다.
훌쩍이는 소리를 애써 참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가냘픈 소녀를 닮아있었다. 이내 중얼거리듯 흘러넘치는 말소리.
“……걱정하지 마, 이제 그럴 생각 없으니까.”
델핀 선배는 그러면서 시선을 돌렸다. 차마 나를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네가 다 박살냈잖아? 내 자부심, 자존감, 그 모든 걸… 이젠, 되찾고 싶은 자존심도 없어.”
그만큼이나 처참히 당한 걸까.
나로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괴로운 눈빛을 보자 그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여인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내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어깨를 잘게 떨고 있다니.
델핀 선배는 눈물이 뚝뚝 흘리는 제 모습이 분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몇 번이고 눈가를 닦아냈다. 그래도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평생을 승리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패배의 충격은 그토록 극심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 팔짱을 낀 채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나 아픕니까?”
“당연히……! 아, 아프지.”
울컥해서 나를 노려보려던 델핀 선배였지만, 내 눈을 마주하자마자 겁먹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고작해야 시선을 피하며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것이 한계였다.
그래도 워낙 내면이 강한 여자인 덕인지, 엘시 선배처럼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듯했다. 아직도 발끈하면 나를 노려볼 정도의 용기는 존재했다.
단지 그 용기가 오래 가지 않을 뿐, 델핀 선배의 루비를 닮은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내 시야가 흘깃 델핀 선배의 팔을 담은 것은 그때였다.
다시 한 번 살펴보니, 델핀 선배의 팔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목도 마찬가지였다. 하반신은 이불에 가려져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전신에 부상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집중치료실에서 며칠 동안이나 나오지 못할 수준의 중상이었다. 내 팔도 하루만에 완치됐던 전례를 고려하면, 팔다리가 모두 아작이 났다는 추론이 합리적이었다.
충격적일 만도 했다. 그만큼 처참한 패배는 당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최소한 제국 5대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그러한 패배를 당할 일은 드물었다. 그것도 최고학년에 이르러 수석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아카데미의 후배에게 그런 꼴을 당하다니.
죽고 싶겠지, 언제나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던 그녀였다. 그 낙차가 클수록 견디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그래, 머리로는 납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묘하게 지금의 델핀 선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시울을 붉힌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비련의 여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하는 꼴이 왜 이토록 기분이 나쁜가.
그 대답은 얼마 가지 않아 도출되었다.
나는 짜증이 담아, 델핀 선배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
델핀 선배의 눈동자가 다시 멍하니 나를 향했다.
위로나 동정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면전에서 타박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듯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던 세계였다.
유르디나 가문과 아카데미에서는 여왕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한 티를 내면 주변 사람들이 허겁지겁 수습을 해주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델핀 선배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어긋난 관계, 괜히 겉치레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이어지는 내 목소리에 숨김없는 진심이 담긴 이유였다.
“세리아를 괴롭힐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잖습니까. 그거 알아요? 세리아는 어머니 이야기만 하면 운다는 거. 그런데 이복언니란 인간이, 이기고 싶다고 멋대로 왕따를 주동해요?”
“그, 그건…….”
델핀 선배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할 말이 없는지 황급히 내 시선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내 머리에 점점 더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세리아의 눈물은 아무렇지도 않고, 고작 몇 번 쳐맞았다고 질질 짜면서 피해자인 척 하지 맙시다. 그리고 수렵제 때도 말인데, 마수 사냥으로 지친 후배들 먼저 뒤통수 친 것도 델핀 선배 아닙니까?”
“고, 고작이 아닌데…….”
델핀 선배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 소심한 속삭임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인상을 팍 구기며 되물을 뿐이었다.
“……고작이 아니면, 뭔데요?”
내 싸늘한 질문에, 델핀 선배는 더더욱 위축되어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긴 했다. 그러나 은은한 열기로 타오르는 내 눈동자를 볼 때마다, 델핀 선배는 공포에 젖어 내 시선을 피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델핀 선배가 맞아봐야 얼마나 맞았겠는가.
끽해야 팔다리에 칼침 한 방씩 맞은 수준이겠지, 그 정도로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다진 고기가 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면 또 몰랐다. 하지만 잔혹성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엘시 선배조차도 그토록 참혹한 짓까지는 저지르지 않는다.
즉, 델핀 선배가 그러한 꼴을 당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뜻이었다.
이를 확신한 내 입이 연달아 언어로 된 화살을 쏘았다.
“두 번입니다. 딱 두 번! 집중치료실 신세는 델핀 선배만 진 줄 아세요? 저도 몇 번이고 패배해 봤습니다. 그렇게 발버둥을 쳐도 이기지 못할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고작 두 번 패배한 정도로 엄살을 부립니까?”
“아, 아니이…패배가 아니라 그 후에 있었던 일이 문제…….”
“그만!”
나는 힘 있게 고개를 내저으며 델핀 선배의 말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내가 강하게 나오자 우물쭈물하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나마 순종적인 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핑계는 듣고 싶지 않아요. 아무래도 델핀 선배에게는 정신 개조가 필요할 듯 싶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품속에 손을 넣자, 델핀 선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그녀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바들바들 떨리는 외침이 그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 그러지 마아… 이, 이제 다시는 덤비지 않겠다고 했잖아! 무릎까지 꿇었잖아!”
그러나 내 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저벅저벅 걸어, 어느새 나와 델핀 선배의 거리는 지근거리.
델핀 선배는 그 인기척을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비명이 이어졌다.
“또, 또 시건방지게 굴어서 그래? 자, 잘못했어요… 아, 안 그럴 테니까 제발… 다진 고기만큼은 제발……!”
품을 뒤적이던 내 손이 쾅, 하고 침대 옆의 탁자를 두드렸다.
델핀 선배는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제, 제발 내게 검만큼은 빼앗지 말, 아……?”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내질러도 그녀의 몸에 폭력이 가해지는 일은 없었다. 한동안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덜덜 떨고 있던 델핀 선배는, 이내 의아한 눈빛으로 이불을 살짝 거두었다.
루비를 닮은 진홍색 눈동자가 빼꼼이 드러났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내 손바닥이 내리친 침상 옆의 탁자를 향했다.
그곳에는 서류가 한 장 자리하고 있었다.
성녀에게서 받은 고아원의 목록이었다.
그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델핀 선배의 눈이 물끄러미 나를 향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다음 실습 파견 예정, 비어 있죠?”
“네, 넷… 이, 일단 그런데요……?”
너무 겁을 먹은 탓인지 느닷없는 존댓말을 쓰고 있는 점이 거슬리긴 했다. 하지만 이를 지적해 봐야 그녀의 상태가 더 나빠질 것은 뻔했으므로, 나는 담백하게 본론만을 내뱉었다.
“그럼 함께 갑시다.”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된 델핀 선배에게, 나는 다시 한 번 강하게 제안했다.
“저와 함께, 2주만 함께 지내봅시다.”
그 말을 들은 델핀 선배의 표정은, 뭐라고 할까.
몇 달을 고생한 논문이 파쇄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마법학부 대학원생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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