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92화 (92/649)

〈 92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3)

* * *

델핀 선배의 설득 작업은 무사히 끝났다.

그녀는 애처롭게 떨리는 눈동자로 내게 무언의 애원을 보냈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어 거부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행을 강요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델핀 선배의 의견을 존중했다. 비록 내 가슴속에는 그녀와 함께 인격을 도야해야겠다는 열정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지 나는 그녀에게서 확답을 얻어낼 때까지 몇 번이고 채근했을 뿐이었다. 울상을 짓던 델핀 선배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고 말았다.

“흐으윽, 갈게… 가, 가면… 흑, 되잖아아……!”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리다니, 나는 결국 그녀의 진심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바뀌고 싶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흔들릴까 싶어 여러 번 그녀에게 되물었지만, 그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유르디나 가문의 명예까지 걸었으니 이제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흐느끼는 그녀를 둔 채, 나는 병실을 나섰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신전의 복도는 싸늘했다. 그 차가운 공기를 맞으니 내 머리도 조금 식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문득 내게 위화감이 하나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델핀 선배는 진심으로 기뻐서 울었던 걸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고, 나로서는 델핀 선배라는 강력한 전력을 얻을 수 있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실습 파견 또한 4인이 1조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난 수렵제 조를 그대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셀린과 세리아가 아직 2학년이라는 점이었다.

2학년은 원칙적으로 실습이 금지되어 있는 학년이었다. 물론 지도교수의 허가 하에 특별히 실습 파견에 합류할 수는 있지만, 나나 델핀 선배처럼 실습으로 성적을 대체할 수 없는 이상 기말고사 기간에 그 둘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성적에 악영향을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셀린은 미래에 하스터 가문을 부흥시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세리아의 어깨 위에는 검술학부 수석의 자리를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얹혀 있었다.

그 둘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제일 아끼는 후배 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물론 델핀 선배도 검술학부 수석의 자리를 지키긴 해야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본판은 워낙 유능한 인물이니 한 자락 숨겨둔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아직 델핀 선배와 내 거리감은 애매했다.

자주 보긴 했는데, 하도 악연으로만 얽히다 보니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사실 델핀 선배에게 실습 합류를 제안한 것도 다소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듣고 싶었는데, 정작 그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래도 기회는 많으니 다행이었다. 2주 동안 실습 파견을 나가다 보면, 좋든 싫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발걸음을 떼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문득 내 시야에 빛이 가득 차올랐다. 고귀한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진 듯 눈에 띄는 연분홍색 눈동자.

성녀였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나와 병실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델핀 자매님은, 모든 면회를 거절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직 오해를 풀지 못한 탓인지 성녀의 태도는 까탈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로서도 불편한 상대였다. 얼굴만 마주했을 뿐인데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사정이 있습니다… 그보다, 아직도 제가 의심스러우십니까?”

“……하, 당연하죠.”

성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유렌은 어떻게든 속여 넘긴 모양이지만, 저는 달라요. 성국의 사제들은 영혼의 색을 볼 수 있는 영안(??)이라는 것을 가지거든요. 당연히 성녀인 만큼 제 영안은 꽤 믿음직한 정확도를 자랑하죠.”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잠겼다. 어디선가 들어본 내용이긴 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정보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얼마간 지나간 기억을 되짚던 나는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거, 마인도 제대로 분간 못하는 거 아닙니까? 그다지 의미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다. 그 ‘영안’이란 능력이 그토록 신통방통했다면 나도 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터였다. 하지만 알려져 있기로 그 영안이란 그다지 유용한 힘이 아니었다.

영혼의 색이라 해봐야 혼탁한 색의 집합체가 일렁이는 수준에 불과했다. 아무리 잘 분간하려 해도 제대로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영안의 소유자에 따라 같은 인간이라도 영혼의 색이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다.

만약 영혼의 색을 분간할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하고 전수해서 발전시켰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영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 어떠한 정형화된 구별 기법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영혼의 색을 구분하는 훈련을 받는 전문 인력이 있다고는 들었다. 성국의 이단심문성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이들이라는데, 그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영안은 없다시피 한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하다못해 마인조차 걸러내지 못할 정도였다. 악신과 계약한 인간의 영혼은 혼탁해지는데, 대개의 인간은 원체 혼탁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이를 구분하기가 까다로웠다.

그러나 내 의문에도 성녀는 당당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녀가 우쭐해서 어깨를 피자, 그녀의 존재감 있는 젖가슴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야말로 죄 많은 육체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성녀의 음란한 몸뚱아리를 대신해 천신께 참회했다.

“제 영안은 조금 달라요. 보다 명확한 색이 비치거든요. 물론, 자세한 차이까지는 잡아낼 수 없지만 동일인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어요.”

“그래서,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동일인입니까?”

“네, 그럼요.”

성녀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그만큼이나 자신만만하다는 뜻이었다.

하기야 그 말이 옳기도 했다. 레토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의 나는 미래에서 온 ‘나’라고 들었으니까.

솔직히 그다지 실감이 나진 않지만 레토의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내 지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 인물이 레토였다.

성녀의 증언도 그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눈, 너무 믿다간 언젠가 큰 코 다칠 겁니다. 사람 보는 눈은 몇 번을 의심해도 모자라지 않거든요.”

“흥, 남이사.”

그러나 성녀는 괘씸하게도 내 진심이 담긴 조언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하듯 두 손을 펼친 채, 살짝 연분홍빛 혀를 내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베, 하는 소리.

나는 그 말랑거리는 살점을 쭉 잡아당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곳은 신전이었으니까. 괜히 천신의 가장 사랑받는 처녀를 건드렸다가 벌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애써 가슴을 가라앉히며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내가 잠시 그녀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사이, 성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검지가 턱을 톡, 톡, 두드렸다.

“그런데 델핀 자매님과 사정이 있다뇨? 수렵제의 악연이 기연이 됐을 리는 없을 테고… 혹시 델핀 자매님을 저렇게 만든 게 당신이라도 되나요?”

그러면서 성녀는 본인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다는 듯, 푸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기야,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러지는 않았겠죠.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고문에 가까운 흔적이에요. 우선 제압을 끝마친 다음, 지속적으로 고통과 공포를 각인시킨 거죠. 무척이나 악질적인 방, 법… 인데……?”

하지만 내 침묵이 길어질수록, 성녀의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성녀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졌다.

“……설마.”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는 믿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싶어 투항의 의미로 두 손을 들었다.

“우선, 믿어주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제가 정상이 아니었어요.”

물론 성녀의 표정은 조금도 온화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경멸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더니,

“……쓰레기.”

마찬가지로 경멸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남기고 떠나갔다.

참 인간관계라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찾아가야 할 곳이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

길을 가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오랜만에 엠마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이제 곧 실습 파견이니 안부도 물을 겸, 그리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일곱 죄악을 상징하는 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였다.

그때 엠마의 말에 따르면, 그 일곱 별의 힘이 있다면 시간을 역행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했다.

다만 지금껏 단 한 명도 그 별들의 힘을 빌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일곱 별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유력한 가능성이었다. 그 외에는 애초에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미래에 대해 골몰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던 나는, 곧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에서 낯익은 두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셀린과 세리아였다. 일단그 둘은 함께 걷고 있었었다. 다만서로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무표정한 얼굴로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그토록 냉랭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까지 함께 다니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좋아하는 두 사람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내 손이 절로 하늘을 향했다. 내 입이 두 소녀를 호명했다.

“셀린, 세리아!”

그러자 화들짝 놀란 두 여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둘의 얼굴에도 대번에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셀린과 세리아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내게 다가섰다.

“이안 오빠!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이안 선배… 보, 보고 싶었어요.”

셀린의 활달한 목소리와, 세리아의 부끄러워하는 목소리가 내게 동시에 쏟아져 내렸다.

그 둘이 나를 찾고 있었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서 나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셀린과 세리아는 자랑스럽다는 듯 문서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실습 파견 허가서’, 이를 읽은 내 눈동자가 멍하니 셀린과 세리아를 시야에 담았다.

“기말고사 대체 실습, 나갈 거지? 우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함께 지도교수님을 설득했어!”

“그, 이, 이안 선배헤! 으으… 이안 선배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언제나 그렇듯 당당한 셀린과, 혀를 씹는 세리아가 귀여워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운 후배들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 미리 서류를 구비하다니.

그래서 나는 더더욱 두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고개가 서서히 내저어졌다.

“아니, 필요 없어.”

“……응?”

이제 셀린과 세리아의 눈빛이 멍청해질 차례였다. 황갈색 눈동자와 푸른색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래서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구했거든, 전위.”

두 여인의 낯빛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혹시나 그 둘이 걱정할까 싶어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델핀 선배가 함께 가기로 했어. 너희도 알지? 그 여자.인성은 별로지만, 실력은 최고잖아. 그러니까 너희까지 합류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침묵.

황갈빛 눈동자는 싸늘해지고, 짙푸른 눈동자는 심해로 가라앉듯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대기가 빠르게 열을 토해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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