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4)
* * *
셀린과 세리아는 잠깐의 소란 끝에 떠나갔다.
마지막까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셀린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볼 뿐이고, 세리아는 표정을 싸늘히 굳힌 채 손톱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으득, 까득.
그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말실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다’라니, 사람에게 쓰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말이라서 나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델핀 선배와 대화를 나누다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치 인간에게 쓰임새가 있다는 듯 말하는 태도, 유용한 것과 무용한 것으로 세상을 구분하는 이분법은 델핀 선배의 관점이었다.
내 본심과는 거리가 있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급히 수습을 시도했다.
“내가 잠깐 실언을 한 것 같은데…….”
“……그 년이랑 가겠다고?”
그러나 셀린과 세리아가 꽂힌 부분은 전혀 다른 지점인 듯했다. 내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셀린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재차 물어왔다.
“델핀, 그 년이랑 간다며.”
아아, 나는 그제야 셀린의 의도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것도 없이 사실이었다. 셀린과 세리아를 만나기 직전에 담판을 짓고 온 참이 아니던가. 내 입에서 평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그럴 예정인데.”
“……난 반대야!”
셀린의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소리치더니, 내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왔다.
애타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그 여자가 이안 오빠 습격했던 거 기억 안 나?! 그때 꺾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뒤통수 맞고 수렵제 우승도 못했을 거라고!”
“에이, 그렇게 승리에 집착하는 사람이 굳이 아군을 왜 건드리겠어?”
“그, 그래도…….”
내 담백한 반론에 대응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셀린의 황갈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갈 곳을 잃은 그녀의 시선이 세리아를 향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듯했다. 그러나 세리아는 이미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빛을 잃은 동공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중얼거림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빼앗기지 않아, 빼앗기지 않아, 빼앗기지 않아…….”
셀린은 그 모습이 못내 답답했는지 가슴을 팍팍 두드렸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봉긋한 쿠션감이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 그래! 그러고 보니 이안 오빠는 그 년 알몸까지 봤다며! 그런데 2주 동안이나 함께 다니겠다고?”
그 말에 나는 침묵했다. 그야 내가 델핀 선배의 알몸을 본 적이 있긴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연분홍 영애’라는 명예로운 호칭까지 선물해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이 델핀 선배와 함께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다.
알몸을 보여준 탓에 델핀 선배가 나를 보면 경기를 일으키면 또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나를 보고 덜덜 떠는 건, 다른 종류의 감정 때문이었다.
내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이내 의아한 목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게 왜?”
“아오!”
셀린은 또 다시 답답한 마음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연달아 제 가슴팍을 팍팍 두드렸다. 그래봐야 부드러운 살덩이 탓에 소리도 제대로 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군을 끌어들여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전략적 계산을 끝마친 셀린의 황갈빛 눈동자가, 다시금 세리아를 향했다.
그녀의 손이 세리아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셀린의 눈빛은 애절하기 그지없었다.
“야, 야! 찐따!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지금 이안 오빠가 네 언니랑 놀아나려 한다니깐?”
세리아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들렸다. 언제나 호수처럼 맑은 빛으로 반짝였던 아쿠아마린빛 눈동자는, 어느덧 심해를 닮은 거무칙칙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저벅저벅 그녀는 내게로, 그 직후 내 멱살이 세리아에게 붙잡혔다.
내 눈이 일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세리아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스산해서, 나는 일단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선배…….”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말소리가 내 귀에 닿는 것만으로도, 체온이 몇 도는 떨어진 느낌이었다. 으슬으슬 뼈마디를 파고드는 추위.
여전히 세리아의 눈동자에는 음영이 사라져 있었다. 소녀의 질척거리는 음성이 고막을 끈적하게 덮어갔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요. 내겐 유일한 것이니까.”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내 멱살을 붙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리아는 느닷없이 내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망설임 없는 행동에 당황한 쪽은 셀린이었다. 그녀는 경악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와 세리아 사이를 이리저리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넘어간 지 오래였다. 셀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세리아를 따라갔다.
“야, 야! 세리아, 어디 가! 아오, 진짜!”
그녀는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나를 째려보았다. 그 원망이 담긴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냐는 뜻이었다.
이에 셀린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응했다. 앞으로 두고 보자는 뜻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셀린과 세리아가 화가 난 까닭은 알지 못한 채로, 두 여인과의 조우는 종막을 맞이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최근 여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카데미의 인간관계란 본래 이처럼 복잡했다.
정 안 되면 다시 한 번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 될 터였다. 예전에 셀린과도 그렇게 화해했었으니까.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손도끼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연금학부의 강의동으로 향했다.
그곳에 엠마가 머무르고 있었다.
**
연금학부 강의동의 506호, 일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 장소였다.
엠마의 연구실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고학년’으로 분류되는 3학년이 되면, 마법학부나 연금학부처럼 공방이 필요한 학부의 학생들은 제 연구실을 하나씩 배정받곤 했다.
레토도 그랬고, 엠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를 증명하듯 506호의 문 앞에는 고풍스러운 글씨로 ‘엠마’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교무부 측에서 설치한 팻말일 터였다.
엠마가 퇴원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방치해 두었던 공방 정리에 몰두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괴팍한 일면을 가지고 있듯이, 연금술사들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강박관념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결벽증이 그것이었다. 워낙 정밀한 조율이 필요한 작업을 하는 탓에, 자그마한 먼지라도 시약에 들어가는 날에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엠마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녀 또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심하지는 않고, 주로 실험대나 시약 보관함에 한정해서 나타나는 기질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제 공방에 들어선 엠마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눈에 훤했다.
얼굴이 창백해져서 당장 청소에 들어갔겠지. 한 달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느라 며칠 동안은 여념이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슬슬 청소를 끝마치고, 밀린 연구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으리라. 나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엠마의 공방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곧 맑은 대답이 돌아왔다.
“네, 잠시만요~”
그새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조금 늘어지는 목소리였다. 문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문이 살짝 열리며 사랑스러운 소녀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밤을 샜는지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는 그녀의 몸짓에서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났다.
하품을 하느라 감겨져 있던 엠마의 눈동자가 살짝 뜨였다. 그와 동시에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대로 얼음.
엠마의 눈이 부릅떠졌다. 툭 건드리면 깨져버릴 듯 그녀의 경직은 급작스러웠다. 나는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없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안녕, 엠마.”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우당탕탕 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만 들어도 엠마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문 너머에서 여인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나는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팔짱을 낀 채 그렇게 몇 분, 비로소 다시 공방의 문이 열렸다.
다시 나타난 엠마의 모습은 방금 전과 영 딴판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얼굴에는 어느새 옅은 화장까지 입혀진 뒤였다. 옷매무새조차도 깔끔했다.
마치 직전에 보았던 엠마의 모습이 착시라도 되는 듯했다. 내가 얼떨떨한 눈빛을 하고 있자, 엠마는 먼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 이안이잖아… 어서 와, 무슨 일이야?”
나는 잠시 침묵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사죄의 뜻을 전하기로 했다.
“그, 아까 전에는 놀라게 해서 미안…….”
“……무슨 소리야?”
그러나 내 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그 전에 엠마가 미소를 머금은 그대로, 내 말문을 틀어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 이안을 처음 보는데?”
“하지만 방금 전에도 분명…….”
“아니야.”
나는 이상하다는 듯 반문하려 했지만, 엠마의 태도는 더없이 강경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그리고 재차 한 마디.
“아니라고.”
“……그, 그래.”
더는 엠마의 의견과 맞서야 할 필요성을 찾지 못한 나는, 수긍의 표시로 들었던 손을 슬쩍 내렸다. 그제야 엠마의 얼굴에 다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튼 반가워, 이안!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 우선, 들어올래?”
그러면서 엠마는 공방의 문을 활짝 열어 나를 환대해 주었다. 그녀의 공방은 늘 그렇듯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꼼꼼한 성미의 그녀다운 방이었다.
물론 소파에 남은 담요가 지난밤 그녀의 숙소가 이곳이었음을 증언해 주긴 했으나, 나는 일부러 이를 무시했다.
직감이었다. 굳이 말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판단이 뇌리를 스쳤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검사로서 내 감을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러든 말든, 엠마는 내가 퍽이나 반가운 듯했다. 그녀는 어느덧 공방의 물약 진열대로 다가가, 물약 하나를 꺼내왔다.
그녀의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물약을 쥔 손이었다. 그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자, 이안! 얼마 뒤에 실습 파견을 나간다며? 그래서 혹시 몰라 준비했어.”
회색의 액체가, 길쭉한 병 안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익숙한 물약이었다. 처음으로 엠마의 공방에 방문했을 때 선물 받은 물약이기도 했고, 나도 한때 신세를 졌던 물약이었으니까.
기척을 숨기는 물약이었다. 움직임이 조금 둔해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난전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물건이었다.
나는 일단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입에 쓴웃음이 맺혔다.
“고마워, 잘 쓸게.”
내 감사인사를 받은 엠마는 그새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다시 물약 진열대로 향했다.
그녀의 손이 물약을 하나둘씩 꺼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자연치유력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고, 그리고 이건 던지면 섬광이 터져! 또 이건 짐승이 싫어하는 냄새가 나고, 이 물약은 반대로 짐승이 좋아하는 냄새가 나! 그리고 또, 또…….”
처음에는 웃으며 엠마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낯빛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몇 개에 불과하던 물약이, 어느새 수십 개에 이르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제대로 된 수량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지각색의 물약들이 얕은 언덕처럼 쌓여가고 있었을 뿐.
그렇게 한 아름 물약을 품에 안은 엠마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내게 말했다.
“조금 부족하지만, 당장 쓸 만큼은 될 거야!”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잖아.
그동안 몰랐는데, 엠마는 꽤 헌신적인 성격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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