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5)
* * *
엠마의 품에는 어느덧 수십 개의 물약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한 아름 안고 있는 그 물약들을 전부 내게 주고 싶은 듯했다.
곤란했다. 일단 운반하기도 까다로웠지만, 엠마는 평민이었다.
저 물약들 또한 소중한 수입원 중 하나일 터였다. 내가 그것을 함부로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잠자코 엠마를 타일러 보기로 했다.
“엠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지 않아?”
“응? 하지만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은 거잖아?”
엠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어왔다. 과연 정론이었다.
하지만 내게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이만큼 많이는 못 받아. 전투 중에 일일이 들고 다니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너 생활비도 물약 팔아서 벌고 있잖아.”
“……괜찮아.”
엠마는 들고 있던 물약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꽤 널찍한 책상임에도 불구하고,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물약병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몇몇 물약이 책상 밑으로 떨어질 듯 굴렀다. 내 손이 다급히 몇 개의 물약을 쥐었다.
그러지 않아도 떨어지는 물약에 손을 뻗으려 했던 엠마는, 내 활약에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손이 가슴 위에 얹어졌다. 그리고 곧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가 말했다.
“배고프면 버섯을 뜯어먹으면 되거든! 남쪽 숲에 있는 버섯 군락지를 몇 곳…….”
“안 돼.”
나는 단호히 그 말을 잘라냈다. 너무 단정적인 어조였던 탓인지 엠마는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내 뜻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내 고개가 힘 있게 저어졌다. 내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절대 안 돼, 미쳤어? 너 거기서 마수한테 당했던 거 기억 안 나?”
“하, 하지만 그때는 이상 현상 때문에…….”
“그래도 안 돼.”
내 연이은 거절에 엠마는 조금 풀이 죽고 말았다. 본래 지혜롭고 영리한 그녀였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듯했다.
아마 나를 돕고 싶다는 일념으로 머리가 꽉 찬 탓이겠지. 그 마음이 못내 고마우면서도, 나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끼니까지 거르려 하다니, 너무 과한 처사였다.
우선 그런다고 해서 내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도리어 물약을 쓸 때마다 떨떠름한 기분이 든다면 또 몰랐다.
나는 엠마의 끼니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친구의 삶을 희생시킬 만큼 모진 사람이 아닌 탓이었다.
엠마는 내 첫 번째 평민 친구였다.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그녀를 되살려 낸 것도 내가 아닌가.
그 과정에서 수만 골드에 이르는 비용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덕에 두 사람의 삶이 구원 받았으니까.
엠마와, 그녀의 아버지.
약초꾼 부녀의 행복한 미래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런데 지금 엠마는 그렇게 구해낸 삶을 다시 밑바닥으로 처박으려 들고 있었다.
그것도 나를 돕기 위해서,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엠마, 나랑 약속했잖아. 행복하기로.”
“그, 그래도 나는 이안한테 도움이 되는 쪽이 더 행복한데…….”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연녹색 눈동자, 사내라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금 더 누그러진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는 달래는 어조에 가까웠다.
“엠마, 생각해 봐. 네가 식사 대용으로 버섯이나 먹고 다니면 내 기분이 좋겠어?”
“……버섯은, 어렸을 때부터 내 주식이었는데?”
아차, 평민의 생활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발언이었다.
내가 영주였다면 이 실언을 듣고 영지민들의 민심이 하향세를 보였을 터였다.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수습에 나섰다.
“버섯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대신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숲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게는, 네 목숨이 소중해.”
최대한 진중한 목소리를 낸 효과가 있었던지, 내 말을 들은 엠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멍하니 나를 응시하던 녹색 눈동자가 곧 되돌려졌다. 엠마는 헤헤, 하고 웃으며 쑥스럽게 내 시선을 피했다. 다행스럽게도 마음이 상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기쁜 듯했다. 내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그, 그렇구나… 소, 소중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동안 보았던 엠마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명민한 두뇌를 자랑하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다소 푼수 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혹시나 마수에게 당한 부작용이 아닐까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두뇌 한 구석에 그러한 의심을 처박아 둘 뿐. 마침 기회가 온 듯해서,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굳이 물약이 아니더라도 내게 도움을 줄 방법은 많아.”
“……응? 예를 들어?”
“네 지식.”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되묻는 엠마를 향해,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혹시 지난번에 했던 말 생각나? 혹시 미래에서 편지가 날아올 수도 있냐는 이야기.”
엠마는 잠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는 듯, 아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그 연녹색 눈동자에는 총기가 돌아와 있었다.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때 아마… 델피렘과 일곱 별에 대해 이야기했었나?”
“맞아, 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줘. 그리고 또, 편지뿐만 아니라 영혼도 과거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
흐으음, 하고 엠마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녀는 곧 몸을 일으켜 공방의 구석을 향했다. 그리고 마력으로 신호를 보내자, 허공에 새파란 실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천문도해(?文??)였다. 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기록해둔, 마법사들과 연금술사들의 필수품.
“전에도 말했다시피, 불가능하지는 않아. 정보는 물리적 실체가 없어서 비교적 저항이 덜하거든. 만약 편지의 형태를 빌린다면 고작해야 종이 한 장이 이동할 뿐이고, 부담도 적겠지. 하지만 영혼은 달라.”
그러면서 엠마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천문도해의 중심부가 확대되더니, 유독 빛나는 일곱 개의 별이 시야에 가득 찼다.
델피렘이 저지른 일곱 죄악을 상징하는 별들이었다.
그 일곱 죄악은 인류 최초의 범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죄를 상징하는 별들은 아루스의 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감시를 받는다고 전해져 오고 있었다.
달이 중천에 뜨면, 일곱 개의 별이 시립하듯 그 주위에 위치한다. 밤하늘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달이 그렇게 일곱 별의 중앙에 위치하는 시간은, 악신 오메로스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때이기도 했다.
그 무시무시한 일곱 별의 힘을 빌려올 수 없는 까닭이기도 했다. 아루스가 이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 누구도 별의 힘을 탐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도, 마수도, 심지어는 악신조차도.
그것이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었다. 저 일곱 별의 정당한 주인.
델피렘, 인류의 배신자.
나는 꿈에서 반복적으로 들었던 그 이름을,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정보가 시간선을 거스를 때 저항이 덜하다곤 해도, 그 양이 방대해지면 세계에 막대한 부담이 갈 수밖에 없어. 당연히 이를 교정하기 위한 마력도 막대해질 테고, 영혼처럼 무수한 정보를 담은 사념체라면 말할 것도 없지.”
“그럼 영혼은 과거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거야?”
내 반문에 엠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깊이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니, 단지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단 뜻이야. 편지처럼 달랑 정보만 전달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예를 들어, 특정한 시간대에만 등장할 수 있다던가……?”
그렇게 설명을 덧붙여 가던 엠마는, 곧 헛된 가정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입가에는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곱 별의 힘을 빌릴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겠지.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편지든 영혼이든 과거로 건너오는 것은 불가능해.”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없어, 오직 두 가지를 제외하면.”
다시 말해 가능성이 있긴 있다는 듯이었다. 내 얼굴에 화색이 돌자, 엠마는 쓴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내게 조언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 이안.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가능성뿐이니까.”
“도대체 무슨 가능성이길래…….”
“인류 멸망.”
내 입이 곧바로 다물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엠마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혹은 델피렘의 소멸, 둘 중 하나가 충족되어야 해. 전자는 아루스가 힘을 잃을 테고, 후자는 더는 일곱 별의 힘을 붙잡아둘 이유가 없어지니까.”
어느 쪽이든 엠마는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느닷없이 신화 속의 존재가 소멸하거나, 혹은 인류가 존망의 위기에 놓이다니.
지금 같은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글귀가 하나 있었다.
‘미래를 지키지 못하면, 세계는 멸망한다.’
첫 번째 편지 뒤편에 남아있던, 휘갈겨 쓴 글씨.
그것이 암시하는 섬뜩한 미래를 떠올리며 나는 침묵을 지켰다.
공방을 떠날 때가 돼서도 내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엠마가 챙겨준 몇 가지 물약을 품에 넣고 공방을 나서려는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엠마가 물어왔다.
“이안, 어때? 혹시 나 달라진 거 없어?”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했던 터라, 나는 한참을 끙끙대도 답을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엠마는 쿡쿡, 하고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웃음을 지으면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실은, ‘사랑의 묘약’이라는 향수를 썼거든. 조금 더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효과가 있, 다… 던데……?”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댔다.
냄새를 맡으니 확실히 묘한 향이 났다. 달콤하면서도,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향기였다.
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사랑의 묘약’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효과였다. 그렇게 서서히 엠마에게서 내가 멀어지는데, 그녀는 숨을 삼킨 채 굳어 있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만이 그녀의 생존을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에게 칭찬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보이네, 좋은 향이야.”
“……그, 그, 그, 그래.”
엠마는 더듬거리며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힐끔거리며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다 멀어졌다. 엠마는, 부끄러움에 젖어 한 마디만을 남길 뿐이었다.
“응, 효, 효과 좋네… 나, 나한테도…….”
그렇게 나는 엠마의 공방을 나섰다.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다.
엘시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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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엘시 선배는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언제나 패거리를 몰고 다니는 그녀답게, 행방을 묻자마자 곧바로 수많은 목격 정보가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늘 그렇듯 엘시 선배는 한적한 공터를 점거한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우쭐한 얼굴을 한 채, 주위를 둘러싼 제 패거리들에게 자랑스레 제 무용담을 떠들었다.
“그때 델핀 그 썅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아?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누워 있더라고, 멍청한 년! 내가 그때 다진 고기로 만들어놨어야 하는데…….”
엘시 선배의 말에 패거리 중 하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곧 엘시 선배에게 말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다진 고기는 너무하죠.”
“……그건 그렇지? 아무튼 그 씨발년이 말이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 들어도 인형 같은 외모와 대비되는 말투였다. 라이넬라 가문이면 그래도 명문인데, 그 영애가 저렇게 험한 말을 쓰고 있다니.
문득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들고 반응을 보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오늘은 내가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었으니까.
그 대신 나는 손을 들어 평범한 인사를 건넸다.
“엘시 선배!”
“제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응? 뭐야!”
한창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던 엘시 선배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게 폴짝폴짝 뛰듯 다가왔다.
상상 이상으로 반가워하는 반응이었다. 그녀가 만면에 미소를 담은 채 내게 물었다.
“너, 너……! 웬일이냐, 요즘 찾아오지도 않더니?”
“오랜만에 엘시 선배가 보고 싶어서요.”
인사치레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하지만 엘시 선배는 그 정도로도 무척 흡족한 듯했다. 뒤이어 그녀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후후, 그래? 건방진 후배치고는 오랜만에 입 바른 말을 하는구나. 상으로 나를 쓰다듬을 권리를 부여하마.”
그러면서 살짝 기대감 어린 시선을 내게 보내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그새 너무 우쭐해진 듯해서 조금 놀려볼까 싶었는데, 그 외모만큼은 귀여워서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는 간지러운 곳을 긁히는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이때다 싶어 나는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내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엘시 선배, 혹시 다음 실습 일정 정해져 있어요?”
“……응? 아니, 아직 고민 중인데.”
“그럼 저랑 함께 가지 않을래요?”
흐으음, 하고 엘시 선배의 입에서 나른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내게 머리를 쓰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라, 그녀의 눈동자는 몽롱하기 짝이 없었다.
훗, 하고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나를 흘겨보았다.
“흥, 내가? 왜 너 같이 약해빠진 놈… 히이이익! 갈게! 가, 가면 되잖아!”
결국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슬그머니 허리춤의 손도끼로 손을 옮겼다. 그 짧은 행동만으로도 엘시 선배의 설득 작업은 끝이 났다.
이토록 간단한 일인데 왜 말로 하려고 했을까.
나는 속으로 내 어리석음을 탓하면서, 손도끼의 자루를 쥐려던 손을 다시 엘시 선배의 머리 위에 얹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다소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엘시 선배의 능력이 꼭 필요해서 그래요. 알다시피, 엘시 선배만큼 뛰어난 마법사를 찾기가 워낙 힘들어서…….”
“……그, 그렇긴 해! 내가 좀 대단한 마법사긴 하지!”
어차피 거부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엘시 선배는 필사적으로 나를 따라가야 할 이유를 찾으러 열심이었다. 그녀 나름대로의 체면치레였다.
후배의 협박에 굴해서 따라간다는 오명만큼은 쓰고 싶지 않겠지.
또, 내 칭찬의 효과도 있었다. 엘시 선배는 내 칭찬이 퍽 마음에 든 듯했다. 그녀는 다시 그 우쭐거리는 표정을 되찾고 말했다.
“어차피 너한테는 나밖에 없잖아? 믿고 따를 만한 4학년 선배가!”
그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엘시 선배가 믿고 따를 만한 선배? 여러모로 물음표가 남는 말이었지만, 굳이 이를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 구성에 대해서는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긴 했다.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는 대표적인 앙숙 관계였으니까, 살짝 망설이고 있던 내 입이 열렸다.
“아니요, 한 명 더 있는데요.”
“훗, 당연히 나밖에… 응? 더 있다고?”
엘시 선배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 너 따위가 어떻게 4학년을 더 알고 있냐는 표정.
귀여운데 짜증이 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소 퉁명스레 말을 내뱉고 말았다.
“네, 델핀 선배가 따라가기로 했거든요.”
그 말을 듣고, 엘시 선배는 내게 쓰다듬어지는 와중에도 딱딱하게 몸을 굳히고 말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그녀의 경악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는, 지독한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도대체 왜, 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엘시 선배는 부르르 몸을 떠는 중이었다. 그녀의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에는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습 내내 이어질 경쟁의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