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95화 (95/649)

〈 95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6)

* * *

실습 파견 의뢰를 고르는 과정은 지난했다.

의뢰별로 난이도와 그에 따른 성적 가산점이 천차만별이었다. 대다수의 아카데미 학생들은 성적을 신경 쓸 수밖에 없으므로, 어떤 의뢰를 고를지를 기말고사를 앞둔 3학년들의 주된 화두였다.

낙제만 피해 가고 싶다면 안전한 의뢰를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실습 파견 점수가 크긴 해도, 이론 과목으로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무리한 의뢰에 도전했다가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조도 매년 몇 개씩은 나오는 판이었다. 괜히 주제에 맞지 않는 고난이도 의뢰를 골랐다가 실패라도 하면 낭패였다.

의뢰 실패자에게 주어지는 점수는 없었으니까.

실습 파견이 성적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의뢰 실패는 곧 그해의 낙제생이 될 확률이 무척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실습 파견을 나간 학생들은 어떻게든 의뢰 실패만을 면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심지어 그러다 죽는 학생들도 나올 정도였다.

이쯤 되면 아카데미 측에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한 수를 낼 법도 한데도, 여태껏 아카데미가 실습 파견의 전통을 폐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는 교육기관이자 훈련기관이기 때문이었다.

저학년까지는 교육과 보호에 중점을 두지만, 고학년부터는 점차 실전과 훈련에 비중을 두기 시작한다. 실습 파견은 그 효시라고 봐도 좋았다.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실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카데미는 그 잔혹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학생들이 실감하길 바랐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탓에, 실습 파견 기간을 앞둔 의뢰 게시판 앞은 늘 인파로 붐볐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새로운 의뢰가 추가되는 게시판에는 사라지는 의뢰보다 생겨나는 의뢰가 더 많았다. 그만큼이나 대륙에서 인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배점이 높고, 또 안전한 임무는 금세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래서 3학년 중 몇 명은 아예 자체휴강을 하고 종일 게시판 앞에 진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이나 실습 파견 의뢰가 간절한 학생들이 많았다. 물론, 나는 그 예외에 속했다.

애초에 성적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였다. 본래 중하위권을 전전하다 이제야 중상위권에서 상위권으로 분류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한 달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보인 성장치고는 대단한 성취였지만, 결국 내 객관적인 수준을 진단하자면 그 정도가 한계였다.

각 학년 수석들을 쓰러트린 것은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 미래에서 온 ‘나’라면 또 몰랐다. 델핀 선배를 아작을 내버린 것으로 보아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은 확실해 보였으니까. 그만한 실력이라면 학년 수석도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몇 년 뒤일지도 모를 미래를 지금 거론해 봐야 우스울 따름이었다. 편지는 7년 뒤의 미래에서 왔다고 일자라도 표기되어 있었지, 미래의 ‘나’는 도대체 몇 년 뒤의 미래에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수십 년 후의 미래에서 날아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쯤 되면 검사로서 완숙한 경지에 들어섰을 테니, 상대적으로 실전 경험이 떨어지는 아카데미 재학생쯤은 가지고 놀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솜씨를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욕심 부리지 않고 근래의 성과만으로도 만족하는 편이 맞았다.

따라서 지금 내가 관심을 가지는 쪽은 실력 향상이나, 높은 성적이 아니었다.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책임이 남아 있었다.

세계를 구하는 것, 조금도 실감이 나진 않았지만 아무튼 내게 주어진 사명이란 그랬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는 ‘고아원’으로 실습 파견을 갈 필요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수백 년이라지만, 마수라는 적이 존재하는 이상 대륙에는 고아들이 넘쳐 났다.

즉, 고아원 또한 수도 없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선은 고아원 중에서도 어느 곳을 가야 할지, 그 조건을 설정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맨땅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성녀에게서 받은 쪽지 덕이었다.

대륙 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성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경영난을 겪고 있는 고아원.

얼핏 보기에 까다로운 조건처럼 보이지만, 이토록 범위를 좁혀도 해당하는 고아원의 목록은 수십에 달했다. 나는 지금 의뢰인과 그 명단을 일일이 비교하는 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의뢰 게시판에 남은 의뢰 중, 그 목록과 일치하는 의뢰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길포드 고아원.

의뢰 내용은 마수 정찰 및 토벌이었다.

고작해야 고아원이 내건 의뢰였고, 마수 정찰 및 토벌은 무척 흔한 의뢰에 속했다. 예상 난이도도 그다지 높지 않은데다 보수도 짜다.

다시 말해 인기 없는 의뢰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얼마나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는지, 의뢰지는 어느덧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 의뢰지를 떼어냈다. 두 번째로 온 편지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조건에 딱 부합하는 의뢰였다. 델핀 선배나 엘시 선배가 질색할 만한 선택이었지만, 어차피 그 둘은 그동안 벌어둔 점수가 있을 테니 상관없었다.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새 새로운 의뢰가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내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선택이야말로 옳다고.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스산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 고아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뇌리에 남은 낱말이라고는 두 개뿐.

‘습격’과 ‘둥지’.

결국 그 의미는 현장에 가서 차차 조사해 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지금으로서는 습격이 있을 것이고, 그 배후에 둥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알 수 있는 내용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려, 조 구성과 함께 의뢰 수주를 통보하러 대외총괄부로 향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저 멀리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퀭한 얼굴을 한 메마른 사내.

페르민 선배였다. 델핀 선배와 함께 다니던 수도사였는데, 그에게는 여러모로 빚이 있었다.

우선 그는 내게 응급처치를 해주었고, 그 호의를 나는 코를 물어뜯는 것으로 돌려주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선공을 가한 쪽은 델핀 선배 쪽이었기 때문에, 나름 정당방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망설이던 그때, 페르민 선배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페르민 선배.”

“후배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임마누엘.”

성국 특유의 인사말을 들으니 그제야 페르민 선배가 좀 수도사 같아 보였다. 늘 검을 패용하고 있어 몰랐지만, 지난번에 겪어본 바로 그는 실력 있는 무투가였다.

심지어 검술 솜씨도 절대 취미로 익힌 수준은 아니었다. 4학년 중에서 딱히 이름이 알려진 편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실전에 무척 강했다.

그야말로 ‘숨겨진 강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빼빼 마른 몸과 파리한 안색만 보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실력자에, 전투 중에도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씨까지.

인품이든 실력이든 내게 무시 받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한 존중과 미안함을 담아,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코는 좀 괜찮으세요?”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페르민 선배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후배님. 잘잘못을 따지자면 비겁하게 기습을 한 제 쪽의 잘못이 더욱 크겠지요. 이안 후배님께서는, 단지 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골랐을 뿐입니다.”

그렇게 겸허한 목소리로 말하니 괜히 더 미안했다. 차라리 목에 핏대를 올리고 따졌다면 코웃음 치고 말았을 텐데, 나는 멋쩍은 마음에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페르민 선배가 저러는데 굳이 그 문제를 더 끌고 갈 필요는 없었다. 묵혀 두었던 마음의 빚은 이대로 해소한 셈 치기로 했다.

내 입에서는 으레 그렇듯 인사치레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페르민 선배는 수도사였군요.”

“아닌 줄 알았나요?”

쓴웃음을 지으며 되묻는 페르민 선배에게, 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어 부정의 뜻을 표했다.

“아니요, 아니요. 하도 검을 잘 쓰시길래 그동안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임마누엘’이라고 하시는 걸 보면…….”

“좋은 인사말이죠.”

페르민 선배는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신앙에 관련된 질문이 나오니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성직자들만의 특징이었다. 이대로 몇 마디 맞장구만 쳐주면, 페르민 선배 또한 이대로 몇 시간이고 신학 강의를 늘어놓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페르민 선배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해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배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임마누엘’은 ‘주께서 함께 하시길’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단순하기에 오히려 더욱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죠. 상대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말이기도 하고, 의무를 다하라는 뜻이기도 하며, 또 주께서 함께 하시니 그 뜻에 순명하라는 의미도 될 수 있겠네요.”

조용한 성격처럼 보였지만 페르민 선배도 성직자는 성직자인 모양이었다. 묻지도 않은 내용을 줄줄이 읊는 것을 보면 그랬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을 맞춰주는 쪽을 택했겠지만, 오늘따라 귀에 꽂히는 낱말이 하나 있었다.

‘순명(??)’, 두 번째 편지에 휘갈겨 써져 있는 글자이기도 했다.

“……‘순명’이요?”

“네, ‘순명’… 천신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아루스께서 인간의 이성과 영을 지으셨고, 악신 오메로스는 육체를 빚었죠. 그 탓에 인간에게는 죄성이 깃들고 말았습니다. 즉, 우리의 몸에는 죄를 지으려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설명은 이미 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순명’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어, 내 눈이 물끄러미 페르민 선배를 향했다.

그의 퀭하던 얼굴에는 어느새 활기가 돌고 있었다. 하여간 성직자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를 비우고, 주의 뜻에 순종해야만 무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쉽지 않죠.”

페르민 선배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단언했다. 그는 곧바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누구나 ‘나’를 버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물며 주께 평생을 헌신하기로 한 저조차도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스스로를 버린다는 것은, 곧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각오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그 또한 알 수 없죠.”

그러면서 페르민 선배는 내게 성호를 그어 주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오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스스로 대답을 찾길 바란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야 성직자라 그렇지만, 후배님이야 굳이 순명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스스로를 버려야만 하는 상황을…….”

페르민 선배는 그렇게 예언일지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마지막까지 고개 숙여 ‘임마누엘’이라는 인사를 잊지는 않았다.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순명이라, 스스로를 버린다고?

지금으로서는 알쏭달쏭한 종교적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굳이 휘갈겨 쓰면서까지 남긴 낱말이니, 무의미하지는 않겠지.

나는 그 두 글자를 가슴에 품은 채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곧 파견을 떠날 시간이었다.

**

워프 게이트, 대륙의 주요 거점들을 잇는 교통의 중심이었다.

막대한 마력이 필요하기에 통행료가 비싸기는 했지만, 일단 통과만 하면 몇날며칠이 걸릴 거리라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문명의 이기였다. 현대 마도학의 정수라고 해도 좋았다.

본래 하급귀족이라도 함부로 이용할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비용을 자랑하곤 했지만,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파견 업무에 한해 워프 게이트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 목적지인 ‘길포드 고아원’은 주요 도시에서도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빌려 한나절 정도는 더 달려야 할 터였다. 그 점이 못내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워프 게이트 덕에 노숙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수밖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챙겨온 물품들을 살폈다.

옷가지를 비롯한 생필품들은 물론이고, 엠마가 준 포션도 몇 가지도 짐더미에 섞여 있었다.

심장박동을 줄여 기척을 죽이는 물약이 하나, 자연치유력을 올려주는 물약이 하나, 해독제가 하나.

써야 할 상황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유용한 물약들이었다. 어떠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만큼, 준비는 철저한 편이 좋았다.

결국 파견은 넷이 아니라 셋이서 떠나게 되었다.

본래 4인1조가 원칙이긴 했지만, 학생들마다 교우관계가 천차만별인지라 상황에 따라 2인1조와 3인1조로 떠나는 조도 많았다. 나 또한 그러한 선례를 따르기로 했다.

애초에 함께하는 둘이 4학년에서도 수위권에 속하는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가 아닌가. 어떠한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만큼, 숫자보다는 질이 중요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리고 와봐야 아까운 목숨만 잃을 뿐이었다. 나는 그러한 계산 아래 실습 파견 조를 구성했다.

다만 조금 쓸쓸한 점이 있다면,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는 각자 패거리를 이끌고 있는 만큼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즉 나와 한날한시에 출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하루나 이틀 안에 오겠다고 했으니, 며칠만 참으면 그만일 터였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워프 게이트에 들어선 그때.

“……으겍.”

질색하는 목소리가 내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은빛 머리카락에 연분홍빛 눈동자,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옥색 머리카락의 사내까지.

성녀와 그 호위기사 유렌이었다.

유렌은 나를 보자마자 슬쩍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성녀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상체를 살짝 숙였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델핀 선배에게 폭력을 가한 범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에 대한 혐오감이 강해진 모양이었다.

그 마음이야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손도끼를 뽑아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참았다.

무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귀족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나는 기품 있는 태도로 성녀를 승복시키길 원했다.

“……그렇게 싫어할 것까지는 없잖습니까?”

그러나 유려한 말솜씨로 성녀를 굴복시키던 상상 속의 나와는 달리, 현실의 나는 그저 불퉁한 목소리를 흘릴 따름이었다. 이럴 때는 참 모자란 말솜씨가 원망스러웠다.

레토였다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성녀를 타박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오늘 레토는 마중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러던 내 의식의 흐름을 깨트린 것은 이번에도 성녀였다.

“흥, 실례.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오고 말았네요.”

“지금도 뚝뚝 묻어나오고 있는데요.”

“아, 부디 이해해 주시길… 제가 원체 내숭이 없는 성격이라.”

그러면서 성녀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내게 양해를 구했다. 그 부피감 넘치는 흉부 곡선 때문에 다른 곳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내가 돼서 젖가슴에 홀릴 수는 없는지라,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숭이 없기는, 무슨 헛소리를… 그보다, 둘이서 어딜 가요? 실습 파견은 4인1조가 기본인데.”

성녀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였지만, 의외로 대답 자체는 순순히 돌려주었다.

“성녀가 아무데나 돌아다니는 자리 같아요? 저는 실습 파견 대신 ‘봉사 파견’을 나가야 한다고요. 성도에서 지정해 주는 곳에 가서, 며칠 머무르며 이미지 관리 좀 하는 거죠. 뭐, 겸사겸사 전도도 할 수 있으면 좋고?”

지나치게 가식이 없는 말이었다. 예전에 만나던 ‘성녀님’과 지금의 성녀가 별개의 인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반쯤 그렇기도 했다. 유렌의 말에 따르면 그 ‘앙칼진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대륙에 몇 명 없다고 그랬으니까.

그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물론, 반어법이었다.

성녀를 계속 상대해 봐야 머리만 아파질 듯했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으며, 무성의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렇군요. 부디 그 숙련된 내숭으로 이미지 관리 좀 하시길, 임마누엘.”

“그러는 그쪽도, 부디 지은 죄만큼 고생 좀 하시길. 임마누엘.”

하여간 한 마디도지지 않는 여자였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혀를 차며 걸음을 재촉했다.

워프 게이트는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목표로 하는 도시에 따라 수십 갈래의 짧은 통로를 지나갈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성녀와 나는 이제 갈라서야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벌써 한참 전에 각자의 길을 가야 정상인데도, 성녀와 나는 여전히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와 성녀의 시선이 힐끔힐끔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었다.

결국 먼저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한 쪽은 성녀였다.

“……저기요, 왜 따라와요?”

“그쪽이 따라오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제 갈 길 가고 있는데요.”

우리 둘이 둘둘 투닥거릴 기미를 보이자, 지켜보고 있던 유렌은 킥킥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나와 성녀의 시선이 유렌을 향했다.

그는 마치 재미난 장난을 발견한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듯.

“이안, 네 목적지가 어디라고 그랬지?”

“……길포드 고아원.”

그 말을 들은 성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었다.

유렌의 입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당첨!아무래도 한동안 한솥밥을 먹어야겠는데?”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와, 내 금빛 눈동자가 황망히 마주쳤다.

‘길포드 고아원’, 그곳으로 향하는 두 남녀의 시선이 비로소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2주간, 나는 성녀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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