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7)
* * *
길포드 고아원의 원장 길포드 씨는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었다.
은회색의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난 할아버지였지만, 그 몸만큼 탄탄했다. 굴곡진 근육들이 노년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건강미를 자랑했다.
그 까닭을 물으니, 길포드 씨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이러한 대답을 남겼다.
“하하하, 이래봬도 한때 마수를 잡으러 다니던 용병이었습니다! 나름 이름도 높았죠.”
“……그 말씀대로에요.”
해질녘이었다. 태양은 그날의 마지막 흔적으로 능선을 불태우고 있었다. 낡은 고아원의 허름한 원장실, 그곳에서 나는 찻잔을 앞에 둔 채 길포드 씨와 면담 중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성녀도 함께였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지, 그 입가에는 언제나 보여주었던 예의 그 상냥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천상의 미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으니, 가히 ‘성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나 또한 저 미소에 깜빡 속아 넘어가지 않았는가.
성녀가 자애롭고 따스한 성격을 지닌 여인이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오히려 말하자면 성녀는 속이 시커먼 쪽에 가까웠다. 성향 자체는 선량한 편이었지만, 만사에 계산이 깔려 있으니 손해를 보는 일은 없었다.
지금도 길포드 씨에 대해 미리 조사해 온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고작해야 2주 남짓의 파견 임무였지만, 이미 고아원에 관련된 세세한 정보까지 파악해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철두철미한 여자였으니까.
그녀는 다소곳이 말을 이어갔다.
“길포드 원장님께서는 오랜 용병 생활을 청산하시고, 남은 재산으로 이 고아원을 세우셨습니다. 지금은 보호하고 계신 고아들만 해도 200명이 넘죠.”
“하하하, 성녀님께서 이 늙은이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고, 이 또한 성국의 지원 덕분이지요.”
성녀는 길포드 씨의 겸양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길포드 씨를 대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약자들을 위해 여생과 전재산을 바칠 용기가 없었다면, 얼마가 있든 고아 하나라도 제대로 구할 수 있을까요? 부디 많은 사람들이 길포드 씨의 심성을 본받았으면 좋겠네요.”
그러면서 성녀는 그 연분홍빛 시선을 내게 흘깃흘깃 보냈다. 아무래도 나더러 본받으라는 뜻인 듯했다.
성질머리하고는, 지금도 성녀는 나를 은근슬쩍 긁어대고 있었다. 내 인상이 절로 살짝 찌푸려졌다. 오늘따라 유독 손도끼 자루를 쥐던 날의 감촉이 그리웠다.
몇 초면 될까?
유렌이 없고 기습이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 1분 안에 제압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숙련된 무투가라도 날붙이에 대항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더더욱.
물론 망상에 불과했다. 고작해야 성질 좀 긁는다고 손도끼를 휘두를 만큼 나는 못돼먹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혹시 성녀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모를까.
그래, 명백한 잘못.
그렇지 않다면 내가 날붙이를 뽑아들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정치와 계산에 능한 성녀가 선을 넘을 가능성은 사실상 0에 수렴하므로, 단기간에 그녀와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화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과거가 뼈아팠다. 여동생이 배워두라고 할 때 열심히 배워뒀어야 하는데.
그때는 검 한 자루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만 알았다.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그래도 세상에는 화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많았다. 어린 시절의 내가 믿고 있든 검 한 자루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또한 수루두룩했다.
나는 오늘 그 문제를 논의하고자 했다. 성녀와 신경전을 벌일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길포드 씨, 의뢰 내용에 대해서 확인하고 싶은데요.”
내 질문에 길포드 씨는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그는, 곧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사실 말입니다… 이 고아원에는 달마다 한 번씩 마수가 출몰하고 있습니다.”
달마다 한 번씩이라, 나는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토록 일정한 빈도로 찾아오는 마수가 있다니? 대다수의 마수들은 지성이 없었고, 오직 살의와 적의만으로 움직인다.
물론 네임드급 마수라면 지능이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잔학성과 포악성은 그대로라, 고아원에서 살육을 인내할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일단 습격한 순간 끝장을 보려 들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의뢰는 정찰 및 토벌이 아니라, 고아원에서 학살극을 벌인 마수를 추적 및 토벌 임무가 되었겠지.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수가 출몰하면 꼭 고아원의 원생이 하나씩 사라집니다.”
“반드시 한 명뿐입니까?”
“네.”
내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어지간하면 표정의 변화가 없는 성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단 한 명뿐이라, 그것도 달마다 한 번 나타나서.
그 말은 즉 매달 고아가 한 명씩 마수에게 납치당하고 있단 소리였다. 간격도 일정하고 사라지는 고아의 수도 일정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마수가 그렇게 철저히 계산적인 살육을 벌인단 말인가.
그러나 그 말을 들으니, 비로소 이 의뢰가 그토록 오랜 시간 방치되었는지 이해가 가긴 했다. 사실 나와 성녀가 둘이서 마주친 것도 그 탓이었다.
워낙 의뢰가 장기간 방치되어 있다 보니, 성국에서는 고아원에 인력을 파견할 겸 봉사를 명목으로 성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내가 이 의뢰를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다. 결국 나와 성녀는 또 다른 의뢰 수주인이 있는지도 모른 채로 동시에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성국의 사정도 이해는 갔다.
대륙은 드넓고, 따라서 행정력과 군사력이 미치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도시에서조차 고아 한둘이 실종되는 일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는데, 이처럼 외진 곳에 있는 고아원에서 매달 고아 한 명씩이 사라진다고 해봐야 군대가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경영난에 시달리는 마당에 용병을 고용할 수도 없을 테고, 심지어 길포드 씨는 실력 있는 용병 출신인데도 마수 사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즉 그 이상 가는 전력이 투입되어야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이딴 의뢰를 받아들일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나를 제외하고는.
길포드 씨는 그 점이 못내 고마운 듯했다. 그는 어려운 사정에 아끼고 아꼈던 찻잎마저 기꺼이 내주었다.
그래봐야 싸구려에 불과했지만, 그 마음이 중요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따뜻한 차를 홀짝였다.
“……혹시 마수의 특징에 대해서는 보신 바 있나요?”
성녀의 질문이었다.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길포드 씨는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듣기로는 팔이 긴 원숭이 형태의 마수라고 하더군요. 난데없이 뛰어들어 순식간에 아이를 채간답니다. 너무 순식간이라, 목격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지난번에는 늑대더니, 이제는 원숭이인가.
지긋지긋했다. 심지어 원숭이는 나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동물이었다. 기본적으로 지능도 높은 편이었으니, 얼마나 까다로운 마수가 되었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만약 개중에서 이름을 받을 수준의 마수가 있다면 어떨까.
“지능적이군요. 우두머리가 있는 걸까요?”
“네, 아마도. 저도 주위 숲에서 원숭이 형태의 마수는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고아원 안으로는 들어서지 않기에 방치해 두었는데, 고아원을 습격하는 건 그중 우두머리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를 증언하려는 듯.
“2m는 훌쩍 넘는 장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만약 일부러 토벌을 당하지 않기 위해 달에 한 번씩만 고아원을 습격하는 거라면…….”
“지능이 비정상적으로 높네요.”
성녀의 결론이었다. 이를 신호로 단번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상대가 지능적일수록 토벌은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마수의 본성을 억누를 정도라면 최소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타당했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길포드 씨에게 말했다.
“일단… 그럼 제 동료가 도착하는 대로 숲을 수색해 보겠습니다. 혹시 지난 습격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대략 3주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전례로 보았을 때, 아마도 일주일에서 이주일 이내로 또 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했다. 또 야간에 경비도 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와 엘시 선배, 델핀 선배로는 부족했다. 차라리 성녀와 유렌이 와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이토록 까다로운 의뢰일 줄은 몰랐다. 이는 성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원장실을 나서는 나와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길포드 씨는 마지막 순간, 고개를 떨구었다.
“저,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들께 너무 어려운 부탁을…….”
그러면서 우리 둘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진심으로 미안한 듯했다. 나와 성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약자를 수호하는 것은 귀족의 의무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천신께서는 모든 이들을 굽어 살피시거늘, 임마누엘.”
원장실을 나선 나와 성녀 사이에서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아원을 습격하는 마수는 수수께끼의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 눈동자가 흘깃 성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미리 나를 쳐다보고 있던 성녀는, 허를 찔렸다는 듯 급히 눈을 돌렸다.
그녀도 감이 잡히지 않는 듯했다. 나는 슬쩍 그녀에게 물었다.
“뭐라도 알고 계신 것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
성녀는 곧바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성국의 최고위직으로 수많은 정보를 틀어쥐고 있는 그녀마저 윤곽조차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일단 몸이라도 부딪히며 알아내는 수밖에.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성녀에게 제안했다.
“그럼 내일 제 동료들이 도착하는 대로 숲으로 가봐야겠네요. 뭐라도 알아내야 대책을 세우든 할 텐데…….”
“오늘밤은요? 당장 오늘밤에 습격을 오면 아까운 생명을 하나 잃을 수도 있어요.”
덤으로 우두머리 마수를 현장에서 검거할 기회도 사라지고.
성녀가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 발언 아래 깔려 있는 계산은 그럴 터였다. 벌써부터 문제가 복잡했다. 내심 후회가 드는 순간이었다.
편지고 뭐고 무시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고를걸.
하지만 그랬다가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또 죄책감에 불면의 밤을 보냈을 터였다.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답답한 심정이었다.
편지를 받더라도 나 말고 더 뛰어난 인재들이 있을 텐데, 왜 하필 나에게.
권력도 무력도 부족한 내가 아닌가. 그 점이 못내 억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계획을 꺼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밤은 일단 저와 성녀님, 그리고 유렌 셋이서 돌아가며…….”
“누님, 이안!”
왁자한 소음이 들여온 것은 그때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나와 성녀의 시선이 동시에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옥빛 머리카락을 가진 중성적인 외모의 사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렌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에는 벌써 보호아동으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얹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왁자한 소음은 유렌의 뒤를 따르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떠들며 내는 소리였다. 고아원 주변을 정찰하겠다더니, 어느새 아이들과 친해졌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유렌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와 성녀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그를 향하자,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좀 도와줘, 이제 저녁 준비를 해야겠는데…….”
“……저녁 준비?”
느닷없는 말에 성녀의 평온한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유렌은 뭘 당연한 것을 묻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네, 저녁 준비. 들어보니까 일손이 너무 없더라고요.”
“……다른 봉사자들은?”
“마수들이 습격을 시작한 이후로 전부 도망쳤다는데요?”
제기랄, 나와 성녀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곧바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수 사냥뿐만 아니라, 아이들 뒷바라지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
다음날, 델핀은 길포드 고아원 앞에 도착했다.
타고 온 갈색 갈기의 말이 히이잉, 하고 울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델핀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목을 쓰다듬으며 말을 달래주었다.
얼핏 보기에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델핀의 심정은 편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이 길포드 고아원의 전경을 슥 훑었다. 군데군데 깨진 곳이 보이는 낡은 건물, 지은 지 오래 된 탓인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델핀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낡은 고아원에서 뭘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델핀은 이 성적에 도움도 안 되는 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이 그녀에게 재차 강권했을 때, 델핀은 차마 갈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보았던, 금빛 눈동자.
핏물에 젖은 사내는 그것이 본래 제 모습인 양 자연스레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비명. 핏물. 그리고 신음.
모두 델핀의 것이었다. 팔과 다리가 조각나고, 인간이 아닌 장작처럼 취급당하는 그 굴욕과 공포.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델핀의 핏빛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선을 내리깔고, 손톱을 아작아작 깨물었다.
그날 밤 보았던 사내는 괴물이었다. 수많은 마수와 악인들을 처치해 온 델핀이었지만, 그녀가 봐온 그 어떤 적보다도 이안이 무서웠다.
그 사실이 델핀의 자존감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자비를 구걸하던 그녀의 모습이 눈만 감으면 떠올랐다. 더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델핀은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수치심보다 안도감이 든다는 점이었다.
미친년, 고작 한 번 졌다고 꺾일 대로 꺾여 버렸다.
그리고 더더욱 미쳐버릴 것 같은 것은, 그녀를 이토록 처참히 망가트린 상대와 앞으로 2주 동안을 함께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그가 손도끼라도 드는 날이면 델핀의 무릎이 절로 꺾일지도 몰랐다.
차라리 무릎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쳐박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 용서를 해주리라는 보장이라도 있었다. 안심이 될 터였다.
정신머리를 고쳐 놓겠다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단 말인가.
델핀을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흥, 이제야 도착했구만.”
태연한 척 말하면서, 소녀는 말안장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어차피 키가 작아서 말도 몰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델핀의 뒤에 얹혀 온 주제에, 참 건방진 말투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 그리고 커다란 고깔모자가 특징적인 인형 같은 외모의 소녀.
엘시 라이넬라였다. 델핀과는 앙숙이기도 했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지?”
“내가 왜? 앞으로 2주를 함께할 동료인데, 오히려 내게 잘 봐달라고 이 정도 친절은 베풀어야 하는 거 아니야?”
싸가지 없는 년, 하여간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델핀과 엘시는 그렇게 얼마간 서로를 노려보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화조차 나누기 싫었다. 델핀은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했다.
고아원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아이들이 내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틈새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진동.
델핀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그녀를 망가트린 사내의 목소리였다. 이제는 도대체 무슨 꼴을 보이라고 그녀를 불러낸 걸까.
이미 박살날 대로 박살난 뒤였다. 델핀은 하늘에 맹세코 이안에게 반항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앞에서 날붙이를 꺼내는 일은 일절 없으리라고, 가문의 명예를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흠칫 굳어버린 제 딱딱한 팔 근육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델핀은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고아원의 대문을 열어제꼈다.
끼이익, 하고 낡은 문 특유의 거슬리는 소음이 일었다. 그 너머에는, 그날 밤 피투성이로 도끼를 휘두르던 남자가 서 있었다.
“야, 야! 너 그만 뛰랬지! 벨, 너는 여자애들 좀 괴롭히지 마! 돌겠네, 진짜… 어라?”
허름한 차림을 한 수십 명의 아이들 사이에서, 손에 대걸레를 쥔 채로.
델핀이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이는 몰골이었다. 머리가 새하얘진 그녀가 얼어붙어 있는데, 사내는 만면에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델핀 선배, 엘시 선배! 마침 잘 왔어요! 그쪽에 있는 빗자루 좀 가져다줄래요?”
빗자루? 델핀의 눈동자가 측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대문간에 기대어진 낡은 빗자루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지금 그까짓 잔심부름이나 하라고 부른 건가?
델핀은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였다. 귀족에게는 귀족의 역할이 있었으며, 평민에게는 평민의 역할이 있었다.
최소한 청소와 같은 허드렛일은 귀족의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델핀과 같은 대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혹시 몰랐다. 델핀의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자존심을 부숴버리고 싶었는지도.
델핀은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물론 사내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자그마한 불평밖에 짜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왜……! 왜, 왜 그, 그래야 하는데…….”
델핀은 감히 사내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수치스럽고 분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던 그 순간.
툭, 하고 그녀를 지나쳐 누군가가 빗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총총 뛰어 사내에게로 향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잠시 동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델핀은, 곧 멍하니 그 동공을 소녀에게로 향했다.
엘시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빗자루를 들더니, 충성스러운 개처럼 이안에게 향했다. 서슴없는 행동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델핀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엘시 라이넬라, 그녀도 대귀족의 일원이 아닌가. 그 자존심 강한 그녀가 아무런 내적 갈등도 없이 잔심부름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 여기!”
“고마워요, 엘시 선배.”
심지어 사내는 엘시의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모욕적인 행동이었는데, 오히려 엘시는 헤실거리는 미소를 흘리며 몸까지 사내에게 기대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델핀의 핏빛 눈동자와, 엘시의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히죽, 하고 엘시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그에 더해마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듯 우쭐거리는 눈빛까지.
델핀은 그대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