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97화 (97/649)

〈 97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8)

* * *

길포드 씨에게 들은 고아원의 사정은 처참했다.

머무르고 있는 보호 아동만 하더라도 200명을 훌쩍 넘는 곳이었다. 그 규모만 보아도 상주하는 봉사자가 몇 명은 있어야 했는데, 마수의 습격 사태 이후 길포드 고아원에 남은 봉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본래라면 임시로라도 직원을 고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길포드 고아원은 고질적인 자금난에 시달린 지 오래였고, 따라서 만약을 위한 여유 자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단적인 결과 중 하나가 군데군데 금이 간 건물들이었다. 아이들을 일일이 돌보는 일조차 불가능한데, 건물을 유지하고 보수할 여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당번을 정해 조리나 청소 등을 맡아 주었기에 망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길포드 고아원은 운영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길포드 씨는 그 점이 못내 가슴에 걸린다고 했다. 한창 배우고 자라는 데 힘 써야 할 아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벌써 자진해서 당번을 정하고 일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이곳에서 쫓겨나면 이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잔혹한 현실이었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달리 없었다. 그나마 초라한 식단이라도 매끼 밥이 나오는 길포드 고아원은 양호한 편에 속했다.

부모가 없는 아동들은 철저히 약자였다. 이는 고아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신세였으니, 감히 불평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몇몇 고아원에서는 보호 아동들을 악질적으로 착취하곤 했다. 하루에 한 끼밖에 먹이지 않으면서, 원장 소유의 농장에서 일꾼으로 부려먹는 곳도 드물지는 않았다.

대륙에는 고아가 넘쳐났고 고아원도 많았다. 그 모든 곳에 국가 권력의 감시가 미칠 수는 없었고, 심지어는 범죄 혐의를 알고도 방관하는 기조마저 있었다.

아무리 나쁜 고아원이라도 고아원이었으니까. 대륙에는 고아원이 더 많이 필요했다.

수없이 많은 고아들을 감당해줄 곳은 고아원밖에 없는 탓이었다. 보호자 없이 생존에 혈안이 된 아이들을 통제하려면, 치안과 행정에 추가적인 투자가 필요했다.

이를 반길 국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여력이 있다면, 차라리 다른 분야에 투자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다.

도시의 치안이라든지, 마을 인근의 마수 토벌이라든지, 도로의 확충이라든지 국가도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단지 그만한 자금과 인력이 없어 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토록 빳빳한 사정이었다. 이에 굳이 ‘고아’라는 골칫거리까지 추가하고 싶은 국가는 없었다.

그나마 신실한 신도가 많은 성국이 고아원에 예산을 지원해 주는 정도였다. 길포드 고아원의 예로도 알 수 있듯이, 턱없이 부족한 지원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마저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길포드 씨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도우러 오신 분들께 제대로 대접조차 하지 못하고…….”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내 눈이 흘깃 앞에 놓인 식판을 향했다.

길포드 씨가 나름 신경 쓴다고 푸짐하게 담아주었지만,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건더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 수프에 빼빼 마른 건량, 육류는 찾아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조차도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 빈약한 식단이, 마수들의 위협이 있음에도 아이들이 길포드 고아원을 떠나지 않는 이유였다.

어차피 나가 봐야 길거리에서 굶어죽거나, 질이 나쁜 고아원에 다시 수감될 뿐이었다. 그럴 바에는 마수에게 납치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길포드 고아원에 남는 쪽이 나았다.

참담했다. 나는 먹먹한 심정에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음식이 넘어가야 할 텐데,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길포드 씨의 말을 듣고도 성녀와 유렌은 태연했다. 고아원 출신이라고 했으니, 으레 어떠한 상황일지 대략 짐작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종일 나와 함께 아이들을 관리하고, 또 식사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뒤였다. 그럼에도 불평이나 불만을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이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둘의 존재가 길포드 씨에게 힘이 되고 있음은 확실했다.

성녀는 성호를 그으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길포드 씨를 위로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길포드 형제님. 천신의 은혜가 햇살과 같은데 어찌 찬 곳과 더운 곳을 가리겠습니까? 그리고 저 또한 고아원에서 나고 자란 몸입니다. 길포드 고아원의 사정은 넉넉히 이해하고 있으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길포드 씨는 목이 메인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뱉고는, 곧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렇게 흐뭇한 눈빛으로 성녀와 길포드 씨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 감동을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엑.”

위안을 주고받던 몇 쌍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나와 성녀, 유렌에 길포드 씨까지.

그 목적지는 하나였다. 내 옆으로 나란히 앉은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를 향해서였다.

엘시 선배는 토할 것 같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델핀 선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멀건 죽을 휘휘 내젓고 있을 뿐이었다.

길포드 씨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괜히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라, 나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델핀 선배의 입에서 배배 꼬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장에서 식량을 가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아? 전력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 같은데.”

“흥, 말한테 줄 여물이랑 헷갈린 거 아니야?”

그에 더해 엘시 선배의 맞장구까지,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 않은데 이럴 때만큼은 죽이 척척 맞았다.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는 둘 다 고위 귀족이었다. 평생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온 날보다 남이 눈치를 보고 살아온 날이 더 많겠지, 그래서 때때로 이토록 눈치 없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내게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두 선배의 성격이 어떤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여차하면 손도끼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길포드 씨를 상대로는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권력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그러지 않아도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던 차였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에게 불평해 봐야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길포드 씨는 곧바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매기 시작했다. 노인이 손녀뻘에 불과한 여인들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가히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 죄,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세 분은 귀족이셨죠? 평생 이런 식사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으실 텐데…….”

그대로 두면 무릎이라고 꿇을 기세였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어 길포드 씨를 만류했다. 그리고 나름 최선을 다해 변명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길포드 씨. 델핀 선배랑 엘시 선배가 조금 솔직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때때로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저렇게 이상한 농담을 던진답니다. 하하하…….”

당연히 그럴싸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성녀가 차게 식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변명도 제대로 못해요?’

따지고 보면 잘못한 쪽은 내가 아니라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였는데, 억울했다. 그 와중에도 엘시 선배는 또 다시 눈치 없이 조잘거리려는 듯 입을 오물거렸다.

“아니, 무슨 소리야? 너도 귀족이라면 할 말은 하는… 히이익?! 노, 농담이었어요! 농담 맞아요!”

물론 제압은 간단했다. 이를 악문 채로, 손도끼 자루에 손을 가져다대자 엘시 선배는 이내 실언을 정정했다. 내 살벌한 눈빛에 그녀는 제대로 겁을 먹은 듯했다.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피면서,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쉼 없이 움직이며 스프를 퍼먹었다.

“냠냠, 맛있다… 마, 맛있어요… 지, 진짜로!”

일부러 냠냠거리는 소리까지 내는 노력이 가상했다. 나는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눈빛으로 허리춤에서 손을 뗐다.

델핀 선배는 기가 찬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심함을 담아 엘시를 노려보던 그녀는, 곧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라이넬라 가문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네. 아무리 그래도, 나 델핀 유르디나는…….”

“델핀 선배.”

나는 나지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름대로 부탁한다는 뜻이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친 델핀 선배의 홍옥을 닮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살짝 내리깔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 델핀 유, 유르디나는…….”

“선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델핀 선배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그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분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녀는 말했다.

“……노, 농담을 좋아해. 응. 농담이었어.”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떻게든 수습에 성공한 듯했다.

어떠냐는 듯 내 우쭐한 눈빛이 성녀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를 비롯해 유렌과 길포드 씨의 분위기가 묘했다.

길포드 씨는 얼떨떨한 눈으로 나와 두 선배를 번갈아보고 있었고, 유렌은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바라보는 성녀의 시선.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성녀는 제 부피감 넘치는 젖가슴 위에 성호를 그었다. 그러더니 이내 입술을 달싹이며, 내게 무언으로 속삭였다.

‘쓰레기.’

굳이 하는 확인사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고개를 처박고 식사에 열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억울했다. 그러니 이따 엘시 선배나 괴롭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길포드 고아원의 일상이었다.

나는 이 일상이 며칠 동안은 이어질 줄만 알았다.

다음날, 엘시 선배가 의문의 습격을 당하기 전까진.

나와 엘시 선배, 단 둘이 남았을 때의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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