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98화 (98/649)

〈 98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19)

* * *

그날 아침도 한결같은 일상이었다. 바쁘고, 정신없고, 피곤했다.

애정에 목마른 아이들은 어른들이라면 곧잘 따르곤 했다. 길포드 고아원의 아이들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때로는 관심을 끌어 보겠다고 심한 장난을 치거나, 정신 사납게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어린아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잘 알고 있고 있었다. 그런데도 종종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고함이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죄가 없었다. 그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속을 다독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평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성녀는 의외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내가 알기로 성녀는 꽤 까칠한 성격이었다. 외면을 가식으로 꾸미고 있지만, 나와 마주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본심이 그랬다.

나는 그녀가 얼마 견디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그만두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녀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이 떼를 쓸 때마다 쩔쩔 매는 나와 달리, 그녀는 어르고 달래야 할 때와 혼내야 할 때를 확실히 구분했다.

감탄스러운 능력이었다. 과연 성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대단한 것은 그 젖가슴뿐만이 아니었다.

유렌 또한 타고난 친화력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벌써부터 그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아이들이 수두룩했다.

그 둘은 문제가 없었다. 성녀의 말처럼 고아원 출신이라 이러한 환경에 익숙한 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범생이 있으면 열등생이 있기 마련, 최소한 고아원에 있어 열등생은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였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랬다. 여자아이 하나는 델핀 선배가 마음에 들었던 듯, 꽃을 한 송이 꺾어 델핀 선배에게 건넸다.

도도하면서도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델핀 선배였다. 그 외양만으로도 아이들의 호감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델핀 선배는 무슨 뜻이냐는 듯, 그 핏빛 눈동자를 여아아이에게로 향했다. 여자아이는 기대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선물이에요, 델핀 선생님! 꽃!”

흐응, 하고 델핀 선배는 아무 말도 없이 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물었다.

“이 꽃은 어디에 쓸모가 있지?”

“……네?”

여자아이의 눈이 멍청해졌다. 그야 그러한 반응을 돌려받을 줄은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든 말든, 델핀 선배는 다소 권태로운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예를 들어 우려내면 기침이 가라앉는다든가, 빻아서 쓰면 지혈에 효과가 있다든가. 그런 것들 있잖아요?”

“……모, 모르겠어요.”

연달아 던져진 난감한 질문에, 여자아이는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꼬마는 고개를 숙인 채 괜히 발을 흙바닥 위에 질질 끌었다.

그 모습을 아무 말도 없이 지켜보던 델핀 선배는, 이내 꽃에 오러를 주입했다.

금속조차 제대로 견뎌내지 못하는 고열의 오러였다. 당연히 연약한 꽃 따위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금빛 광채가 꽃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 녹여내듯 새하얀 재를 털어냈다.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잿가루, 여자아이는 눈을 부릅뜬 채 그 기예를 감상했다.

“심지어는 강하지도 않네… 잘 봐, 꼬마야.”

델핀 선배는 손에 묻은 재를 툭툭 털어내고는, 살짝 무릎을 굽혀 여자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여자아이는 입조차 뻥끗하지 못했다. 델핀 선배만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분위기 장악력 때문이었다.

“쓸모도 없고, 강하지도 않은 건 이렇게 되는 거야. 덧없이 사라지는 거지…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알겠니?”

툭툭, 델핀 선배는 제 손에 남은 잿가루를 여자아이의 어깨어림에 털어냈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녀 나름대로는 진지한 조언이었던 듯했다.

다만 그 잔혹한 진리를 받아들이기에 상대가 너무 어렸을 뿐.

여자아이는 제 어깨에 묻은 잿가루를 보더니, 곧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울음이 터져 나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성녀가 나서 아이를 달랬을 정도였다.

상대는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 아무리 성녀라도 함부로 타박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델핀 자매님, 조금 더 따스한 태도로 대하시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거예요.”

“고아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습니다, 성녀님. 하물며 그 정도 조언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약해빠진 애들이라면 더더욱.”

놀라울 만큼 되먹지 못한 발언이었다. 내게 강제로 끌려와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인지, 델핀 선배의 말투는 평소보다 더욱 신랄했다.

이쯤 되니 성녀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했다. 그녀는 아하하,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곧 내게 눈빛으로 물었다.

‘이 여자 뭐에요?’

나는 그저 쓴웃음으로 화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긴 누구겠는가. 제 이복동생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 냉혈한이자, 승리를 위해 비겁한 짓도 서슴지 않는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지.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내 발이 한 걸음 앞을 내딛었다.

흠칫, 하고 내 인기척을 느낀 델핀 선배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영롱한 진홍빛의 보석.

나는 그대로 걸어 델핀 선배의 곁으로 다가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델핀 선배는 움찔움찔 몸을 떨더니, 내가 곁에 다가서자 곧 입술을 짓씹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옅게 떨리는 어깨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자꾸 이러면 곤란한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델핀 선배는 아이를 돌보는 일과 맞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마침 몇 가지 일이 남아있었다. 하나는 조리를 할 때 쓸 땔감을 패는 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다.

땔감이야 내가 패면 그만이었다. 마침 손도끼도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델핀 선배에게 맡길 일은 하나뿐이었다.

“델핀 선배, 정 답답하시면 우물에서 물 좀 길어와 주시겠어요?”

“……내, 내가 왜.”

초라한 반항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델핀 선배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결심했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나를 쏘아보았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곧바로 기가 죽어 시선을 피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내, 내가 네 심부름꾼이야? 그, 그딴 허, 허드렛일은 하지 않을 거야!”

결연한 의지였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내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까지 외치는 말이었다. 나로서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사냥 같은 일이나 맡겨야 할 듯 싶었다. 최근 숲에 원숭이 마수를 찾아보러 가긴 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탐색이 장기화될 조짐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탐색을 하는 김에 사냥이라도 해서, 아이들에게 고기라도 먹이는 편이 어떨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동료들과 합의를 마쳐야겠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델핀 선배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시던가요.”

해야 할 일도 많겠다, 더 시간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이제 장작을 패러 갈 시간이었다.

내 손이 허리춤을 훑었다. 장작을 팰 손도끼를 쥐기 위해서였다.

델핀 선배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른 것은 그때였다.

“……하, 할게!”

내 의아한 눈빛이 델핀 선배를 향했다. 그러든 말든, 델핀 선배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듯했다. 오들오들 떨리는 그 몸을 웅크리면서, 델핀 선배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

“아, 아니… 하, 할게요! 그러니까 제, 제발… 다, 다진 고기만큼은… 흐윽, 요, 용서해 주세요… 흐으윽…….”

그러더니 마지막 순간에는 흐느끼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서 성녀를 쳐다보고 말았다. 그러나 성녀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더니,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가 내게 바짝 붙어 까치발을 들었다. 처음에는 피하려고 했지만, 어깨에 푹신하게 맞닿는 탄력이 느껴졌기에 얌전히 있기로 했다.

내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목소리.

“쓸 만하네요.”

나는 또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건.

**

델핀 선배가 아이들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라면, 엘시 선배는 정반대였다.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였다. 아이들이 놀릴 때마다 유독 반응이 좋으니, 짓궂은 아이들이 선을 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른의 지혜를 발휘해서 조용히 타이른다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엘시 선배는 어린아이가 상대라고 절대 참지 않았다.

곧바로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위협을 가한 적도 있었다.

“야, 넌 내가 만만하냐? 참아 주니까 진짜 좆밥처럼 보여? 와 나. 평민 새끼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어려 보이는 외모가 한몫하기도 했다.

하지만 엘시 선배는 어른이었고, 아이들은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심지어 고위 귀족이기도 한 그녀가 아닌가.

엘시 선배에게는 위협을 실체화시킬 힘이 있었다. 그것이 무력이든, 권력이든.

그렇다면 언행도 더욱 신중해야 했다. 가진 자의 한 마디는 가지지 못한 자의 열 마디보다 무거웠으니까.

이는 제국의 격언이었으며, 제국 귀족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기도 했다.

그날 밤 엘시 선배와 단 둘이 담벼락에 남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물론 엘시 선배도 델핀 선배처럼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일에서 예외로 치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아이들은 엘시 선배에게 꽤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떼어놓는다고 엘시 선배를 멀리하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엘시 선배… 어린애들이잖아요.”

숫제 부탁하는 어조였다. 어린아이라고 무작정 봐줄 필요는 없었지만, 필요 이상의 위협을 가할 필요도 없었다.

엘시 선배를 만만히 보더라도 그녀에게는 힘이 있지 않은가. 적당히 훈계하거나, 마력으로 신체능력을 강화해서 제압하는 등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엘시 선배는 위협에 집착했다. 나는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처럼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검술학부면 몰라, 엘시 선배는 마법학부에서도 상위권에 속한 인재였다. 그 정도 생각을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엘시 선배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짜증나게 굴잖아……!”

“그럼 훈계만 하면 되죠. 애를 붙잡고 쌍욕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엘시 선배는 내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한 듯했다. 입을 다문 채로 한동안 반박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랬다.

그녀는 흥, 하고 자그맣게 코웃음을 쳤다.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어둠을 틈타 더욱 깊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는, 어차피 몰라.”

“뭘요?”

나는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하지만 엘시 선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아무튼 모른다고!”

빼액, 하고 내질러지는 목소리.

엘시 선배는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서운한 듯,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그녀가 등을 돌리고 말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나는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손도끼를 보여주면 금방 끝날 일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엘시 선배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그녀에게도 어떠한 사정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관적으로 위협으로 대응하는 그 반응은 아카데미에서나 고아원에서나 한결같았다. 나름의 생존 전략이라면 그 판단의 근거 또한 존재할 터였다.

손도끼로 입을 다물게 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엘시 선배와 나는 그새 정이 꽤 들은 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나는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엘시 선배한테 외쳤다.

“조심해요! 밤에 뭐가 나올 줄 알고!”

“……신경 꺼!”

하여간 까탈스럽기는, 나는 혀를 차면서 시선을 돌렸다. 단지 우연에 불과한 행동이었다.

내 눈이 문득 담벼락 위에 멎었다.

시간이 정지했다. 숨소리가 사라지고, 심장 박동조차 내 고막을 두드리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나는 알았다. 담벼락 위에 서 있는 2m 남짓의 그림자.

제대로 된 생김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팔이 무릎 아래까지 닿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눈동자는 나를 향하고 있지 않은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로 보아 누군가를 주시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누구지?

내 눈동자가 마수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그 끝에 보이는, 커다란 고깔모자와 갈색 머리카락.

엘시 선배는 마법사였다. 지금은 실드조차 없었다.

땅을 박찬 것은 뇌리가 새하얗게 물든 직후의 일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엘시 선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엄습했다.

그때처럼, 엠마 앞에서 무력히 앉아 있어야 했던 그때처럼.

심장이 달아올랐다. 마력이 줄기줄기 뻗어 다리의 혈도를 잠식했다. 갑작스러운 마력의 급류에 혈도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핏줄이 터져 나가며 날카로운 통증을 선사했다.

마수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덮치기 직전, 나는 엘시 선배에게 소리 질렀다.

“엘시 선배!”

엘시 선배는 코웃음을 치면서, 내게로 흘깃 시선을 던지려 했다.

그보다 먼저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명백히 당황한 눈치,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마력을 응집시켰다.

무연 영창, 언어를 수인으로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고속으로 영창을 끝마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마수는 지독히도 빨랐다.

소리조차 없이 마수는 엘시 선배를 덮쳐 들어갔다. 엘시 선배가 눈을 부릅뜬 순간에는, 이미 어느새 칼날처럼 뻗은 손톱이 그녀의 지척이었다.

늦는다. 검을 휘둘러도, 손도끼를 투척해도 늦었다.

가상의 궤적이 그어졌다. 엘시 선배의 어깨를 꿰뚫는 실선, 저항 의지를 빼앗으려는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그리고 담벼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 기동력을 살려 벗어나겠지. 그러면 엘시 선배를 되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최선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감각을 집중한다.

시야가 공간을 도해했다. 얽히고설킨 선들이 나무줄기처럼 끈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온힘을 다해 그것을 잡아당겼다.

우드득, 하는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간이 왜곡된다. 내달리던 그대로 나는 그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이미 검을 뽑을 여유 시간은 종료된 지 오래였다.

오직 하나, 내 몸뚱아리를 방패막이로 삼는 수밖에.

푹, 하고 저항감 없이 내 복부를 관통하는 손톱.

옆구리 쪽인가, 감각이 애매했다.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장기까지 새어나가선 안 되는데, 나는 흐릿해지는 정신 사이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내 시야에 가득 찬 것은, 은은한 빛무리가 맺힌 마수의 손톱과 얼어붙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시 선배뿐.

당황한 것은 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 괴물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틈에 마지막 힘을 짜내, 허리춤의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남은 손이 내 복부를 관통한 손톱을 쥐었다. 어느새 정체불명의 빛무리는 사라진 뒤였다. 핏물이 줄줄 새어나왔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콰직, 하고 손도끼가 마수의 팔을 찍었다.

배후에서 습격당한 상황이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상대의 팔이 워낙 길어 어떻게든 닿긴 했다. 뜨거운 핏물이 튀기며 온기를 대기에 전달했다.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다급히 자리를 떠나는 기척.

그 다음에는 깜박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니 나는 어느새 땅을 등진 채 누워 있었고, 알 수 없는 오한이 신체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있었다.

추웠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엘시 선배가 보였다.

덜덜 떨리는 자그마한 손,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그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울먹거리는 소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달싹이는 입술로만 추론할 수 있을 뿐.

‘괜찮아?’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 녀나… 불러요…….”

지금 존나 아프니깐.

그렇게 덧붙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한 마디가 마지막이었다.

내 의식이 그대로 암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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