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99화 (99/649)

〈 99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0)

* * *

흐릿한 기억이었다.

사내가 여인과 대작을 하고 있었다. 술 한 잔에 육포 몇 개, 화려한 천막과 대비되는 초라한 술상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주향을 느낄 틈새도 없었다. 술조차도 싸구려 술인 듯했다. 두 남녀는 그저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얼근히 취기가 오른 사내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그제야 침묵이 감돌던 천막 안에 소리가 탄생했다.

“……마셔도 되는 겁니까?”

이제 와서,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질문이었다. 술을 마신 지는 한참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야 술을 마셔도 되는 거냐고 묻다니.

주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내가, 혹은 여인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듯, 여인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건 뭐 있나요? 당신도, 나도 사람인데.”

“술을 드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후후, 하고 여인은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손이 얼굴을 덮었다. 뽀얀 피부에 어느덧 홍조가 피어 있었다.

“……사실 얼마 전에 배웠어요. 정말이지,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더군요.”

“이제야 세피아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경, 여인과 대작할 때는 다른 여자의 이름을 꺼내지 않는 법입니다.”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잔, 독하다.

“예전에는, 제 힘이 자랑스러웠어요.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드문 재능이죠.”

“동감합니다.”

여인의 한탄이 이어졌다. 사내는 가끔 가다 한 마디씩을 던지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취기가 증기처럼 시야를 흐리게 덮어쓴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요…….”

“모두가 그렇습니다.”

묵직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텅 빈 대답, 사내의 금빛 눈동자는 처량한 빛을 품고 있었다.

“동부전선뿐만이 아닙니다. 북부전선도, 서부전선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성국은 성도를 버릴 준비를 하더군요.”

“성자께서 소천하셨으니까요.”

흐, 하고 여인이 제 얼굴을 쥐었다. 서글픈 미소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차라리 그때, 고아원에서 일을 매듭지었다면…….”

“무의미한 가정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여인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무 말도 없이 사내를 쳐다보았다.

은은한 열기가 어린 눈빛이었다. 취기인지, 감정인지도 모를 편린들이 엿보이는 눈.

잠시 정적을 지키고 있던 입이 열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허탈한 넋두리가 여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알고 있어요. 그저 순명(??)해야겠죠.”

“순명이라.”

“네, 순명.”

‘순명’, 그 낱말이 마치 암호라도 되는 양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았다. 사내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런다고 무언가 달라집니까?”

“달라지지는 않죠. 단지 받아들이게 될 뿐.”

여인은 그러면서 꾸벅꾸벅 머리를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취기가 한계까지 올라온 듯했다.

“내일은, 이에 대해서… 좀, 더…….”

풀썩 쓰러지듯 머리를 식탁에 처박으며, 여인은 혼곤히 잠들었다. 홀로 남은 사내는 몇 잔을 더 기울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외투를 벗어 여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여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술도 약한 주제에.”

달빛이 장막을 가르고 쏟아져 내리는 밤이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등불이 꺼지며 세상이 닫혔다. 기억의 끝이었다.

내 정신이 부상한 것은 그때였다.

허억, 하는 소리와 함께 폐부에 공기가 들어찼다. 그제야 나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말간 빛이 망막을 덮어 시야는 흐릿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감각이 돌아오자 복부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프다. 곧바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데, 내 몸을 쥐고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 이안 오빠! 정신, 정신이 들어?!”

다급한 목소리였다. 나는 흐릿한 시야를 억지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황갈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외모였다.

셀린 하스터였다. 내 소꿉친구이자, 아카데미의 검술학부 2학년.

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셀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단 입을 열었다.

“셀린…….”

“응, 응! 나 맞아, 이안 오빠!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셀린은 안심했다는 듯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얼핏 비쳤다. 봉긋한 모양새가 보기 좋은 굴곡이었다.

그래봐야 성녀보다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아무 생각이나 하며 나는 끙끙댔다. 문득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기 전까진.

그러고 보니, 셀린이라고?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맑아졌고, 주변의 풍광이 시각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낡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이 꿉꿉한 냄새, 길포드 고아원이 분명했다.

의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내 눈이 의혹을 품고 셀린을 향하고 있는데, 의외의 얼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내, 레토 아인스턴이었다.

“오, 드디어 깼냐?”

내 눈빛이 다시 멍청해졌다.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셀린과 레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입에서 의문성이 흘러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셀린, 레토… 도대체 너희가 어떻게 여길…….”

“이, 이안 선배!”

내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내 눈이 다시금 문밖을 향했다. 그곳에는 급히 달려왔는지, 제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들어선 소녀가 하나 서 있었다.

회색의 머리카락, 아쿠아마린을 닮은 짙푸른 눈동자.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는 세리아였다. 언제나 짓고 있던 차갑고 도도한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걱정이 돼서 미치겠다는 표정, 도무지 그 ‘유르디나의 싸가지’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새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구나. 그러한 감상을 품고 있는 내게 세리아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더니, 걱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안 선배, 괘, 괘햔… 으으, 괜찮으세요?”

그렇게 묻는 세리아는 어찌나 다급했는지 혀까지 씹을 정도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 세리아는 언제나 혀를 씹었구나.

나는 관자놀이를 눌러 뇌를 강제로 일깨웠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왜 내 앞에 이 셋이 보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가설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너희가 왜 여기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것, 레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해 주었다.

“너 때문에, 이 개자식아.”

꽤 살벌한 대답이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레토를 바라보고 있는데, 곧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셀린이었다. 그녀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이, 이안 오빠가 걱정돼서 말이지! 아무리 4학년 선배가 둘이나 있어도,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그래서 레토 오빠한테 졸라 실습파견지를 이쪽으로 잡은 거야.”

“난 이론 연구 과제로 대체할 생각이었다고…….”

괴로워하는 레토의 꼴을 보니 사정이 어떻게 됐는지 대략 짐작은 갔다.

내게 동행을 거부당한 셀린과 세리아는 그 길로 레토에게 향한 것이다.

레토도 3학년이니 실습 파견을 갈 자격이 있었고,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졸라대는 두 후배를 방치할 수는 없었겠지.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카데미 학생이 다섯이나 와 있는 길포드 고아원에, 낯익은 얼굴이 셋이나 더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소규모 기사단이 부럽지 않은 전력이었다.

성국의 성녀와 그 호위기사, 그리고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에 마도명문 라이넬라 가문 출신 전투마법사까지.

기존의 전력만으로도 어지간한 대형 의뢰를 수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인원이 더 늘어난 상태니, 모르긴 몰라도 원숭이 마수쯤은 뼈도 못 추릴 터였다.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은, 길포드 고아원에서의 의뢰가 단순한 마수 토벌로 끝나지는 않으리란 점이었다.

미래에서 날아온 편지에는 내가 만신창이가 된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습격’이라는 낱말도 흉흉했다. 최소한 우리 쪽에서 선공을 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처럼 위험한 장소에 비전투직 마법사인 레토나, 아직 2학년에 불과한 셀린과 세리아가 찾아오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기왕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일단 반색하며 그들을 반기기로 했다.

“마침 잘 왔어, 다들. 고아원에 일손이 부족해서 힘들었거든.”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다섯 명만으로는 아이들에, 온갖 잡무에, 숲의 탐색까지 두 손이 모자라던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제 머릿수가 늘었으니 어느 정도는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셀린도 이미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지금도 성녀님이랑 선배들이 고생 중이거든. 그런데… 야, 찐따. 슬슬 손 좀 놓지?”

셀린은 내 손을 아직까지 꼭 쥐고 있는 세리아가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세리아는, 셀린이 말을 건네자마자 곧바로 안색을 굳혔다.

그것이 모두가 아는 세리아의 모습이었다. ‘유르디나의 싸가지’, 그 차가운 인상.

“싫은데요.”

단호한 의사 표현에 셀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황갈빛 눈동자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호들갑 좀 그만 떨어, 이안 오빠가 어디 죽는대?”

“하지만 걱정되잖아요. 아닙니까?”

“야, 말만 들어보면 무슨… 누군 걱정 안한 것처럼 들린다? 너 달려오기 전까지 병실 지킨 게 누군지 몰라?!”

“어젯밤에는 제가 지켰어요. 고아원의 일만 아니었어도 종일 지키고 있었을 테고.”

서서히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레토를 바라보았다. 레토는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결국 내가 나서야 할 듯 싶었다. 으르렁거리는 셀린과,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는 세리아에게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라, 둘 다… 머리 아프잖아.”

“하, 하지만 오빠!”

“아니면 말싸움 말고 칼부림이라도 하던가. 아카데미 바깥이니 지난번처럼 난리날 일도 없고, 성녀님도 계시고 좋네.”

내 이어지는 말에 결국 셀린은 주눅이 들고 말았다. 세리아는 이미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아무리 그래도 둘 다 칼부림까지는 내고 싶지 않을 터였다.

주위가 좀 조용해지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때 보았던 원숭이 형태의 마수.

거대했다. 2m 남짓의 장신, 무엇보다 그 긴 팔에서 오는 압도적인 리치의 유리함이 인상 깊은 적이었다.

담벼락 위에 서 있을 때는 손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엘시 선배를 습격할 때 칼날처럼 뽑혀 나온 것으로 보아, 평소에는 무기를 숨기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점은, 그 손톱에 어렸던 빛무리.

“……오러?”

“무슨 소리야?”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레토가 그렇게 되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과한 상상이었다. 어떻게 마수가 오러를 쓴단 말인가. 오러는 지성과 심상을 두루 갖춘 존재만이 다룰 수 있는 마력의 결정체였다.

설령 마수가 지성을 갖출 수는 있어도, 심상을 수련할 수는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종만의 고유한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고민을 나눌 기회가 있을 듯했다. 그보다는 먼저,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엘시 선배는 어때?”

“……아, 그 여자.”

셀린의 반응은 차가웠다. 엘시 선배를 감싸다 내가 다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셀린의 행동원리는 생각보다 일관적이었다.

나를 다치게 했으면, 일단 적이었다. 세리아와 사이가 나빠진 계기도 그 때문이었다.

세리아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저와 함께 일하고 계셨어요. 하스터 양의 목소리를 듣고 이안 선배가 깨어난 줄 알았으니, 아마 엘시 선배께서도 곧…….”

“그렇네.”

나는 더 말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로 세리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눈이 닫히지 않은 문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고깔모자 하나가 갸우뚱 비치고 있었다.

“……엘시 선배.”

내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쭈뼛거리며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나타났다.

갈색 머리카락에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 그리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까지.

‘인형 같다’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아, 안녕…….”

모자챙을 만지작거리면서, 엘시 선배는 내 눈을 슬쩍 피했다. 나름대로 내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그녀와 단 둘이서 나눌 이야기가 있을 듯했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