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00화 (100/649)

〈 100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1)

* * *

엘시는 왜소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

라이넬라 가문은 마도 가문이었지만, 풍채가 당당하기로 유명했다. 일곱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 중 왜소한 체구를 타고난 것은 엘시뿐이었다.

메마른 체구를 포함해야, 그녀의 유일한 동생 루핀까지 세서 고작 둘이었다. 평범한 가정이었다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났겠지만, 라이넬라 가문은 아니었다.

고위 귀족의 세계는 냉정하다.

가족 간의 정조차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계산하는 인간들이었다. 후계 경쟁에서 예외는 없었고 어린 시절부터 중상모략이 일상화되도록 훈련받는다.

나약하게 태어난 인간에게 던져 줄 동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엘시는 당연하다는 듯 무시당했고, 심지어는 얻어맞기까지 하며 자라났다.

억울했다. 고작해야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유독 명민했던 엘시는 알고 있었다. 약하게 태어난 것이 그녀의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약 굳이 죄를 따져야 한다면 엘시의 부모에게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조차 엘시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넘어 엘시를 향한 괴롭힘을 묵인하기까지 했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 형제자매 간의 서열 정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고위 귀족의 세계에서는 상식이었다. 엘시는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언니와 오빠들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갈 때마다, 땅꼬마라고 비웃을 때마다, 어쩌다 한 대씩 얻어맞을 때마다 엘시는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엘시는 그 껍데기만큼이나 알맹이도 말랑말랑했다. 겁 많고 왜소한 꼬맹이,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 살 수 없다는 독기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기억해 두리라.

라이넬라 가문은 마도명문이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유구한 길에서, 타고난 신체 능력 따위는 하잘 것 없는 조건에 불과했다.

진정한 재능은 두뇌와 마력뿐이었다. 왜소한 체구, 나약한 근력, 그까짓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영악한 엘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형제자매의 은근한 견제조차 그녀의 독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무시와 견제의 눈초리가 질투와 경외로 뒤바뀔 때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엘시는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륙의 온갖 인재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라이넬라 가문도, 아카데미도 실력지상주의는 다르지 않았다.

곧 가문에서의 대우는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다. 아카데미에 들어선 뒤에는 그녀를 추종하는 무리마저 생길 정도였다.

힘을 얻은 엘시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복수, 가슴에 새긴 원한에 대한 정당한 혈채.

엘시는 그동안 받았던 무시와 설움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엘시는 더는 무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은근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상대가 어린 시절의 그녀처럼 벼르기라도 한다면?

나중에 더 강해져서, 엘시에게 다시 복수하러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그녀였기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실 겁 많고 소심한 소녀에 불과했던 엘시는 이를 더욱 강한 공격성으로 해소했다.

박살을 내버려서, 다시는 반항할 수 없도록.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엘시의 잔혹성은 불안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것이 엘시를 더더욱 악마로 만들었다.

그 폭력의 연쇄에서 유일한 예외는 오직 그녀의 동생 루핀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무시 받았으며, ‘누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며 그녀를 따르던 동생이었다.

엘시는 루핀을 유독 아꼈다. 온갖 설움을 당하던 시절부터 엘시는 루핀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감히 하급 귀족 따위가 그녀의 동생을 건드렸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귀공자처럼 생긴 사내였다. 검술학부답게 키는 꽤 컸고, 얼핏 드러난 근육은 우락부락하지는 않지만 탄탄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시큰둥한 태도로 엘시를 맞이했다. 그 와중에도 함께 다니던 후배는 빼달라는 배짱까지 부렸다.

나쁘지 않았다. 엘시는 그처럼 강인한 사람을 좋아했다. 부러지지 않는 강함, 그것은 엘시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동경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처럼 강한 인간을 꺾는 일도 좋아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강한 체 하고 있었을 뿐이고, 도를 넘은 폭력 앞에서는 누구나 나약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러니까 그녀만이 약해빠진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엘시는 추구했고 지금껏 얻어왔다. 그날도 마찬가지리라 여겼다.

사내가 도끼를 들기 전까진.

무시무시한 기습이었다.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등 뒤에서 비명과 핏물이 터져 나오더니 어느덧 사내는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늦었다. 엘시는 애송이가 아니었고, 단숨에 실드를 제 몸에 덧씌웠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름 숨겨둔 한 수가 있는 모양이지만, 그녀를 이길 수는 없으리라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드째로 엎어졌을 때, 엘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끼날이 번뜩일 때마다 마구잡이로 실드가 깨져나갔다. 유리조각처럼 마력의 파편이 비산했다. 그 아래에서, 엘시는 단지 비명만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실드가 깨져나갈 때까지는 얼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치켜든 도끼만이 보일 뿐이었다. 엘시는 오랜만에 공포를 되새겼다.

어린 시절, 약자일 때 받아야 했던 설움.

그것이 뒤집혀 그녀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눅진한 습기를 퍼먹는 솜처럼 엘시의 뇌리는 점차 어리고 소심했던 그날로 되돌아갔다.

무서웠다. 그래서 엘시는 사죄했다.

잘못했다고, 패배를 인정한다고.

수치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기억해 두었다가, 돌려주면 그만이다.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한 일이었다.

최소한 사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엘시 선배, 방금 전에 뭐라고 그랬죠?”

헐떡이는 숨결, 인파를 날붙이로 가르고 다가온 사내의 금빛 눈동자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흔들림 없는 눈빛에 엘시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진심이었다. 날 것의 폭력을 가하고자 하는 눈빛이었다.

엘시가 두려워 마지않던 일이었다. 그녀가 약자라고 무시했던 존재가, 그녀가 평소 행했던 대로 폭력을 되돌려주는 것.

고통과 폭력으로 엉망진창이 된 인간들을 수없이 봐온 엘시였다. 그 자리에 그녀가 놓이리란 상상을 하는 순간, 애써 이어 붙였던 잔혹함의 껍데기가 깨져 나갔다.

무서웠다. 심지어 상대는 죽일 생각이었다. 복수의 기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엘시 라이넬라는 인간의 삶이, 그대로 끝날 위기였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엘시는 애원했다.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그럼에도 사내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 사내의 도끼날이 파고들었을 때.

엘시는 질끈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이 엘시라는 소녀의 본질이었다.

겁쟁이, 나약해, 어린 시절 수없이 스스로를 힐난하던 그 말들이 다시금 부상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괜히 강한 척했다. 조금만 더 솔직히 대할걸, 그리고 함부로 덤비지 말걸.

날붙이가 날카롭게 찍어 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엘시의 덜덜 떨리는 눈이 옆을 향했다. 도끼날이 그녀의 바로 옆에 꽂혀 있었다. 엘시는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릴 뻔했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사내는 여전히 무감정한 눈빛이었다.

“……다음은, 없습니다.”

엘시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엘시를 향한 무시와 비난이 되살아났다. 마치 어린 시절처럼.

엘시는 필사적으로 대응했다. 감히 그녀를 욕하는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박살을 내버리고, 그녀의 무시무시함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잔혹한 폭력을 가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녀를 무시하는 목소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무서웠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날 느꼈던 생명의 위협이 어린 시절의 악몽과 뒤죽박죽 뒤섞였다. 마치 진흙처럼 그녀의 뇌리와 심장을 끈적하게 덮어가는 공포의 기억.

이안 페르쿠스, 그가 무서웠다. 너무나도.

그래서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엘시는 울면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불면의 밤을 지내며 비대해진 공포는 그녀에게 반항심을 앗아갔다.

다시 손도끼를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멋대로 그녀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 손도끼 앞에서만큼은, 엘시는 어린 시절의 유약한 소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만 그때와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엘시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었다. 어린 시절에 받지 못했던, 따스한 위로와 안심감.

손도끼를 볼 때마다 그 시절의 나약한 소녀로 돌아가는 엘시였다. 쓰다듬는 손길에 어느 때보다도 강한 위로를 받곤 했다.

좋았다. 영원히 받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감정이었다.

힘을 얻은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들었다. 혹은 공포와 적의로 물든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생각해 보면, 엘시가 꿈꾸었던 삶은 이렇지 않았다.

막연히 무시 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안 페르쿠스라는 이름의 사내와 함께 다니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수치스럽고 힘들었다. 앙숙 델핀과의 결전을 위해 이를 악물긴 했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권좌에 앉아 있었던 그녀는 어느새 독기가 빠져 있었다.

그래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엘시는 강했고, 또 천재였으니까.

오산이었다. 기습에 엘시는 또 다시 패배했다. 눈앞에서 며칠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당하는 꼴을 무력하게 봐야 했다.

또 다시 그녀는 비참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단지 비명만을 내지르던 계집아이.

사내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기적이었다. 피투성이였고, 만신창이였다. 진작에 꺾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 불가사의한 전의에 엘시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사내가 페르민과 올마르, 아이시아를 차례차례 무너트리고 델핀을 쓰러트릴 때까지.

강하다.

무력이 아니라, 심성이 그랬다. 엘시는 결코 갖지 못하는 강함이었다.

멋졌다.

무심코 동경했다. 그 전이 단순히 공포에 의한 굴복이었다면, 엘시는 그제야 완전히 패배라는 결과를 받아들였다. 승복이자 순종이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엘시 라이넬라 위에 있는 존재다.

그러한 생각이 새겨진 순간부터, 엘시는 그의 인정을 받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고아원에서 잔심부름을 시켜도 군말 없이 따랐다. 가끔 그의 손길이 그리워 일부러 틱틱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엘시는 이안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이안이 그녀의 존재를 긍정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났다. 엘시는 그녀를 건드리는 자를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익힌 삶의 방식이었다. 이안도 그녀를 그렇게 무너트리지 않았는가.

인정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안은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엘시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상대가 어린아이라서 봐줘야 한다고?

그렇다면 그녀의 어린 시절은? 엘시는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그 무시 받고 학대 받던 아이가 커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보라고, 제 가슴팍을 두드리며 호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짓밟아 놔야 했다. 그래야만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화가 나서 주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그 다음 순간 보게 된 광경은, 달빛을 반사하는 날카로운 은빛 손톱.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든 사내.

핏물을 흘리면서, 쓰러지는 이안의 모습.

사진첩을 넘기듯 그 모든 장면들이 뚝뚝 끊겨 엘시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엘시는 울먹거리며, 쓰러진 이안을 붙들고 있었다.

“괘, 괜찮… 흐윽, 괘, 괜찮아? 야, 야!”

사내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성, 녀나… 불러요…….”

그날 밤 보았던 이안의 모습이, 너무나 오랜 시간 엘시를 괴롭혔다.

누워도 생각이 났고 눈을 감아도 생각이 났다.

밥을 먹을 때도 피 웅덩이 위에 누운 이안의 미소가 떠올랐으며, 멍하니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엘시가 품은 감상은 하나뿐이었다.

어째서?

왜 제 몸을 던져가며 그녀를 구했을까.

못되고 이기적인 계집애가 아닌가. 어린아이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폭력의 화신이자 ‘꼬마 악당’.

엘시도 이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인정 받고 싶은 상대였고,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태생이 겁쟁이인 그녀는, 이안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제 목숨을 던져가며 구한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서워서 울어 버리겠지, 그런데 이안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엘시는 이틀만에 이안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 문앞에 서니 용기가 나지 않을까.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조마조마했다. 손이 멋대로 잘게 떨렸다.

왜 이러지, 엘시는 이 감정의 정체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엘시 선배."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엘시는 빼곰히 얼굴을 보였다. 그러자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는 금빛 눈동자.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어느덧 병실에는 이안과 엘시, 단 둘뿐이었다.

세상이 이토록 달랐다. 누군가는 가만히 있어도 걱정하는 이들이 넘치는데, 엘시는 아니었다.

그래서 엘시는 더더욱 소심한 목소리로 물어야 했다.

"……왜 구했어?"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다.

너무나 생략된 말이었다. 미안함도, 감사함도, 그 외의 여러 감정도.

스스로 생각해도 싸가지 없는 태도라 엘시는 끙끙거렸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이안에게 스스로가 어떻게 비칠지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사내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즉시.

"그냥."

엘시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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