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01화 (101/649)

〈 101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2)

* * *

“그냥.”

짧은 대답이었다. 고작해야 두 음절에 불과한 담백한 한 마디.

그러나 엘시의 뇌리를 새하얗게 표백시키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시의 눈동자가 대번에 멍해졌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지 입을 뻐끔거리다가, 곧 다물었다. 부상하는 사고의 끈들이 언어로 매듭지어지지 못했다.

단지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고.

그날 밤에 당했던 부상은 중상이었다. 복부를 관통한 손톱의 위치가 조금만 어긋났다면 이안은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엘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각오와 의지를 ‘그냥’이라는 짤막한 말로 치부해 버리는 이안의 태도가 특히나 그랬다.

그가 조금 더 뻔뻔하게 나오더라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다고 해도 엘시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목숨의 빚이란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안의 반응은, 싱거운 것을 넘어 시큰둥할 정도였다.

그래서 엘시는 더더욱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고깔모자의 챙을 붙잡고, 엘시의 시선이 내리깔렸다.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고마움도 미안함도 표할 줄 모르며 자라온 소녀였다.

은혜는 어차피 언젠가 갚아야 할 빚에 불과했다. 잘못이 있다면 상대가 이를 떠올리지 못할 만큼 짓밟는 쪽을 선호하며 살아왔다.

엘시에게 다가오는 인간은 오로지 두 종류뿐이었다.

그녀를 이용하려 들거나, 혹은 그녀를 적대하거나.

이처럼 순수한 호의를 받은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엘시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망설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한동안 엘시가 하는 양을 감상했다.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선배를 보고 품는 감상치고는 꽤 무례한 편이었다.

어느덧 이안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그냥, 구하고 싶었어요. 그뿐입니다.”

처음과 달라지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 어조는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엘시는 그것이 이안의 꾸밈없는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오히려 이안의 대답은 엘시의 사고를 미궁 속으로 빠트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자기보신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엘시가 보이는 폭력성과 잔학성조차도, 그 자기보호욕구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스스로의 안위가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녀가 아닌가.

제 목숨을 던져 가며 누군가를 구한다는 행위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를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서, 엘시는 가까스로 한 마디 질문을 짜냈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결국 살았잖습니까.”

참으로 태연한 목소리였다. 엘시는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본심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너, 너… 그때 얼마나 위험했는지 몰라?! 내장이 삐져나올 지경이었다니깐!”

“그렇게 따지면 엘시 선배가 더 위험했잖아요.”

이안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엘시의 입이 일순 다물어졌다.

그야 그렇긴 했다. 그 당시 엘시는 무방비 상태였다. 만약 그대로 습격을 당했다면, 높은 확률로 죽었을 터였다.

마수에게 납치당한다고 해봐야 그 끝은 뻔했다.

제물이나 먹이쯤으로 사용되었겠지. 원숭이 마수들의 별식으로 조리되었을 제 모습을 상상한 엘시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난다면 그 성질 더러운 엘시가 아니었다.

어느새 감사를 표하고 싶다는 목적에서 조금 벗어난 듯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일부러 그러한 마음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낯설었으니까.

모든 감정이 낯설었다. 사내를 대하는 제 숨결, 심장, 머리, 그 모든 것이.

왜 이리 숨 가쁘고 두근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부끄러워 사내와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다.

그 쑥스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엘시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 그래도 네가 대신 희생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싫어요?”

또 다시 정곡이었다.

엘시는 다급히 이안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속으로 자문했다.

싫었냐고, 그럴 리가 없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은 순수한 호의였다. 남동생 루핀을 제외하면 아무도 믿지 않던 그녀였다. 누구든 제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리라 생각했다.

지금껏 엘시가 보아왔던 인간들이란 모조리 그랬다.

도를 넘은 고통이면 충분했다. 그러면 도도한 척 하던 이들도 어느덧 엘시의 발목을 붙잡고 애원하곤 했다.

그만해 달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엘시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약자를 경멸했던 것은, 그들의 모습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울고 불며 목숨을 구걸하는 제 몰골이 환각처럼 겹쳐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 구도가 역전되었다면 저 자리에 있는 것은 그녀였을 테지, 엘시는 그 점을 못내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나약함이 너무나도 미웠다.

아무도 소녀를 긍정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녀 자신조차도.

그래서 엘시는 짤막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좋았다. 누군가 목숨을 바쳐 그녀를 지켜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존재를 긍정 받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있어 엘시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시건방진 후배였다. 엘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얼굴이 후끈거려 더더욱 모자챙을 잡아당겨야만 했다. 그러면 제 달아오른 얼굴이 가려지기라도 한다는 듯.

“그나마 다행이네요, 구해주고 나서 타박이나 듣지 않아서.”

이안의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상의 요구도 없었고 비난도 없었다. 단지 엘시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을 뿐.

병실에 정적이 내려앉자 엘시는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두근거리는 제 심장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이 소리가 혹시나 이안에게 들리면 어떡하지, 엘시는 덜컥 겁이 나고 말았다.

그 불안의 뿌리조차 알 수 없었다. 엘시는 단지, 다급하게 아무 말이나 주워섬길 따름이었다.

“……나, 나!”

내뱉어진 말에,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소녀를 향했다.

엘시의 사고회로가 헝클어졌다. 일단 입을 열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무심코 그녀는 제 본심을 내뱉었다.

숨기고 숨겨 왔던,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남동생에게마저 밝히지 않았던 비밀.

“나,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사람 아니야…….”

초라한 목소리였다. 강한 체 하던, 맹수를 가장하고 있던 고양이의 자기고백이었다.

이안은 침묵했다. 그 눈동자에 어린 감정을 읽어내기가 두려워서, 엘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눅이 든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겁도 많고, 약해빠졌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괴롭힘도 많이 받았고… 이기적이라서, 나밖에 몰라.”

흐음, 하고 사내는 침음을 흘렸다. 엘시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소녀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어느덧 내뱉는 낱말 하나하나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서글픈 고해성사였다.

“그, 그러니까 다음에는 그러지 마… 나, 별로 좋은 사람 아니니까…….”

그리고 또 다시 정적.

이안도, 엘시도 한동안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소녀만이 어깨를 파르르 떨고 있었을 뿐.

사내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알고 있었어요.”

어라, 엘시의 의아한 눈빛이 다시금 이안을 향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엘시 선배 겁 많고, 이기적이고, 싸가지 없고, 게다가 오줌싸개인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요… 바보도 아닌데, 왜 모르겠습니까?”

“……오, 오줌싸개는 아니거든?!”

엘시는 터무니없는 누명에 울컥해서 외쳤지만, 이안은 딱히 귀 기울여 듣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알면서도 구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란 소리예요. 나는 또 뭐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나 했네.”

그러면서 이안은 걱정해서 손해 봤다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엘시는 또 다시 할 말을 잃어야 했다.

우물쭈물하던 그녀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시는 잠시 시야를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다 아는데, 왜 구했어……? 그렇게 나쁜 계집애잖아.”

“그야, 제가 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니라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고민에 빠진 사내의 검지가 제 볼을 긁었다. 그는 잠깐 생각을 짜내듯 눈을 감았다가, 이내 포기했다는 눈빛이 되어 다시 눈을 떴다.

그는 단지 한 마디만을 건넸다.

“말 그대로 ‘그냥’이죠, 이유 따위는 없어요.”

그러면서 사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팔짱을 끼자 드러나는 근육이 탄탄해 보였다.

엘시는 멍하니 이안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가, 이내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눈을 돌렸다.

자꾸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살면서 하나하나 따져가며 결정하지는 못하잖아요.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엘시 선배가 나쁜 여자든 좋은 여자든 상관없이.”

“……그냥?”

“네, 그냥… 그냥, 구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끝 아닙니까?”

그렇구나. 엘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그런 것이다.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덧 가슴에 스며들어, 줄기차게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이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흐릿한 느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엘시는 난생 처음 보는 이 감각이, 너무나도 애틋했다. 누구도 믿지 못하던 소녀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호의였으니까.

낯이 뜨거웠다. 달아오른 머리를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엘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안의 시선을 자꾸만 피했다.

사내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이내 의아한 목소리가 엘시에게 던져졌다.

“왜 그래요? 감기라도 걸렸어요?”

엘시는 고깔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며,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 감정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낱말들이 필요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봄볕을 맞이한 새싹과도 같이 움을 튼다.

불꽃에 홀린 들짐승처럼 멍하니 사내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의 앞에 서면 솜이불을 덮은 듯 포근하면서도, 평행봉 위를 거닐 때처럼 조마조마했다.

이토록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낱말들을 내뱉을 수는 없어서, 엘시는 단 두 음절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냥.”

아직은 그 이름을 정의할 만큼 강렬한 색채를 가지지 못한 감정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엘시는 그때 직감하고 말았다.

오늘 싹튼 이 감정이, 감당할 수 없이 자라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엘시는, 그제야 무거웠던 마음의 담을 허물었다.

오직 한 사람을 향해서.

그 사내는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

생각해 보면, 엘시 선배가 변한 기점은 그날 이후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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