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02화 (102/649)

〈 102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3)

* * *

엘시 선배와의 재회는 짧았다.

몇 마디를 더 나누기도 전에, 엘시 선배가 뛰쳐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안부라도 물어보려던 차에 엘시 선배는 후다닥 달려 병실을 나서 버렸다. 혹시 다친 곳은 없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참 제멋대로인 선배였다.

그 점이 또 엘시 선배의 매력이겠지,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복부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붕대에는 피고름이 얹혀 있었다.

마수에게 당한 상처는 아무리 신성력을 퍼부어도 쉽사리 낫지 않는다. 그래도 성녀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곤 했는데, 아직 피고름이 새어나오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 원숭이 마수는 강하다.

성녀의 순도 높은 신셩력으로도 마기를 정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마수가 사용하는 마기 또한 그토록 강렬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은밀 행동을 했더라도 기척조차 눈치 챌 수 없던 상대였다. 내 감각은 요즘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는데, 그러한 내 감각조차 속일 수 있는 수준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이름을 받을 수준일지도 몰랐다.

하기야 그쯤은 돼야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할 터였다.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아무래도 목숨을 건 사투가 이어졌던 듯하니까.

나는 혀를 차면서도, 슬픈 눈빛을 한 채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즘 들어 몸을 너무 혹사시키고 있었다. 이러다 부상이 누적되면 또 다시 성녀의 불호령을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제 사이가 소원해졌으니 그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바보에요?”

짜증이 담긴 목소리였다. 내 눈이 흘깃 병실의 입구를 향했다.

그곳에는 은빛 머리카락에, 연분홍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유독 도드라지는 신체 굴곡이 인상 깊은 여자였다.

성녀였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더니, 곧 서슴없이 걸어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곧바로 내 멱살을 붙잡고 속삭였다.

“앞으로는, 완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잖아요?”

달콤한 체향이 얼핏 코끝을 스쳤다.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내 시야를 간질이고 있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꼴좋다고 코웃음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성녀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사감(??)과 환자를 향한 감정은 별개인 듯했다. 나는 그 박력 넘치는 협박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렇다고 엘시 선배를 죽게 둘 수는 없잖습니까.”

“조금 더 조심했어야죠!”

“그 점은 깊이 반성합니다.”

성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동안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혀를 차며 내치듯이 내 멱살을 풀어 주었다.

완력이 장난 아니었다. 유렌에게 듣기로 성녀도 무술을 수련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경지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솜씨를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대련을 요청해 봐야 성녀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해야 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덤벼들 수도 없고, 참 난감한 문제였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내게, 성녀는 한심하다는 듯 양손을 펼쳤다. 하늘을 향한 손바닥이 마치 꽃의 잎사귀처럼 보였다.

“흥, 하여간 도움이 안 된다니깐.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제멋대로 다쳐서 오더니 치료해 달라 하고. 누굴 신성력 주머니로 아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는 짙은 불만이 배어들어 있었다. 성녀가 여러모로 고생이 많긴 했으니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다만, ‘신성력 주머니’라.

내 눈이 슬그머니 성녀의 목덜미 아래를 향했다. 넘치는 존재감과 탄력을 자랑하는 흉부 굴곡, 지난번에 어깨에 닿았을 때 느껴졌던 부드러우면서도 말캉한 감촉이 떠올랐다.

성녀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어딜 봐요?”

크흠, 흠. 나는 헛기침을 하며 가까스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성녀는 더더욱 한심하다는 눈빛이 되어, 못마땅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복부 관통상에, 일부긴 하지만 내장까지 쏟아진 중상을 입어 놓고도 그쪽으로 눈이 가요? 하여간 남자들은 전부 똑같다니깐, 발정난 수캐들.”

쯧쯧, 하고 혀를 차며 그녀는 노골적인 경멸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내가 시선을 피할 뿐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자, 더욱 답답해진 그녀는 제 양감 넘치는 가슴을 팔로 받쳐 들이밀기까지 했다.

“자, 자! 보고 싶으면 실컷 봐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쯤 되니 나도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야 멋대로 다쳐온 내 잘못도 있지만, 엘시 선배를 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후회는 없었고, 전략적으로도 옳은 판단이었다.

엘시 선배는 지금 고아원에 머무르는 전력 중 유일한 전투 마법사였다. 레토도 마법사이긴 했지만 이론마법사였고, 전투가 시작되면 엘시 선배의 존재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물론 가슴을 훔쳐본 것은 명백한 내 잘못이긴 했다. 하지만 사내의 시선을 절로 끌어당기는 그 젖가슴에도 죄가 있지 않겠는가, 이 또한 천신 아루스께서 빚은 작품이거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로, 범죄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데 쓰이는 논조였지만 나는 잠시 그 사실을 망각하기로 했다.

내 입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쏘아졌다.

“……정말입니까?”

하, 하고 성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또 다시 날아드는 경멸의 눈초리.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 대신 앞으로는 멋대로 다쳐오지 마시고.”

그러면서 성녀는 보란 듯이 상반신을 굽혀 가슴을 내밀었다. 그러지 않아도 시야를 가득 채우던 흉부 굴곡이 더욱 도드라졌다.

묘한 승부욕이 생긴 나는, 아예 자세를 잡고 성녀의 가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과연 컸다. 이토록 부피 있는 가슴이 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탄력이 필요할까. 부드러운 살덩이처럼 느껴지지만, 젖가슴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촉이 따로 있었다.

옷 너머로 스치듯 지나갔던 그 감촉이 이를 증명했다. 내가 성녀의 가슴 감촉을 직접 누리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서 알고 있었다.

크기뿐만 아니라 탄력과 촉감 또한 훌륭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성녀의 젖가슴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는 위풍당당한 태도로 나를 흘겨보던 성녀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뽀얀 얼굴에 홍조가 일기 시작했다.

우물쭈물하던 성녀는, 몇 분 후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 가슴을 팔로 가렸다.

“……그, 그만 봐요.”

“아니, 마음껏 보라면서요?”

즐거운 마음으로 성녀의 신성력 주머니를 감상하던 나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기분이 되어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는 수치심으로 얼룩진 지 오래였다. 성녀는 쩔쩔 매며 말했다.

“이, 이만하면 실컷 봤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종일 볼 수도 있습니다… 설마 천신의 가장 사랑받는 처녀가, 불쌍한 성도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죠?”

“누, 누가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이대로 가면 처, ‘처녀’가 아니라 ‘치녀’잖아…….”

부끄러움에 젖어 말끝을 흐리는 성녀였지만, 일단 승부욕에 불이 붙은 나는 이대로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내게 향했던 경멸의 눈초리만큼 수치심을 느끼게 해줄 생각이었다.

나는 쯧쯧, 하고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약속을 어기면 쓰겠습니까? 원망하시려면 몇 분 전의 스스로를 원망하시죠. 자, 팔을 치우고… 아아아악!”

그러나 내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팍, 하고 가죽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내 등짝에 손바닥이 작렬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강한 힘이 실렸던지, 부상 부위까지 충격이 닿아 저릿한 통증이 뇌수를 새하얗게 태워버렸을 정도였다.

나는 곧바로 몸뚱아리를 비틀며 비명을 토해냈다. 그쯤 되니 당황한 쪽은 오히려 성녀였다.

“괘, 괘, 괜찮아요?! 이, 일단 아파도 참아요! 몸 비틀다간 부상 부위가 터질 수도 있다고요!”

신음을 흘리며, 내 원망스러운 눈빛이 성녀를 향했다. 그녀는 곧 내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머뭇거리던 성녀는 결국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 그러게 누가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래요?!”

“아니, 성녀님께서 보라 하셨으면서…….”

“하, 하여튼 이제 그만! 앞으로 그 문제를 재론하면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에 회부하겠습니다!”

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녀에게는 천신이 부여한 무지막지한 권한이 있었고, 고작해야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한 나는 그 말에 따르는 수밖에.

그래도 성녀는 미안하긴 했는지, 한결 온순해진 태도로 내 상처를 돌봐주었다.

슬슬 거동도 가능할 듯 싶었다. 나는 내 부상 부위에 감긴 붕대를 푸는 성녀를 향해 물었다.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성녀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별 일 없었냐는 말입니다.”

성녀의 눈동자에 잠시 망설이는 빛이 스쳤다. 그러더니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기나긴 숨을 내뱉었다.

“……혼수상태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몸이 근질거려요? 고아원엔 사람 많은데.”

“복수해줘야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 흉터가 남아있는 내 복부를 흘깃 바라보았다.

귀족은 받은 만큼 돌려줘야 했다.

그것이 은혜든, 원한이든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내 배에 칼빵을 놔주었다면, 내가 해주어야 할 일도 같았다.

성녀는 전의로 깊이 가라앉은 내 눈동자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델핀 자매님이 원숭이 마수와 조우했어요. 숲에서.”

다행스럽게도, 단서를 잡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날로 허리춤에 검과 손도끼를 매단 채 병실을 나섰다.

복수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

치료를 마치고 병실을 나서니 시간은 어느덧 해질녘이었다.

엘시 선배가 떠난 뒤에도 몇 시간은 더 치료를 받았던 듯했다.

그마저도 성녀니까 가능한 일이지, 성국의 고위 사제라도 이만한 상처를 치료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필요했으리란 말을 들어야 했다.

성녀가 있으니 편하긴 했다. 특히 나처럼 많이 다치는 사람은 유능한 사제를 곁에 둘수록 좋았다.

그녀가 합류한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짜증이 났었는데, 냉정히 생각해 보면 성녀는 무척 강력한 전력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으면 나는 이틀 전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신전이라고 해봐야, 말을 타고 반나절 거리였다.

복부를 관통당한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내심 천신께서 주신 행운에 감사하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고아원이 묘하게 고요했다. 아이들도 이리저리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셀린이나 세리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누구라도 마주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얼핏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내 절친한 친구 레토였다.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레토!”

“……뭐야, 이안이잖아. 너 벌써 퇴원해도 되는 거냐?”

조금 지친 듯한 목소리를 듣고, 나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여 그를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무리만 하지 않으면 될 것 같다는데,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떡하려고? 그럼 셀린도 난리가 날 텐데.”

핀잔처럼 들리지만 레토 특유의 표현 방식일 뿐이었다. 그는 마법사였고, 심성이 배배 꼬였으므로 걱정조차 솔직히 전하지 못했다.

그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 곧바로 레토에게 되물었을 뿐.

“그러고 보니, 셀린은? 아니, 셀린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다들 어딨어? 애들도 어쩐지 조용하고…….”

내 말을 듣자, 레토의 미간이 다시금 좁혀졌다. 그는 끙끙거리며 신음하다가, 내게 말했다.

“그게 말이지, 사실 델핀 선배랑 엘시 선배가 충돌을 일으켜서…….”

“……뭐? 어쩌다?”

마침 델핀 선배를 찾아가고 있던 나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녀에게서 원숭이 마수의 정보를 듣고, 이를 토대로 내가 가진 정보와 조합해서 단서를 얻으려 했던 차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델핀 선배랑 엘시 선배가 충돌을 일으키다니.

고작해야 몇 시간에 불과했다. 엘시 선배가 병실을 나서고, 내가 병실을 나선 시차는.

내 당혹감이 서린 물음에, 레토는 서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어. 단지 내가 보기 시작했을 때는…….”

*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흩뿌려졌다. 물방울이 부숴지며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고 반짝였다.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이는, 금빛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일순 그녀의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인형 같은 외모의 소녀를 돌아보는 핏빛 시선.

커다란 고깔모자를 쓴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푸른 눈동자가 살벌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달싹이는 그 앙증맞은 입술.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은,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

“……네가 뭔데, 감히 이안 님을 욕해?”

두 여인의 정체는 아카데미 최고의 앙숙, 델핀과 엘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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