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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03화 (103/649)

〈 103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4)

* * *

엘시는 기분이 좋았다. 이안의 병실에서 나선 직후부터 그랬다.

난생 처음이었다. 남동생이 아닌 타인에게 호의를 품고,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 구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 받은 것은.

적의와 원한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불꽃이라면, 호의는 봄볕과도 같아서 인생을 한층 두근거리게 만들어 주곤 했다.

단단히 긴장했던 심장 근육이 이완되고, 엘시의 표정이 말랑거리며 풀어졌다.

헤,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게다가 평생 부르지 않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엘시는 이안이 못내 듬직했다. 무력으로나 심성으로나 엘시보다 강인한 인간이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앞에 서면, 엘시는 어린 시절의 나약하고 간악한 계집애로 돌아가곤 했다.

스스로도 부정하고 말았던 추레한 본성이었다. 껍데기로 돌돌 말아 어떻게든 숨기려 애썼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그러한 엘시조차 품어주었다. 긍정해 주었고, 그녀를 지켜주었다.

인정받았다는 기쁨이 비로소 엘시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누구나 상급자에게 인정을 받길 원한다. 엘시는 왜소하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조차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다. 고위 귀족들에게 자식들이란 으레 그러한 존재로 여겨지곤 했다.

대를 잇는 도구, 혹은 정략결혼을 위한 거래조건.

형제자매의 괴롭힘을 방치한 부모에게, 엘시가 품은 애정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나마 부모자식 간이 천륜이라고 애증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

차라리 최근의 엘시에겐 이안의 인정이 더 중요했다. 어느 순간부터 매료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엘시는 수렵제의 그날부터 꾸준히 이안의 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은 말이었다.

‘그냥’ 구하고 싶었다니, 이익이니 손실이니 따질 필요도 없이 엘시를 구하고 싶었단 말이 아닌가. 오히려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엘시는 어느새 이안에게 그만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 이안이라는 인간이 차지하는 비중만큼은 아니겠지만, 엘시는 나름 이안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차차 넓혀 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 가슴에 품은 정체불명의 감정도, 그 색채를 드러내게 되겠지.

쌀쌀맞고 위협적이던 엘시의 변화는 극적이었다. 당연히 이를 눈치 챈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우선 언제나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아이들이 그랬다.

얼마 전까지는 으르렁거리다가, 이틀 전부터는 끙끙거리더니, 이제는 헤실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최소한 엘시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평소라면 절대 받아주지 않던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정도였다.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왁자한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엘시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외형적으로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고위 귀족인 만큼 바깥에 나가면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상대였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눈은 순수했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듣는 것만을 믿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눈에 비치는 이들 중, 가장 친숙한 존재가 엘시였다.

키도 작고, 생김새도동안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는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다. 단지 그 까탈스러운 성격이 유일한 오점이었는데, 이안과의 만남으로 기분이 한껏 좋아진 엘시는 성격마저 무난했다.

그날 엘시는 어린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온갖 잡무를 해결해야 했다.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도맡았다. 그 협조적인 태도에 길포드와 유렌마저 놀랐을 정도였다.

누군가 그 까닭을 물으면, 엘시는 우쭐한 표정으로 한 마디만을 던질 뿐이었다.

“그냥!”

그리고 엘시의 그 노골적인 변모를 눈치 챈 이들 중에는, 한 여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델핀 유르디나였다.

그녀는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이자, 엘시의 앙숙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왜 두 여인이 그토록 서로를 싫어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가문 사이에 원한도 없었고, 그렇다고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델핀과 엘시는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다는 듯 서로를 멀리하고 있었다. 사실, 당사자들도 그 까닭을 잘 알지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사이가 틀어졌고,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둘도 없는 앙숙이 되었다.

두 여인 모두 굽힐 줄 모르는 성깔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한몫했을 터였다. 하지만 미움이란 관심의 또 다른 방향성에 붙는 이름이라, 델핀은 평소에도 엘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엘시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는 사실을.

지금만 해도, 보라.

엘시는 헤, 하고 벌어진 입으로 눈을 감은 채였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소녀의 볼에는 옅은 홍조가 머물러 있었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원수의 기분이 좋아질수록 델핀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한동안 불쾌한 눈빛으로 엘시를 응시하던 델핀은, 이내 멋진 해결책을 떠올렸다.

엘시의 기분이 좋다면, 그녀가 친히 나서 짓밟아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기분이 꽤 좋아질 듯했다. 델핀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자마자 서슴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래 전부터 반복된 일이었다.

델핀의 기분이 좋다면 엘시가 시비를 걸었고, 엘시의 기분이 좋다면 델핀이 시비를 걸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인과관계였다.

그래서 델핀과 엘시는 기분이 좋을 때조차 서로를 꺼렸다. 어쩌다 얼굴을 마주치면 인상부터 찌푸리곤 했다.

우선 델핀은 으레 그래왔듯 엘시의 앞에 당당히 섰다.

이러면 물잔을 나르고 있던 엘시는 의아한 눈빛을 보낼 테고, 이내 델핀의 얼굴을 보자마자 기분 잡쳤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릴 터였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엘시는 델핀을 흘깃 바라보더니, 그녀를 피해 갈 길을 갈 뿐이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흥겨웠다. 델핀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 델핀을 흘겨보던 엘시의 입가에 조소가 맺힌 듯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델핀의 핏빛 눈동자가 더욱 떨떠름해졌다.

“……엘시 라이넬라.”

“응, 왜?”

델핀의 나지막한 호명에, 탁자 위에 물컵을 올려두고 있던 엘시는 느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줌의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오히려 델핀은 그래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마치 엘시에겐 그녀가 안중에도 없다는 뜻 같아서,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래 보여? 그럼, 그런 거겠지.”

평소라면 앙칼진 목소리로 신경을 긁어야 할 무렵이었다. 하지만 엘시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델핀은 흐응, 하고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급격한 변화였다.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델핀은 흥미 반, 악의 반으로 엘시의 반응을 떠보기로 했다.

“허드렛일에는 꽤 익숙해졌어? 하녀 같아 보이네.”

“하녀도 누구를 섬기는지에 따라 다르니까.”

“평민을 섬기는 하녀라? 참 고상하네.”

그러면서 델핀은 코웃음을 쳤다.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고위 귀족의 자제이자, 라이넬라 가문의 신동이라 불리던 엘시가 이제는 하녀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 꼴이 우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최후의 자존심마저 박살이 나고 말았구나, 델핀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위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엘시였다. 이러한 도발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엘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불쾌해진 기색이긴 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잠시 그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가 말없이 델핀을 응시했다. 엘시는 이내 다시 시선을 탁자 위로 돌렸다. 그녀가 다시 물잔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따르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뭔들 다르겠어? 넓게 보면, 우리 귀족들도 황제 폐하를 위해 봉사하는 일개 하인에 불과한데.”

중요한 단서였다. 느닷없이 라이넬라 가문의 악동이 애민 정신을 깨우쳤다면 라이넬라 가문의 흥복이겠지만, 그녀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황제 폐하’라는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유일하면서도 명백한 상급자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무의식적으로나마 그러한 말을 썼다는 건, 엘시가 스스로를 ‘하녀’라 부르는 까닭 또한 그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델핀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의 핏빛 눈동자가 일순 이채를 발했다.

“그래서. 엘시 라이넬라의 ‘황제 폐하’는 누구실까?”

흠칫, 하고 엘시의 움직임이 멎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델핀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그렇겠지. 네가 혼자서 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흥, 무슨 소리야? 라이넬라 가문은 언제까지나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봉신인데.”

“단지 비유일 뿐이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너무 극적인 변화라 조금 궁금해서.”

엘시는 잠시 못마땅한 기색으로 델핀을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기분이 상한 듯했다. 이만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델핀은 이미 새로운 가능성에 흥미를 품어버린 지 오래였다.

잠시 고민했다. 엘시 라이넬라가 그토록 따를 만한 사람이라, 도대체 누굴까.

바보가 아니라면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커다란 마음의 빚을 졌고, 그 이전부터 유독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던 사람.

델핀의 몸에 패배를 새기고, 자존심마저 산산조각 낸 괴물의 이름이 단박에 떠올랐다.

“……이안 페르쿠스.”

탁자를 걸레로 닦고 있던 엘시의 팔이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날카로운 적의를 담은 눈동자가 델핀을 향했다.

그제야 델핀은 희열을 느꼈다. 그래, 이래야지. 엘시 라이넬라라면 마땅히 이래야 했다.

“설마 아니겠지, 라이넬라? 정신 차리는 편이 좋아…그 사내는 무자비할뿐더러, 널 폭행하고 협박한 가해자라고.”

“……그때는, 내가 먼저 잘못했잖아.”

그 말을 듣고 델핀은 고소(??)를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엘시, 그 말이 자백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모르다니.

그리고 더더욱 우스웠다. 잘못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고위 귀족이란 본래 그런 존재였다.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존재.

그 대신 더 많은 무게를 견뎌야만 했다. 패배하는 순간 끝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삶에 임해야만 했다.

누구보다 이를 잘 실천하고 있던 사람이 엘시 라이넬라 아니었던가.

지금의 모습은 몰락이나 다름없었다. 델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야 승자의 논리일 뿐이지, 그렇게 책임의 연원을 따져 가면 누가 죄가 없겠어? 네 사랑하는 남동생을 먼저 폭행한 쪽도 그였잖아?”

엘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덧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델핀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푸훗, 하고 델핀은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비웃음이 절로 언어를 입고 내뱉어졌다.

“푸흐, 아하하… 아끼는 남동생의 복수는 고사하고, 이제는 그 도끼 살인마의 하녀를 자처하는 꼴이라? 네 동생 루핀이 보면 도대체 뭐라고 할지, 참 기대되…….”

그때였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흩뿌려졌다.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델핀의 눈동자가 일순 멍청해졌다.

엘시가 탁자의 물컵 하나를 들더니, 곧바로 델핀의 얼굴을 향해 흩뿌린 것이다. 델핀의 인생사에서 처음으로 당해보는 수치였다.

델핀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노조차 할 수 없었다.

단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로, 입술을 몇 번 달싹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델핀의 말이 내뱉어지는 일은 없었다. 살벌한 눈빛을 한 엘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기 때문이었다.

“……네가 뭔데, 감히 이안 님을 욕해?”

얼떨떨한 얼굴을 한 델핀을 두고, 엘시는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고깔모자를 벗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손이 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후우, 하고 내뱉어지는 달구어진 숨결.

“이 씨발년이 진짜.”

누가 봐도, 진심으로 화가 난 모습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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