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06화 (106/649)

〈 106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7)

* * *

흙냄새가 질펀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풀내음이 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땅바닥을 구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열한 마리나 되는 원숭이 마수들의 연계공격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푹, 하고 푹신한 흙바닥에 원숭이 마수의 손톱이 내리꽂혔다.

직전까지 내가 자리하고 있던 장소였다. 나는 곧바로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들고 있던 검에 오러를 담았다.

은은한 아지랑이를 보면 더욱 신중해질 법도 하건만, 원숭이 마수들은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더욱 미친 듯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마치 불나방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나는 불꽃이 아니었고, 저 원숭이 마수들이 휘두르는 손톱에 얼마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말캉한 살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숨을 죽이고, 은빛의 실선을 쏘아낸다.

목표는 지반에 손톱을 박아버린 원숭이 마수였다. 몸을 던진 뒤 가까스로 잡은 자세에서 쏘아진 일격이었다.

전력을 담을 수는 없었지만, 오러의 보조를 받으면 마수 하나를 관통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내 검을 막아서는 것이 있었다.

카각, 하고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원숭이 마수 하나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손톱을 내리그었다. 그러지 않아도 무게중심이 흔들린 상태에서 쏘아낸 일격이었다.

곧바로 궤도가 휘청였고, 그러한 나를 보며 마수는 특유의 징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방진 새끼, 나는 코웃음을 치며 남은 한 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내 검을 손톱으로 내리누르고 있던 원숭이의 눈이 멍청해졌다. 그것이 그가 최후로 보인 표정이었다.

콰득, 하고 내 손도끼가 다시 한 번 생명 하나를 거두었다. 골통이 박살난 원숭이는 그대로 무너지듯 땅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이제 열 마리 남았다.

그러나 쉴 틈도 없이 마수들이 땅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동시에 세 마리였다. 절묘한 시차를 두고 세 가지 방향을 점하는, 대응하기 난감한 합공.

셋이 한 번에 달려들면 몰라, 저렇게 시차를 두면 단번에 여러 마리를 양단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내 검을 붙잡으려 들지도 몰랐다.

마치 처음으로 죽였던 원숭이 마수처럼.

본능적으로 마음을 굳힌 나는 급히 검을 거두고, 들고 있던 손도끼를 내던졌다.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원숭이 하나의 이마에 손도끼가 틀어박혔다. 달려들던 힘까지 그대로 받았으니, 깊숙이 박힌 도끼날 틈새로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달밤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분수 쇼였다.

그러나 내게 이를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내 앞에 그려진 가상의 궤적을 따라 또 한 마리의 원숭이가 짓쳐들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내뻗어지는 궤도, 찌르기였다.

근육은 아직 손도끼를 투척한 힘이 채 풀리지 않아 뻣뻣했다. 그럼에 나는 악물고 근육을 억지로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손톱, 내 손이 원숭이 마수의 팔을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내 몸이 절로 반응했다. 근육과 신경말단 하나하나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 하나의 연계동작을 이루고 있었다.

성국 비전 유술, 달 뒤집기.

어느새 원숭이의 품을 파고든 나는, 어깨 너머로 넘긴 원숭이의 팔을 온힘을 다해 당겼다. 내 후방에서 달려들던 원숭이 마수는 기겁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내가 패대기친 원숭이 마수의 몸은, 제 동료의 손톱에 찢겨 나가고 말았다. 물론 나는 그가 억울하지 않도록 특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쿵, 하고 지반을 뒤흔드는 충격파가 울려 퍼졌다. 마력으로 강화된 근력과 성국의 비전이 결합된 기술이었다.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키에에에에엑!

당연히 손톱을 휘두르던 그 동료도, 그 패대기쳐진 시체 밑에 깔려 곤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처로운 비명이 숲에 울려 퍼졌다.

아직까지는 신음을 흘리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마수라도 정타로 그 충격량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단숨에 세 마리가 줄었다.

남은 것은 이제 일곱.

그러던 내 눈에 또 다시 팔을 쭉 내뻗는 원숭이 마수가 띄었다.

검집에서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단 일격, 아무리 원숭이 마수의 팔이 길더라도 검의 길이까지 합친 내 리치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 하나의 시체가 철푸덕 땅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래, 남은 것은 이제 여섯.

처음에 비해 훨씬 수월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이제 나를 잠자코 노려보는 원숭이들을 노려보았다.

“……뭘 봐? 원숭이가 봐도 내가 잘 생기긴 했나?”

원숭이들은 그 말에 곧바로 으르렁거리며 적의를 드러냈다.

조금 상처였다. 아무리 적이라도 잘 생겼다 해주면 조금 덧나나? 살면서 못 생겼단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였는데.

화가 난 나는 그대로 땅바닥을 박찼다. 원숭이 두어 마리가 달려들었고, 이어지는 피의 윤무가 정적에 잠긴 숲의 공터를 수놓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날과 날이 마주치고 시체가 하나씩 늘어갔다.

그렇게 걷고 걸어, 마지막.

내가 내던진 칼이 웅크리고 있던 원숭이의 머리를 관통했다.

푸슉, 하고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대로 풀썩 쓰러지는 마수의 육체.

물론 내 몸도 멀쩡하진 못했다. 팔과 등에 자상이 깊었다. 전투 도중에 얻은 상처였다.

아직 팔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출혈량이 상상 이상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등 근육이 제대로 척추를 잡아주지 못해, 내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상반신을 굽혀 원숭이의 이마에 꽂힌 손도끼를 뽑아냈다. 핏물이 다시 뿜어졌고, 얼마 전까지 머무르고 있던 생명을 증명하듯 시체가 한 차례 경련했다.

원숭이 세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 때 투척했던 손도끼였다. 이제 칼을 던졌으니, 내 무장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귀를 간지럽히는 킥킥거리는 비웃음 소리.

내 눈동자가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는 델핀 선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그만! 자, 자,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대들지 않을 테니까… 손도끼 공자, 아니 이, 이안 님…….”

델핀 선배뿐만이 아니라서 문제였지만.

원숭이 마수 하나가, 히죽 웃으며 델핀 선배의 새하얀 목덜미에 손톱을 들이밀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내게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지능이 뛰어난 개체가 하나쯤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와 델핀 선배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고, 투척을 하면 제압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으나 원숭이의 손톱은 이미 델핀 선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준비 자세를 취하는 순간 끝이었다.

내 눈동자와 청색의 동공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응시하기를 한참.

결국 내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손도끼를 하늘로 던져 버렸다.

빙글빙글 돌면서 치솟는 손도끼, 이제 내 손에는 무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들었다. 그러자 원숭이 마수는 끽끽거리며 희열을 표했다.

그 청색으로 타는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이 인질을 어떻게 사용해서 나를 요리할까 고민에 빠진 모습.

그래서 원숭이는 눈치 채지 못했다.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내 손도끼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팍, 하고 손도끼가 제 정수리를 찍을 무렵, 마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마수의 시체는 핏물과 뇌수를 흩뿌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열세 마리, 끝.”

내 목소리는 그제야 평온을 되찾았지만, 제 몸에 흩뿌려진 피 냄새를 맡은 델핀 선배는 아니었다.

“제, 제발… 흐으, 그, 그마안… 흑, 흐으윽…….”

이제는 흐느끼기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암울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가, 델핀 선배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델핀 선배, 끝났어요.”

“자, 잘못했어요… 주제 모르게 덤벼서, 죄, 죄송…….”

“델핀 유르디나!”

이대로는 끝이 없을 듯해서 고함을 내지르자, 델핀 선배는 마침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럼에도 아직 두려움에 젖은 눈초리는 그대로라서,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났다니까."

내 읊조림이 마수의 시체가 가득한 풍경을 덧씌웠다.델핀 선배는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다가, 제 옆에 쓰러진 마수의 시체를 발견하고 말았다.

부릅떠진 동공은 아직도 닫히지 못했다. 그리고 정수리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핏물과 싯누런 뇌수.

“……히, 히이익!”

델핀 선배는 공포에 젖어 다리를 바둥거렸다. 그녀의 몸뚱아리가 그 힘을 받아 뒤로 질질 끌렸다.

그 눈동자는, 명백히 손도끼를 향해 있었다.

손도끼가 스위치였구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달랬다. 어찌됐든 내 등에서는 피가 주륵주륵 흐르고 있었고, 팔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돌아가야 했다.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전투를 하며 보인 원숭이 마수들의 이상 행동, 통상적인 마수들이 보이는 특성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레토 같이 박학다식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었다. 혹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좋고.

그리고 이 마수들의 시체는 처분해서 일부는 내가 갖고, 일부는 고아원 운영비로 넘겨준다면 아이들도 좋아할 터였다.

사실 굳이 고아원에 떼줄 필요는 없었지만, 그새 정이 든 곳이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인 곳이었다.

어차피 난 귀족이라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하물며 길포드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 운영비로 맡긴다면 최소한 제 사익을 위해 쓰지는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귀족은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가진 자의 의무이기도 했다. 나는 그 정신을 실천하고 싶을 뿐이었다.

어차피 열세 마리나 되는 마수들도 전부 내가 죽였으니, 누군가 불만을 가질 리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의 마수 시체들을 둘러보고 있던 그때였다.

어느덧 주춤주춤 몸을 일으킨 델핀 선배가, 나를 아무 말도 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흘깃 등 뒤로 시선을 던질 무렵에야 눈치 챈 사실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델핀 선배는, 곧바로 입술을 짓씹으며 시선을 피했다.

뒤늦게 수치심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딱히 위로할 생각은 없었고, 나는 담백하게 델핀 선배의 의사를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그 말에 델핀 선배의 몸이 흠칫 떨렸다. 두려움에 젖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핏빛 동공.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던 델핀 선배는, 이내 주눅이 든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돌아가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저벅저벅 걸어 검과 손도끼를 회수했다. 델핀 선배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 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따름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가 그녀의 마음이 평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안타까운 눈빛으로 델핀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나는, 문득 잊고 있던 결심을 떠올렸다.

내 손이 델핀 선배의 어깨에 얹어졌다. 델핀 선배의 핏빛 눈동자가 멍하니 나를 응시했고, 나는 최대한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돌아가기 전에 벌 좀 받을까요?”

툭, 하고.

어느덧 델핀 선배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땅을 굴렀다.

그녀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지더니, 곧 강렬한 공포가 그녀의 눈동자를 휘감았다.

이제 벌을 받을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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