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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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유르디나는, 이안 페르쿠스가 두려웠다.
첫 패배를 안긴 사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겪은 굴욕이었다.
이후 델핀은 며칠 내내 멍하니 앉아 그날의 기억만을 복기하곤 했다.
상대는 팔 하나를 쓰지 못하는 부상자, 마수를 쓰러트리느라 지친 상태였고 델핀의 조는 기습에 성공했다. ‘패배’라는 가능성조차 떠오르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패배했다.
전략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조금 추레하긴 했지만, 최대한 불리한 변수를 제거한 계획이었다. 실제로 그때 델핀은 승리를 목전에 두지 않았는가.
델핀이 차마 고려하지 못했던 변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안 페르쿠스, 그 사내의 실력을 너무 얕보았다.
일전에도 델핀은 이안과 승부를 낸 적이 있었다. 그 과단성과 판단력에 놀랐고, 실전에서 더 큰 활약을 펼칠 인간이라는 점 또한 유념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수렵제 당일 보았던 이안의 모습은, 그러한 평가조차도 부족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페르민은 코를 뜯겨 제압당했다. 올마르는 성국의 비전 유술에 쓰러졌고, 뒤이어 아이시아마저 소드 서클의 비기로 전투불능이 되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델핀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안이 곧 쓰러지리라 생각했던 델핀에게는, 그 장면 하나하나가 충격으로 다가왔으므로.
실전에 강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승부욕과 서슴없는 폭력 행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성국의 비전 유술이나, 소드 서클의 비기는 아무리 델핀이라 해도 예상할 수 없는 변수였다.
외인에게는 절대 전수되지 않는 기술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의문이 해결될 틈도 없이, 델핀은 사내의 도전을 맞닥뜨려야 했다.
처음에는 델핀이 승기를 잡은 듯 보였다. 아무리 이안이 실전에 강하다고 해도 실력차는 명확했다. 하물며 이안은 팔 하나만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델핀은 곧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의외이긴 했지만, 감당하지 못할 변수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찰나의 일이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세리아에게 기습을 당했고, 단검을 입에 물은 사내가 엄습했다.
목젖에 닿은 칼날을 보고 델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단검마저도, 델핀이 건네주었던 물건이었기에.
완패였다.
처음으로 당한 패배였지만,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델핀의 실수였고 델핀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깔끔히 승복하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어깨에 도끼날이 틀어박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콰직, 하고 연골이 박살나는 소리가 델핀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뒤이어 내질러지는 비명 소리, 그토록 여성스러운 비명을 낸 것은 오랜만이었다.
느닷없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차라리 고통뿐만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두려웠던 것은, 이안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델핀이 저항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일말의 사정조차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말 그대로 델핀을 죽여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첫 패배의 충격으로부터 이어지는 통증과 공포에 델핀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용서를 빌었다.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그 치욕을, 델핀은 그 후로도 며칠이나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 감정은 하나의 불씨와 같았다. 일단 불길이 당겨지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델핀을 미치게 만들었다.
자존심 강한 귀족 영애에게 그날의 굴욕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종류에 속했다. 패배한 것도 모자라, 목숨을 구걸해? 나약한 계집애처럼 비명이나 내지르면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물을 마셔도, 술을 마셔도 가슴 속의 불이 꺼지지가 않았다.
쪽잠조차 자지 못하고 퀭한 꼴로 그날의 악몽만을 복기하던 결과, 델핀 유르디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래, 다시 싸우면 그만이었다.
그런다고 델핀이 목숨을 구걸했다는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덮어쓸 수는 있었다. 델핀이 원하는 것은 고작 그 정도였다.
이대로 미쳐 버리기 전에, 패배의 상처를 덮어쓸 승리의 기억.
그마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죽음이라도.
델핀은 다급했다. 이안에게 전할 편지를 쓸 당시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문까지 들먹이며 후배를 협박하다니, 추한 꼴도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델핀은 최저한의 자제심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그녀는 죽음마저 각오하고 이안의 앞에 섰다.
그리고, 졌다.
처참한 패배였다. 검은 스치지도 못했고, 델핀이 자랑하던 금사검은 이안의 금사검에 박살이 나버렸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부심도, 검사로서의 자존심도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날것의 폭력이 이어졌다. 핏물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델핀은 참았다. 다시는 그러한 수치를 재연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델핀의 상상 이상이었다.
“……죽음은 꽤 사치스러운 최후거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에, 델핀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유르디나, 알고 있겠지? 마력에 의한 상흔은 신성력으로도 치료하기 힘들다는 걸. 물론 아카데미에는 고위 사제들이 있어 어지간하면 괜찮겠지만…….”
그리고 칼날에 맺히는 은빛 빛무리.
“……이 오러로 팔을 쑤시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다리는?”
“뭐, 뭘 하려는 거야.”
공포로 젖은 델핀의 목소리를 듣고도, 사내의 금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파문이 없었다.
무감정하고 차가웠다. 델핀의 마음이 진정으로 꺾이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델핀은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를 찧고 있었다.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델핀은 굴복하고 말았다.
그날의 기억은 새까만 진흙이 되어 델핀의 머리와 가슴에 스며들었다.
모든 자존심이 박살났다. 더는 저항하고 싶은 마음조차 일지 않았다. 그 전까지 존재했던 ‘델핀 유르디나’라는 인간을, 이안은 손도끼로 내리쳐 사정없이 깨부쉈다.
무서웠다.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고, 강한 어조로 권하기라도 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시시한 의뢰에 차출당하고, 단 둘이 숲으로 향하는 그 순간까지도 델핀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들켰다. 식은땀이 흘렀다. 엘시와 싸운 것을 들켰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엘시, 그 계집애가 그새 졸졸 쫓아가 일러바쳤단 말인가? 아니, 아니었다. 엘시는 델핀과 다투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했다.
사실 그 원인을 분석해 봐야 이미 늦은 뒤였다.
단 둘이, 숲에서.
그 두 가지 조건은 델핀의 뇌리에 새겨진 악몽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진 고기가 될지도 몰랐다. 다시는 검을 들 수 없도록, 아니 그마저도 희망적인 관측에 불과했다. 인간성이 결여된 저 괴물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델핀조차 알 수 없었다.
산 채로 마수에게 사료로 던져질지도 몰랐다. 혹은 살점을 스스로 뜯게 만들지도, 아니라면 사지를 절단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수작을 쓸지도 몰랐다.
델핀이 그렇게 온갖 불길한 망상 속에서 덜덜 떨고 있을 무렵이었다.
“……진짜에요. 아니, 그럼 뭐 제가 손도끼라도 들고 싸우자 할 줄 알았습니까? 무슨 ‘손도끼 살인마’도 아니고.”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들킨 거 맞구나.
‘손도끼 살인마’는 엘시에게 이안을 비난할 때 썼던 말이었다. 엘시 또한 그 용어에 대해 사과하라고 한 전적이 있었다.
델핀의 공포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안이 자그마한 몸짓이라도 보인 그 순간, 델핀은 무심코 그 자리에 엎어져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안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델핀은 이안의 반응이 없자, 주춤주춤 몸을 일으켜야 했다.
무척이나 수치스러웠다.
마치 훈련 받는 애완견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안이 주인님이고, 델핀은 그 눈치를 열심히 살펴야 하는 강아지였다.
그러나 델핀의 추락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마수의 골통을 박살내는 손도끼를 본 순간, 델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수많은 이미지가 뒤죽박죽으로 얽혀 들었다. 그 대부분은, 핏물과 함께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내의 금빛 눈동자에 대한 기억.
어느새 델핀은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델핀은 자괴감을 느꼈다.
수치를 넘어선 절망감이었다.
끝났다. 검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델핀은 최후를 맞이했다는 좌절감이 끈적하게 뇌의 혈관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안이 도끼만 꺼내들면 이 모양이었다. 평생 저 사내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델핀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멍하니 델핀의 핏빛 눈동자가 이안의 뒷모습을 포착했다. 쏟아지는 달빛을 받은 그의 몸은 피투성이었다. 등에 입은 자상에서 핏물로 제복은 흥건히 젖은 뒤였다.
팔 또한 다친 듯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델핀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상태였다.
기습할까?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델핀이 정신을 차리고, 이안이 무장을 꺼내지 않은 이 순간.
목줄에 묶인 개가 자유를 찾을 유일한 가능성이 눈앞에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쿵쾅거리며 머리를 울렸다. 무심코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이나 델핀이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어쩌시겠습니까?”
사내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핏물에 젖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델핀의 시각을 강타했다. 손도끼로 그녀의 팔다리를 다져놓았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알고 있었구나.
그제야 델핀은 탈력감과 함께 제정신을 되찾았다. 너무나 분하고 어이가 없었다.
무력화된 그녀를 대신해서 마수와 싸워준 동료였다. 델핀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로 보아 그녀 또한 지켜주었을 터였다. 그런데 부상을 틈타 그 뒤를 노리려 하다니.
그따위 발상을 떠올린 스스로가 너무나 추했고, 또 그 이상으로 절망적이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던 이 상황마저도, 이안의 손아귀 속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던 반항심이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일종의 굴복이었다.
델핀 유르디나는 이안 페르쿠스를 이길 수 없다, 평생토록.
그 사실이 가슴에 너무나 깊숙히 새겨져서, 아팠다. 델핀은 입술을 짓씹으며 눈물을 삼켰다.
“……돌아가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역시나였다. 덤비지 않기를 잘했다는, 유르디나의 판단을 칭찬하는 의례적인 말.
기습했다면 당하는 쪽은 델핀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상상도 못할 고문을 받았겠지. 그러한 가능성을 떠올린 델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두려운 인간이었다. 그 무력뿐만 아니라 심계 또한 탁월했다.
이안은, 오늘 델핀을 시험해 보고자 이 숲에 데려온 것이다.
델핀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또 다시 이안에게 반항하지 않아서, 고작 그까짓 사실에 기뻐하는 스스로가 증오스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델핀은 망가진 뒤였다. 안전이라도 도모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이안의 손이 델핀의 어깨 위로 얹어졌다.
얼떨떨한 눈빛으로, 델핀은 이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그럼, 돌아가기 전에 벌 좀 받을까요?”
그 다음으로 내뱉어진 말이, 그 표정과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아서.
델핀의 뇌리에 몇 가지 기억이 스쳤다.
델핀은 이안을 ‘손도끼 살인마’라 모욕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감히 이안에게 반항하려는 불손한 생각마저 품었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 했다. 너무나 명료한 결론에, 델핀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주인을 무는 개에게는 처벌이 필요했으니까.
델핀은 어느덧 자연스레 그 관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의 무릎이, 저절로 꿇려졌다.
벌써 3번째 패배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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