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10화 (110/649)

〈 110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31)

* * *

세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한 열변이 토해졌다.

성녀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더듬거리며 변명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성녀님이랑은 아무 관계 아니야, 세리아… 그, 그렇죠. 성녀님?”

“그, 그래요. 주께서 주신 은혜를 나누어야 할 사명을 가진 성직자로서, 이안 형제님과는 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리아의 질척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금세 돌아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셀린 또한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나와 성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되짚어 보면, 성녀는 일전에 세리아와 셀린과 악연을 맺기도 했다. 내 병실에서 셀린과 세리아를 쫓아냈던 전적이 있는 것이다.

그 점이 세리아의 의심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서늘한 눈빛으로 무언의 추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울컥한 쪽은 성녀였다. 그녀는 나와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는지,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지, 진짜에요. 저는 성녀입니다. 성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과 사의 구분만큼은 철저해요!”

성녀를 뭐라고 생각하냐니.

‘신성력 주머니’라고, 일전에 자칭하지 않았나.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빈정거렸겠지만, 일단 성녀와 나는 일시적 동맹 관계였다. 적어도세리아를 진정시킬 때까지는 그럴 예정이었다.

내 고개가 끄덕여졌고, 성녀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말이 얹어졌다.

“그래, 세리아. 성녀님은 천신의 총애를 받는 처녀라고. 저 신성력 주…….”

꾸욱, 하고 다시 성녀가 은근슬쩍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나는 그대로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수습에 성공해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신성력만 봐도 알 수 있잖아. 함부로 연애 감정을 품진 않아. 종교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나와 성녀가 의외로 강경한 태도로 나오자, 세리아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점차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세리아는, 스스로의말이 실례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그렇긴 한데요.”

늘 보던 세리아의 모습이었다. 이제 혀만 씹으면 완벽했다.

이제야 수습 국면에 들어섰다는 증거였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성녀는 오늘따라 유독 당황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여유 넘치던 음험한 모사꾼은 온데간데없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성녀는, 결국 실언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또, 설령 저와 이안 형제님이 무슨 관계더라도, 자매님께서 뭐라 할 권리는… 아.”

다시 한 번 정적이 감돌았다. 세리아의 표정이 싸늘해졌고, 셀린 또한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성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쳤어요?”

“스, 승부욕이 강하다 보니 그만.”

성녀는 볼에 살짝 홍조를 띄운 채로, 그렇게 멋쩍은 변명을 남길 따름이었다.

그후 성녀와 세리아, 셀린 사이가 조금 멀어졌음은 두말 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

마수는 쓰러졌지만, 그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첫 번째 조언자로 레토를 택했다.

언제나 내가 가지고 있던 고민을 해결해 주었던 그였다. 이번에도 그가 큰 활약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토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마수들이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모양인데.”

“마수들이 지킨다고? 뭘?”

“난들 알겠어?”

그러면서 레토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라고 해도 모르는 것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심상치 않아. 마수들도 본질은 생물이야. 당연히 제 목숨을 버려가며 무언가를 지키려 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칼을 붙잡았다 그랬지?”

“응.”

“그리고 특정 영역에만 처박혀 있고?”

“응.”

후우, 하고 레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딱봐도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마수가 그러는 게 가능해?”

박학다식한 레토조차 그에 대해서는 짚이는 점이 몇 없는 모양이었다. 혹은 확신이 없던가.

그는 한동안 끙끙거리며 이마를 짚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으로서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길포드 씨를 찾아가 봐.”

길포드 씨는 수십 년 동안 용병으로 생활한 역전의 용사였다. 수많은 경험을 쌓았을 테니, 조언을 구하면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것이 지금 내가 길포드 씨를 독대하고 있는 이유였다.

길포드 씨는 조용히 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싸구려긴 했지만 차는 차였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 마수를 토벌한 값을 기부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덕분에한동안은 아이들 먹일 걱정이 없겠네요.”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귀족의 의무니까요. 그 돈 없다고 제가 굶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길포드 씨는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그 표정에서는 일종의 감탄마저 느껴지고 있어서, 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오히려 감탄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길포드 씨만큼 훌륭하고 선량한 사람은 드물었다. 내가 길포드 씨에게 감탄하면 몰라,그만큼 대단한 사람의 감탄을 살 만큼 나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 간질거리는 분위기를 참아낼 수는 없었던 나는, 곧장 본론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길포드 씨, 예전에 용병이었다고 하셨죠?”

“한때는 그랬죠… 나름대로 성취도 있었고, 이제는 모두 옛일입니다.”

길포드 씨는 내 질문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찻잔을 들어 찻물을 홀짝이는 그의 표정이 애수에 잠겼다.

용병 생활을 하다 보면 거칠어지기 마련인데, 길포드 씨에게는 그러한 기색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인자하고 점잖은 노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점이 신기했다.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마수를 사냥해 보신 적도 있나요?”

“수도 없이 많죠… 혹시 도련님께서는 대수해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반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대수해, 남부 열왕국에 위치한 대륙 최대 규모의 밀림이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자원과 전설이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안에 들어서는 이는 드물었다.

그곳에는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 년 동안 토벌당하지 않은, 전설적인 마수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흡혈귀’의 서식지군요.”

“네,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강한 마수가 도사리고 있지요. 저도 한때 그곳에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죠.”

후우, 하고 잠시 한숨을 내쉰 길포드 씨의 눈이 깊어졌다. 그 시야는 지금 과거의 어디쯤을 헤집고 있을 터였다.

“수십에 달하던 동료들은 마수의 손에 찢겨 죽었습니다. 대수해에서는 무엇이 독이고, 무엇이 약인지조차 알 수 없었죠. 식수조차 제대로 얻을 수 없는 그곳에서, 저는 굶주림과 피로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공포를 되새기고 있는지 길포드 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나 평온하던 그의 표정에 이러한 파문이 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한 마디를 짜냈다.

“그때 보았습니다, 지옥을… 그 이후로는 마수를 상대하기가 영 꺼려지더군요.”

길포드 씨의 이야기는 딱히 길지 않았다. 다만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괴로운 시련을 통과했는지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떠한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길포드 씨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모두 옛일이죠. 이 늙은이가 괜히 말이 샜군요. 혹시, 물어볼 일이란 것은?”

“……마수들이 무언가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말에, 길포드 씨는 허를 찔렸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마치, 대수해 같군요.”

그렇다면 원인은 하나뿐이라고, 길포드 씨는 덧붙였다.

마인(?人), 인간이 마수화된 존재.

그들은 악신 오메로스와 계약을 맺은 권속이기도 하며, 마수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대수해의 ‘흡혈귀’는 그중 가장 유명한 존재였다.

단숨에 의뢰의 난이도가 몇 단계는 뛰는 순간이었다.

**

마인이라, 나는 원장실을 나서면서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직 물증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곤란했다. 증거라도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도시의 관청이나 신전에 신고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인은 그러한 존재였다.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고 힘을 좇은 괴물들, 이는 최소한 기사단이 동원되어야 할 문제였다.

고작해야 학생에 불과한 우리들이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다.내 낯빛이 저절로 가라앉았다.

우울했다.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필요할 듯 싶었다. 식당 앞을 지나치려다가, 문득 내 발걸음이 멎은 것은 그때였다.

식당에서 얼핏 자그마한 그림자가 비쳤다. 갈색 머리카락과 커다란 고깔모자만 봐도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엘시 선배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화려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여인이었다. 그에 더해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눈빛까지.

누구인지는 뻔했다. 델핀 선배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몰래 기척을 죽이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델핀 선배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검지를 인중에 가져다댔다.

쉿,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델핀 선배는, 이내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의 기류가 흘러내렸다.

어젯밤 숲에서 돌아온 이후 델핀 선배는 마주칠 때마다 그랬다. 나로서는 도무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러든 말든, 지금 내 목표는 하나였다.엘시 선배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식탁을 닦고 있었다.

들키지 않고 그 지척까지 도달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곧장엘시 선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곧바로 엘시 선배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히,히이이이익?!”

깜짝 놀란 엘시 선배의 손에 새파란 전하가 맺혔다. 반격이라도 꾀하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살벌한 눈빛이 뒤를 향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곧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엘시 선배에게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엘시 선배.”

“이, 이안 님… 아, 아니! 너구나!”

엘시 선배는 무척이나 당황한 듯했다. 이리저리 말을 더듬는 그녀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는 못하는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나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된 듯했다. 내심 기꺼웠다.

엘시 선배는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는 엘시 선배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던 탓이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쪽은 엘시 선배였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그녀로부터 던져졌다.

“……이, 이곳은 어쩐 일이야? 뭐 필요한 일이라도 있어?”

“아니요, 뭐. 인사나 하려고 들렀죠. 엘시 선배 얼굴도 볼 겸 해서.”

으레 하는 인사치레에 불과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엘시 선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직도 나와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쑥쓰러우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이 그 맑은 미소에서 느껴졌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그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름 중대결심을 내렸다는 듯 결연한 눈빛이었다.

“……그, 그래? 그럼 혹시 뭐 시킬 일 없어?”

물론 나로서는 짚이는 곳이 없는 말이었다.

시킬 일이라, 딱히 없었다. 사실 선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꼴도 보기 좋지 않았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대부분 내가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엘시 선배의 기대를 져버릴 수가 없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무엇이라도 시키면, 당장 그대로 이행하겠다는 듯.

곤란했다. 지금으로서는 진짜로 부탁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잠시 침을 삼키고 있던 나는, 곧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아무거나 시켜서 엘시 선배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물 좀 떠다 줄래요?”

그야말로 하잘 것 없는 잔심부름이었다. 개인적으로 엘시 선배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엘시 선배는 도리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알았어! 잠시만 기다…….”

“여기.”

그러나 엘시 선배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물잔 하나가 내 앞에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멍청해졌다. 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움직였고, 그곳에는 물잔을 내민 당사자가 서 있었다.

델핀 유르디나, 제국 북부를 수호하는 암사자.

“……물잔이야, 필요했지?”

그녀가 내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멋쩍은 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조금 부끄러웠는지 볼에 옅은 홍조를 띄운 채였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던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루비를 닮은 진홍빛 눈동자와,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새파란 눈동자.

그 색감마저도 대조적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던 델핀 선배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 입가에는, 노골적인 조소가 맺혀 있어서.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단번에 싸늘해졌다. 화색이 감돌던 그녀의 낯빛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느닷없이분위기가 팽팽히 당겨졌다.

고작해야, 물 심부름일 뿐인데.

나로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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