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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11화 (111/649)

〈 111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32)

* * *

고아원에서의 새로운 일상은 단조로웠다.

새벽녘에 일어나면 셀린과 세리아와 함께 검을 휘두른다. 델핀 선배도 함께하면 좋겠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다.

우리와 어울리기에는 급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손도끼를 꺼내들면 단박에 해결될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야 델핀 선배가 가진 공포심을 점차 줄여나가기 시작한 나로서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선택이었다.

또 델핀 선배도 평생을 검도에 매진한 만큼 나름의 수련 방법이 있을 터였다. 굳이 그 방식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숲을 탐사하고, 아니면 고아원의 잡무들을 도왔다.

벌써 아이들과는 꽤 친해진 뒤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처음에는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던 델핀 선배였지만, 최근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순순히 고아원의 잡무에 협력하고 있었다.

세리아는 그 점이 못내 놀라운 듯했다.

“……어, 언니께서 빨래를?”

물에 젖은 빨랫감을 비틀어 짜내는 델핀 선배를 보고, 세리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 이안 선배…….”

어떻게든 해달라는 눈빛이었다. 세리아에게는 델핀 선배가 빨래를 하는 것이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충격인 듯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세리아는 유르디나 가문의 가신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무리 천출이라 해도 세리아는 실력 있는 검사였고, 그에 더해 델핀의 동생이기도 했다. 그 위상만 보더라도 이후 델핀 선배의 최측근으로 활약할 가능성이 컸다.

하물며 세리아가 델핀 선배에게 품은 감정은 애증이었다. 그녀는 공포와 동경, 그리고 자매애가 뒤죽박죽 섞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세리아는 제 주군이 허드렛일을 하는 꼴을 보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경악할 만도 했다. 델핀 선배는 북부의 명문 유르디나 가문의 가주가 될 몸이었다. 그 고귀한 육체를 고작 빨래를 하는 데 쓰다니.

하지만 델핀 선배가 솔선수범하겠다는데 굳이 이를 말릴 까닭은 없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내젓자, 안절부절 하지 못하던 세리아는 곧 델핀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긴장한 나머지 세리아의 낯빛이 굳었다. 언제나 그렇듯 차가운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왜 그러니, 세리아?”

꾸욱, 하고 빨래에 남은 수분을 짜내면서도 델핀 선배의 목소리는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그 도도한 목소리에 세리아는 더욱 주눅이 들고 말았다.

“아, 아무리 그래도 장차 유르디나 가문을 이끌게 되실 몸인데… 이, 이리 주세요. 차라리 제가 할게요!”

“……세리아.”

나지막이 타이르는 목소리였다. 세리아의 입이 곧바로 다물어졌다.

일전의 수렵제에서 델핀 선배에게 승리를 거둔 바 있지만, 여전히 세리아는 델핀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델핀 선배의 한 마디에 제압당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흘깃 세리아를 바라보던 델핀 선배는, 이내 무심한 시선을 다시금 빨랫감으로 향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니까 해야 하는 거야. 너는, 나를 제 앞가림도 못하는 못난 가주로 만들고 싶은 거니?”

“아, 아닙니다! 그, 그게 아니라…….”

“……네 걱정은 알고 있단다.”

한숨과 함께 뱉어진 말이었다.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면서 델핀 선배의 시선을 피했다.

저 구도,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쩐지 나를 대하는 델핀 선배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건방진 생각이 아닐까 싶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잘 것 없는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 큰 일도 해내지 못해. 지금처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을 가리는 건 사치일 뿐이야.”

“언니…….”

세리아는 묘하게도 약간 감동 받은 눈빛이었다. 잠시 후, 총총거리며 내게 돌아온 세리아는 여운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 선배, 반성했어요. 언니는 역시 강한 사람이네요.”

그렇네, 나는 알맹이 없는 맞장구를 쳐주며 델핀 선배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언젠가 세리아가 델핀 선배의 진실을 알게 되는 날이 두려웠다.

멀거니 내 눈이 델핀 선배를 향했다. 그녀는 묵묵히 물기를 짜내고 있다가, 흘깃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델핀 선배의 볼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크흠, 하고 선배의 위엄을 되찾으려는 듯 헛기침을 했지만 이제는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어제 오후의 일을 떠올렸다.

물잔을 두고 다투던 그때의 일이었다.

**

고작 물 한 잔을 부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델핀 선배가 내게 물잔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위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고 있었다.

델핀 선배를 응시하는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차가웠다.

델핀 선배는 오히려 엘시 선배의 적의가 기꺼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자신만만하고 도도한 미소, 그리고 도발이 던져졌다.

“왜 그래, 라이넬라? 손도끼 공자는 필요한 걸 얻었고, 너는 잔심부름을 하지 않아서 좋고… 너로서는 득이 되는 일뿐이잖아?”

그 멋진 미소를 닮은 당돌한 목소리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자부심과 오만함이 잘 묻어나오는 음성이었다.

기껏해야 물심부름을 하고 나서 보이는 태도치고는, 지나치게 우쭐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엘시 선배는 오히려 델핀 선배의 도발에 더욱 불이 붙은 모양새였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위협적인 소리를 흘렸다. 화가 난 고양이 같은 태세였다.

“……언제는 하녀 노릇이 싫다며, 유르디나? 이제야 주제 파악을 좀 한 거야?”

“응, 뭐. 나쁘지 않네? 특히 네가 부들거리는 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선배들이 도대체 왜 이래, 나는 난감한 기분에 관자놀이를 꾹꾹 놀러댔다. 중재를 하고 싶은데 그 원인조차 알 수 없으니 더욱 당황스러웠다.

물심부름을 한 번 더 시키면 되나?

내가 그렇게 고민에 빠진 사이,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의 말싸움은 격화되고 있었다.

“하, 꼴좋네… 유르디나? 그럼 하녀 해. 하녀 델핀 유르디나! 어감도 나쁘지 않고 좋겠네.”

“응, 하녀 할게. 나는 이안 님의 하녀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빠져.”

“……뭐?”

엘시 선배는 설마 델핀 선배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되물었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는 여전히 당당한 태도였다.

이미 승부욕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델핀 선배의 핏빛 눈동자가 희열과 투쟁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네 몫까지 하녀 노릇하면 그만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빠져도 돼.”

“그, 그거언……!”

엘시 선배의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빠지라는 대로 빠지면 그만이겠지만, 그녀는 자꾸만 머뭇거릴 뿐이었다.

상대를 궁지에 몰았음을 확신한 델핀 선배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본 엘시 선배는 울컥하고 말았다.

잠시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던 엘시 선배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내, 내가 먼저 하녀 한다고 했잖아! 왜 이제 와서 지랄인데?!”

“그야 경쟁자가 없을 때 이야기고, 무슨 일이든 더 유능한 사람을 우대하지 않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너보단 내가 나은데.”

노골적인 도발에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시 선배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이미 증오와 적의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지금 상황 자체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지 이건, 천하제일 하녀자랑이라도 되는 건가?

그것도 그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내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지금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 꼴은 아무한테도 보여선 안 된다. 두 가문의 명예와 더불어, 내 대외적 이미지까지 걸려 있는 일이었다.

덧붙여 아카데미의 최고학년 중에서도 최상위권인 둘이 이러고 있는 양을 본다면, 아카데미의 명예도 실추되겠지.

끔찍한 결과였다.

“이 썅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한 술 더 떠 엘시 선배는 흥분할 대로 흥분한 모양새였다. 그녀의 손에 파지직, 하고 옅은 전하가 맺히기 시작했다. 델핀 선배는 코웃음을 치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지난번에는 기습을 당했지만, 오늘은 어떨까?”

“당연히 네가 박살나서 울고불고 하는 결말로 정해져 있지, 이 허접아!”

‘허접’이라는 말에, 잠깐이나마 델핀 선배의 여유로운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살벌한 눈빛으로 엘시 선배를 노려보았다.

“……좋아, 그럼 이기는 사람이 하녀 노릇 하자고.”

“하녀? 흥! 나는 노예라도 좋아.”

엘시 선배는 나름 도발이라고 그러한 망발을 내뱉었다. 지금 이 자리에 라이넬라 가문의 가신이 있었다면 참담한 심정에 자살을 검토했을지도 몰랐다.

내 입에서 가까스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만…….”

그러나 분위기가 너무 과열된 탓인지, 두 여인은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델핀 선배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도발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난 개라도 하지 뭐. 멍멍!”

“그럼 난 고양이! 야옹!”

“이제 그만…….”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렇게 애원했다.

아카데미의 최고학년씩이나 돼서 말싸움은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진심을 담았으나, 내 말이 두 사람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델핀 선배가 가소롭다는 듯 다시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그래? 그럼 나는…….”

“……제발 그만!”

콰직, 하고 목재 식탁이 쪼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도끼가 식탁 위로 틀어박히며 낸 소음이었다. 식탁이 단번에 반으로 갈라지고, 물잔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 올랐다. 무지개처럼 흩뿌려지는 물방울.

말로 할 때는 죽어라 듣지 않았던 두 여인이었지만, 내가 행동에 나서자 그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엘시 선배와 델핀 선배의 몸이 땅바닥에 엎어졌다. 바들바들 떨면서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요,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제, 제발 미워하지 마! 에, 엘시 오줌싸개 할 테니까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주제 모르고 덤비지 않을게요… 제발, 제발 팔 하나로 끝내주세요…….”

쪼개진 식탁, 엎질러진 물, 그리고 음영이 사라진 눈동자로 덜덜 떨리는 말만을 반복하는 두 선배.

나는 하,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내 손이 절로 이마 위로 얹어졌다.

“……개판이네.”

그야말로, 그 감상이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이제 내가 이 개판을 수습해야 할 차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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