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35)
* * *
“한 대 더 패도 됩니까?”
가감 없이 뱉어진 말이었다. 사포질 따위는 거치지 않은, 날것의 언어.
또 무례한 말이기도 했다. 성녀는 설마 그러한 말까지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입술을 짓씹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흘러나오는 분을 삭이는 소리.
“……으, 으으으, 으으으으으으으으!”
성녀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근력이 생각보다 뛰어난 탓인지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성녀가 부르르 떠는 양을 감상했다.
저 치를 떠는 표정, 성녀에게는 그러한 감정이 어울렸다. 성녀의 연분홍빛 시선이 째릿, 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내 의도는 그대로 적중한 듯했다. 목표 달성을 확인한 내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나는 성녀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역시나 신경 써서 손해 봤어요! 이 쓰레기! 저를 볼 때마다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건가요?! 소, 손도끼로 나를 찍어 버리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폭력을 싫어하는 편이었고, 그러므로 성녀를 볼 때마다 한 대 패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성녀가 흥흥 콧소리를 내며 나를 도발해 올 때 정도?
나는 성녀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성녀를 볼 때마다 품는 주된 감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아니요, 사실 가슴 만지고 싶다는 생각도 좀 했는데.”
“만지게 해줄 것 같아요?!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에 회부하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기세요!”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성녀는 더욱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내 눈이 슬쩍 성녀의 젖가슴을 향할 기미를 보이자, 성녀는 재빨리 팔로 제 가슴을 가렸다. 경계심 어린 시선이 나를 향했다.
지난번에는 본인이 보라고 하더니, 그새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그런 겁니다.”
멋대로 내려진 결론에 성녀가 의아한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보다시피 저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물며 성인군자는 더더욱 되지 못하죠. 나름대로 욕망에 솔직한 인간입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막힘없이 쏟아지는 말이었다. 나조차도 의외라는 감상이 들 만큼 내 입에서는 솔직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그새 성녀에게 정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매일 같이 가식의 가면을 덮어쓴 채로, 인간의 선의를 함부로 믿지 못하는 그 모습에 말이다.
“성녀님한테는 쓰레기겠고, 고아들에게는 속 모를 어른이겠고, 길포드 씨한테는 사람 좋은 귀족이겠죠.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면서 나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성녀가 움찔, 하고 일순 몸을 떨었으나 내가 그녀를 추행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을 뿐.
“……어차피, 원래 착한 놈이라고 해도 안 믿을 거 아닙니까?”
성녀는 다급히 내 뒷모습을 쫓으려 했으나, 이미 내 손은 흔들어지고 있었다. 치료도 끝났으니 굳이 이곳에 남아있을 까닭은 없었다.
겸사겸사 얼떨결에 성녀의 잔소리도 피할 수 있을 테고.
일석이조였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했다.
그날 밤, 한참 동안이나 성녀가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며칠의 시간이 지나갔다.
**
심호흡을 할 때마다 폐부가 부푸는 감각이 전해졌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할수록 시야는 날카롭게 다듬어졌고, 손끝까지 치닿는 혈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오래 전 은퇴했다는 노검수, 한때는 소드 익스퍼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오지의 고아원장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는지, 그 실력만큼은 아직 현역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노검수, 그러니까 길포드 씨는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길포드 씨의 검이 곧바로 내질러졌다.
파공성을 일으키며 대기를 찢어발기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찌르기.
지금 내가 뛰어들어야 할 곳은 그 간격 안이었다. 이미 실선을 그리기 시작한 고수의 공격권으로 파고들다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반복된 지옥훈련은 내 두려움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팟, 하고 땅을 박차는 순간 세계에 직선이 죽죽 그어졌다. 전력을 다한 쇄도였다. 검이 채 내질러지기도 전에, 나는 그 지척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둔중하게 흐르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내 목젖으로 엄습하는 칼날을 보았다.
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간격을 완벽히 파고들기 위해서는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어설픈 시점에 피하려고 들면, 빈틈을 노출할 뿐이었다. 스치듯이 궤적 안에 목을 들이밀고, 그 흐름에 탑승하는 미치광이의 기술.
그것이 바로 회절(回?)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각오는 정해진 지 오래였다. 한 걸음 앞으로, 그리고 목젖에 검극이 닿기 직전에 그 흐름을 타고 빙글 돌며 품을 파고든다.
이미 수없이 머릿속에 각인해 두었던 행동원칙이었다. 그러나 찰나를 찰나로 쪼갠 아주 짧은 시간.
길포드 씨의 검이 우뚝 멎더니, 벼락같이 검면으로 내 상반신을 후려쳤다.
노회한 검객의 일격이었다. 경로를 중간에 틀었음에도 채찍과도 같이 힘을 전달하고 있었다. 내 몸이 그대로 땅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팔뚝에서 느껴졌다. 나는 신음하면서, 몸을 꿈틀거렸다.
“마지막에 망설이셨군요. 그러면 눈에 보입니다. 어설픈 상대라면 몰라, 상대가 실전 경험 풍부한 고수라면 단번에 차선책을 고를 수 있죠.”
냉담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담담히 내 실수를 늘어놓는 그 말에, 신음하고 있던 나는 울컥해서 외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주 조금 망설였을 뿐인데……!”
“실전에서는 ‘아무리 그래도’가 없습니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변명할 생각입니까?”
길포드 씨의 언어에는 그 검술만큼이나 허점이 없었다. 잠시 분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짓을 해도 도저히 마지막 순간의 망설임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도 피와 살로 빚어진 인간인데, 어찌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삶을 추종하는 것은 생물의 본성이었다. 심지어 자살을 결심한 이들마저도,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는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후회한다고 전해진다.
아직 충격이 전부 가시지 않아 나는 잠시 균형을 찾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것도 잠시, 이제 익숙하다는 듯 검을 고쳐 쥐었다.
나는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말했다.
“……다시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길포드 씨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자세를 잡기 직전.
“이안 님!”
다급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내 시선이 슬쩍 등 뒤를 향하자, 그곳에는 엘시 선배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울상을 지으면서, 내 몸 곳곳에 남은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주인을 공격받은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길포드 씨를 노려보았다.
그래봐야 그 왜소한 몸집 탓에 소형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는 길포드 씨도 마찬가지인지, 도리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녀가 재롱이라도 떠는 양을 보는 눈빛이었다.
“너, 너… 감히 평민 따위가 이안 님을, 감히!”
그러나 엘시 선배는 진심인 듯, 위협적인 어조를 내뱉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부글거리며 주위의 대기가 요동쳤다.
본래 인자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의 길포드 씨였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엘시 선배의 투정을 받아주었을 테지만, 훈련에 들어간 길포드 씨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수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당당한 태도에, 엘시 선배는 도리어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 또한 연장자에 대한 존중이 남아있었나,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평민이… 말대꾸?!”
엘시 선배의 앙증맞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봐도 생김새와 달리 세계관이 굉장히 일그러져 있는 선배였다.
엘시 선배는 곧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늙다리 새끼가, 진짜… 요즘 눈이 침침하다 보니 눈에 뵈는 게 없냐?! 야, 나 라이넬라 가문의 엘시야! 이까짓 낡아빠진 고아원쯤은 단숨에…….”
“엘시 선배.”
내 나지막한 부름에 엘시 선배는 아차, 하는 눈빛이 되어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굳이 꺼낼 것도 없이, 나는 망토에 가려진 내 허리춤을 툭툭 두드렸다.
단단한 금속질의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시 선배는 곧바로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엘시 선배의 표정이 대번에 풀어졌다.
“잘했어요, 엘시 선배.”
헤실거리는 미소, 몽롱한 눈빛. 어딜 봐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길포드 씨는 다소 얼떨떨한 눈빛이었지만, 나는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엘시 선배에게 용건을 캐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으, 응? 에헤… 레토인지 뭔지 하는 시건방진 하급 귀족 놈이 널 불러달라길래… 흐힛…….”
레토라,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최근 레토와 상의할 만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기억을 되짚던 나는 곧 뇌리에 어떠한 생각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혹시, 발견했어요? 원숭이 마수들의 근거지?”
“응, 응… 결국 탐색에 성공했나 봐, 회의를 하자면서… 조, 좀 더 쓰다듬어 줘.”
좋았어, 나는 이제야 일이 풀려가는 느낌에 내심 쾌재를 내질렀다.
그동안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 그리고 셀린과 세리아, 성녀와 유렌까지 합세해서 숲을 탐색하던 와중이었다. 원숭이 마수들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그곳을 당장 습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숭이 마수들이 얼마나 모여있을지도 모르고, 그곳에 우두머리 마수가 존재한다면 네임드급 마수도 하나 더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 전력을 모아 한 번에 급습하기로 이야기가 끝난 뒤였다. 어쩐지, 엘시 선배가 레토를 ‘시건방진 하급 귀족’이라 부르면서도 순순히 나를 부르러 온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내 눈이 슬쩍 길포드 씨를 향했다. 그는 다소 걱정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마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만으론 위험합니다.”
“정 안 되면 도망쳐 올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길포드 씨는, 고아원을 지켜주시고요.”
길포드 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제는 슬슬 이 의뢰의 비밀을 파헤칠 시간이었다.
나는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며칠 동안 수련을 제외하고는 휴식에 전념한 결과, 몸은 어느덧 만전의 상태를 되찾은 뒤였다.
이 정도라면 성녀도 더는 나를 만류하지 못할 터였다. 부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긴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전력 하나하나가 소중한 총력전을 앞두고 있었으니.
어느 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시리도록 푸른 달빛과, 내 복부를 관통하던 마수의 손톱.
이제, 복수의 시간이었다.
내 눈동자가 의지로 깊이 가라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