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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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의 다용도실은 임시 작전본부가 된 지 오래였다.
널브러진 몇 가지 서류들은 레토가 일일이 수기로 작성해둔 것이었다. 그 안에는 탐색의 진척 상황과 고아원의 각종 현안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서류가 바로 고아원의 재무제표였다.
성국의 지원을 받는 곳이니 만큼, 길포드 고아원도 나름대로 장부를 쓰고 있긴 했다. 하지만 비전문가에 마땅한 교육도 받지 못한 길포드 씨가 작성한 장부는 부정확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임시로나마 레토가 고아원의 재무제표를 담당하기로 이야기가 끝난 뒤였다. 적어도 우리들이 고아원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레토가 깨달은 사실은 하나였다.
“이 고아원, 어차피 망해.”
냉담한 평가였지만 레토의 평가는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혀를 쯧쯧 차면서, 서류를 탁자 위에 내동댕이쳤다.
“수입원이 너무 없어. 오히려 어떻게 지금까지 버텼는지 이상할 정도야. 망했다면 진작에 망했어야 하는데…….”
“어차피 우리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잖아?”
이어지는 레토의 말을 틀어막은 것은, 델핀 선배였다. 언제나 그렇듯 고고한 자세로 앉아있던 그녀는, 다리를 꼰 채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그깟 고아원 하나가 망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는 태도였다.
“명심해, 아인스턴. 우리가 받은 의뢰는 어디까지나 고아원을 습격하는 마수 토벌일 뿐이야. 하다못해 지금은 그 대상이 마인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조목조목 귓전에 틀어박히는 델핀 선배의 말은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델핀 유르디나라는 인간이 가진 천부적인 카리스마였다.
담백하면서도, 늘 핵심을 짚는 낱말들.
델핀 유르디나의 언어이자, 강자의 언어였다. 느긋한 발화를 이어가는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에서는 권태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말없이 그 말을 듣고 있던 레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좋습니다, 말씀하신 김에, 우선 탐색조를 이끌었던 델핀 선배의 이야기부터 들려주시죠.”
델핀 선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다소 여유가 느껴지던 직전과는 달리, 조금쯤 조여진 목소리였다.
“유독 원숭이 마수가 자주 출몰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탐색을 계속했지. 그랬더니 특정 방향으로 향할수록 원숭이 마수가 더욱 적극적으로 습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리고 그 끝에는 동굴이 있었지.”
짤막한 증언이었다. 그러나 필요한 정보는 모두 다 들어있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일행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진지한 낯빛으로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 한 가지를 던졌다.
“동굴 안으로 진입해 보셨습니까?”
내 목소리가 들리자 델핀 선배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의 눈이 흘깃 나를 향했다가, 이내 땅바닥을 향했다.
도도하던 그녀는 이내 주눅이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딱히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델핀 선배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주위에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습니까?”
“아니요.”
대답은 델핀 선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델핀 선배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를 대신해 세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 도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면 이복자매긴 해도 자매는 자매다 싶었다.
그 도도함이나, 아름다운 외모나, 유르디나 가문을 향한 자부심까지도 닮아 있는 자매였다. 그리고 은근히 서로를 아끼고.
“하지만 언니께서는 잠재적인 위험도가 너무 높다고 판단하셨어요. 혹여 진짜로 마인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면, 당시 탐색조의 전력만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듯, 탐색조의 일원이었던 유렌도 손을 들어 발언했다.
“맞아, 마인은 진짜로 장난이 아니라고. 심지어 마수들을 조종해서 아이들까지 납치한 놈이 은거지를 만들어 놨다? 이건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되지.”
마지막으로 의견을 낸 것은 성녀였다. 탐색조는 총 4인이었으므로, 그녀를 끝으로 탐색조의 의견은 전부 나온 셈이나 다름없었다.
“불쌍한 어린양을 구제하는 건, 주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 하나하나의 어깨에 짊어진 짐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지 마세요. 아이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일 또한 소중합니다.”
다시 말해, 일단 의뢰 수행을 위해 협력은 하더라도 목숨까지는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조금 잔인한 이야기긴 했지만 상식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 고아 수백 명을 모아두더라도 아카데미 재학생 하나와 저울질 하라고 한다면, 십중팔구는 후자는 택할 터였다.
그만큼이나 아카데미의 인재들은 귀중한 자원들이었다. 하물며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원이 귀족이나 성국의 고위 인사였다.
고아원 하나는커녕 수십 개를 희생하더라도 지켜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잔인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성녀의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자애로운 성녀조차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다는 느낌도 있었다. 세상에 고아는 많고 아카데미 재학생은 부족했으니까.
델핀 선배는 여전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네. 손도끼 공자.”
애초에 탓할 생각이 없던 나였다. 순순히 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훌륭한 판단입니다. 그러다 죽었으면 개죽음에 전력까지 유출되니 심각한 실책이었겠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델핀 선배는 비로소 기세를 되찾았다. 단숨에 오만하고 도도한 태도로 돌아간 그녀를 보며, 엘시 선배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칫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그러나 엘시 선배의 자그마한 불만마저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상황이 여유롭지 못했다. 델핀 선배가 계속해서 발언을 이어갔다.
“그리고 기감에 잡힌 원숭이 마수만 하더라도 최소 수십이었어. 이미 동굴까지 가는 데 몇 마리를 베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만큼 남아있다는 뜻은 생각 이상으로 마수가 많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게 가능합니까? 숲이 넓다고 해도 마수 수백 마리를 먹일 식량은 없을 텐데요.”
내 지당한 의문에 짝, 하고 손바닥을 마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행의 시선이 단번에 그 진원지로 향했다. 발언을 정리한 쪽은 레토였다.
“그러니까 동굴을 탐사해야 하는 거지, 비밀이 있다면 그곳밖에 없어.”
그러면서 레토는 슬쩍 내게 시선을 던졌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주어졌으니, 나 보고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를 이끄는 조장이 나고, 세리아와 셀린 또한 실질적으로는 나를 따르고 있었다. 성녀야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홀로 튀어봐야 좋을 것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성녀는 마지막에 한 번 더 덧붙였다. 진지한 조언이었다.
“이안 형제님, 알고 계시겠죠? 지나치게 무리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성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도 막무가내로 나서는 내 성미를 고려해서, 적절한 수위의 행동지침을 정하라는 압박이겠지.
나도 사실 그 이상의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몇 마리일지도 모르는 마수를 이끌고, 아이들을 납치해서 암중계획을 꾸미고 있는 마인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물증만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곳에는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도 있었고, 성녀도 있었으니까.
“우선 정찰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마인 단독이라면 몰라, 몇 마리일지도 모를 마수들과 합세한다면 우리 전력만으로는 무리에요. 혹여 마인이 없다면 몰라도, 마인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물증을 확보하고 곧바로 퇴각합니다.”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일행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곳에서 마인을 상대해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요. 우선 오늘은 최대한 개인 정비를 하고, 내일 새벽녘에 출발하겠습니다.”
마수처럼 마인 또한 밤에 더욱 강해진다. 그러니 새벽녘에 출발하여 오전 무렵부터 전투를 벌이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다.
지금처럼 오후에 출발했다간 낭패를 볼 수가 있었다. 무척이나 상식적인 판단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당연하다는 듯 동의를 표했다.
그것으로 회의는 끝이었다. 목표는 정해졌고, 지금으로서 더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결전뿐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셀린이 내게 찾아왔다. 그녀는 내게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이안 오빠, 괜찮겠지?”
어릴 때부터 은근히 마음이 여렸던 그녀였다. 느닷없이 목숨을 걸고 마인을 사냥하라니, 일행 중에서 가장 실전 경험이 적은 그녀로서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마, 정 위험해지면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셀린 다음에는 레토의 차례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내게 물어왔다.
“……괜찮겠냐?”
“아니, 솔직히 지금 당장 말 타고 도망치고 싶은데.”
방금 전 셀린에게 내놓은 대답과는 영 딴판인 말이었다. 그럼에도 레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셀린과는 구도가 정반대였다.
“셀린은 네가 지켜라, 아니면 넌 내 손에 뒤져.”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레토는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스크롤이었다. 마법이 기록되어 있는 물건으로, 찢으면 소유자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만들기도 까다롭고 비싸기도 비쌌다. 레토 또한 전공이 이쪽이니 만들 수는 있겠지만, 오랜 노력을 들여야 하는 물건이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레토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2서클 화염 마법이 기록된 스크롤이야. 마수들은 대부분 불을 무서워하니까, 만일의 상황에 도망칠 때 써.”
나는 잠시 침묵했다. 레토도 귀족이긴 하지만, 넉넉한 사정은 아니었다. 한 장에 수십 골드에서 수백 골드를 호가하는 스크롤을 받아야 될지, 망설였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 또한 내가 죽고 다치는 것보다 그 스크롤 한 장을 줘버리는 편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을 터였다. 그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젠간 갚으마.”
“내일 잡을 마수들만 팔아도 갚고도 남겠다, 새끼야.”
레토는 그 말을 끝으로 떠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스크롤을 품속에 챙겼다. 그러고 보면 아직 챙겨야 할 물건들이 많았다.
엠마가 주었던 물약과, 레토가 준 스크롤, 그리고 힐링 포션도 한 병 정도만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러한 생각과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최대한 개인 정비에 열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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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날 밤, 내게 찾아온 손님은 유독 뜻밖이었다.
달빛은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돋보이게끔 하는 조명이었다. 루비를 닮은 진홍빛 눈동자가, 애절한 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간청했다.
“……벌.”
“네?”
느닷없이 등장한 낱말에, 나는 무심코 반문하고 말았지만 늘 그랬듯이 현실은 변함이 없었다.
“나한테, 벌을 줘… 제발.”
그렇게 말하는 델핀 선배의 표정은 너무나 진심으로 보여서, 나는 한동안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무난히 지나가던 하루에 돌멩이가 던져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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