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17화 (117/649)

〈 117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38)

* * *

그날 밤 델핀은 악몽을 꾸었다.

뒤죽박죽 뒤섞인 꿈이었다. 핸슨 영감이 처형당하던 날의 기억과, 이안에게 패배했던 날의 기억이 혼탁한 무게감으로 델핀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애걸복걸하는 그녀의 모습.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핏빛 눈동자와, 사내의 금빛 눈동자.

피를 뿜으며 쓰러진 핸슨 영감과, 핏물과 비명을 흘리던 자신의 육체.

불현듯 무력감이 되살아났다.

죽기 직전의 핸슨 영감을 구해내지 못했던 그날의 죄책감이, 숨이 가쁘도록 델핀을 밀어붙였다. 더듬거리면서, 델핀은 제 칼을 찾았다.

벌을 받아야 해.

내일은 마인을 상대할지도 몰랐다. 그녀의 가세는 필수불가결 했다. 그런데도 또 다시 이안의 손도끼를 보고, 백치가 돼서 주저앉는다면?

또 실패한다면?

안 돼, 실패만큼은 안 됐다.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됐다.

델핀은 제 칼로 이안이 그랬듯 제 팔을 슬쩍 그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안감이 도무지 해소가 되지 않았다.

초조해졌다.

그래서 델핀은 당장 외투를 걸치고 이안을 찾아갔다. 그는 공터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본래 명상을 하고 있는 검사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다급해진 델핀에게 그러한 사정까지 일일이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패배는 비참했다.

핸슨 영감을 빼앗기고, 그녀는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걸해야 했으며, 죽음조차 사치라는 말에 사내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패배하고 싶었다.

그 모순적인 감정의 정체를 델핀은 알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더 자비로운 승자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리긴 했다.

이안은 상냥한 승자였으니까.

패배할 가치가 있었다. 오히려 좋았다. 이안에게 당하는 패배는, 그가 가하는 처벌은 그녀에게 안심감을 주었다.

소중한 누군가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벌을 받는다는 기쁨.

또 다시 벌을 받는다면, 내일은 떨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안에게 간청했다.

“나한테, 벌을 줘… 제발.”

사내는 그 말을 듣고 곧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는 유심히 델핀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델핀 선배, 무슨 소리…….”

“벌을 줘!”

그러나 델핀은 이안의 생각 이상으로 간절했다. 그녀가 애처로운 눈빛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 아니… 버, 벌을 주세요. 이러면 되는 거야? 응? 나, 내일 써먹어야 하잖아… 쓸 만하잖아! 그러니까, 벌해 주세요…….”

델핀의 애원에 이안은 조금 심각해진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살짝 시선을 돌린 그의 얼굴에 고뇌의 기색이 스쳤다.

델핀은 이제 땅바닥에 머리까지 박으려 했다. 이안이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콱, 하고 사내의 발길질이 엎드린 델핀의 명치를 강타했다. 강한 힘이 실린 일격에, 델핀의 숨이 막힐 듯이 들이켜졌다.

그리고 어느덧 땅을 구르고 있는 델핀의 신체.

그 강렬한 통증에, 델핀은 무심코 몸을 웅크리며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마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았기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이 급히 달려와 델핀의 뺨을 툭툭 쳤다.

“……델핀 선배, 델핀 선배! 이제야 정신이 좀 들어요? 충격 요법이란 걸 좀 써봤는데…….”

“괘, 괜… 흐으윽, 괜찮아…….”

조금 몽롱해진 눈빛으로, 델핀은 그렇게 가까스로 대답했다.

숨 막히는 고통이 가신 그녀의 뇌리가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명치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는 메마른 사막 속에서 찾은 한 방울의 생명수처럼 느껴졌다.

기분 좋았다. 은근한 탈력감과, 안심감이 긴장으로 빳빳해진 근육을 이완시켰다.

델핀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난 델핀은,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안은 난감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크흠, 하고 델핀이 애써 위엄을 되찾겠다고 헛기침을 했을 무렵이었다.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그랬던 거예요?”

“이, 잊어 버려.”

델핀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헛웃음을 머금는 이안의 모습에서 그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어이없음, 델핀은 더욱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새빨개진 지 오래였다. 평생 얼굴을 붉힌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지금은 이마에서 김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후배한테 벌을 달라고 간청하다니, 수치를 넘어선 어떠한 감정이 델핀의 심장을 간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또 다시 던져지는, 이안의 질문에.

“……왜 그렇게 승패에 집착해요?”

일순 델핀의 호흡이 멎었다.

오늘 꾸었던 악몽을 털어놓아야만 하는 질문이라, 그녀는 도리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의 기억을 꺼내기에 델핀은 이미 너무 자라 있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가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이미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모습을 보여준 것 같긴 했지만, 이것만큼은 최후의 보루였다.

델핀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 불안하면, 내기나 하나 합시다.”

“……내기?”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먼저 느닷없이 찾아온 쪽은 델핀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군말 없이 이안의 제안을 기다렸다.

“네, 제 말 딱 한 번만 따라보세요. 그러면 이기게 해줄 테니까.”

“……무조건?”

“무조건, 즉시.”

델핀은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말해서 불합리한 내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이안의 말을 따라 승리해 봐야, 내기에는 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쪽이든 패배가 예견되어 있는 내기였다.

그러나 손도끼를 들고 협박하나, 내기를 빌미로 명령을 내리나 어차피 매한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고민하듯 델핀의 입이 다물어졌다.

델핀의 입술이 떼어진 것은, 그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좋아. 그런데 그 명령과 그 외의 지시는 어떻게 구분하지? 또 내기의 대가는?”

“그때는 델핀 선배 대신 ‘델핀 유르디나’라고 부를게요. 그리고, 제가 이기면 앞으로도 제 말 듣는 걸로 하죠.”

그것이 끝이었다. 마치 패배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는 듯, 본인이 승리한 경우만을 이야기하고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그 점이 꽤 우스웠다. 델핀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내심은 생각했다.

조금쯤은 믿음직스럽다고.

부하나 동료를 대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직 그 감정의 정체를, 델핀은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델핀의 이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델핀이 그렇게 이안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고 있는데, 마침 떠올랐다는 듯 이안이 입을 열었다.

“참, 그러고 보니 힐링 포션 있죠?”

델핀의 의아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이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나만 줘요. 지난번에 받아갔던 거, 불량품인 것 같던데.”

잠시 침묵하던 델핀은, 이내 미숙한 후배를 타이르듯 운을 뗐다.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손도끼 공자, 모르는 모양인데 힐링 포션에는 불량품이 존재할 수가 없…….”

“어차피 많잖아요.”

델핀은 침묵했다. 그녀의 얼떨떨한 눈빛이 이안을 향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델핀은 더는 반항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내 힐링 포션을 하나를 꺼내 바쳐야 했다.

이안은 델핀 몫의 힐링 포션을 받아가면서도 투덜거렸다.

힐링 포션을 대량으로 가지고 다닐 만큼 부유한 이들은 공간확장 마법이 걸린 용기에 대용량의 포션을 수납한다. 그러다 필요할 때가 있으면 일일이 물약병에 나눠담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이안이 물약병을 숲에 버려두고 간 탓에 여분의 물약병이 없어졌고, 어쩔 수 없이 이안은 임시로 구한 작은 병에 물약을 담아가야 했다.

전투 중에도 부서지지 않도록 강화 처리가 된 물약병은 의외로 비싼 편에 속했다. 또 대량으로 휴대하기도 불편해서, 아무리 물약병을 많이 가지는 사람도 한두 병이 고작이었다.

그 사정을 모를 리가 없는 이안은 계속해서 델핀의 속을 긁어댔다.

“이러다 땅이라도 한 번 구르면 깨지겠네요… 큰일이네, 큰일이야.”

그러지 않아도 힐링 포션을 뜯겨 화가 나 있던 델핀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것이 그녀가 보일 수 있는 항의 표시의 전부였다.

이안을 노려볼까 하다가도, 그 금빛 눈동자를 마주치기만 하면 델핀은 금세 주눅이 들고 말았으니까.

그때마다 델핀은 절절이 실감하곤 있다. 이제 자신은 더는 이 사내에게 반항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신세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는 평생을 가도 알 수 없을 터였다.

사실 이안이 보이는 태도는, 나름 델핀을 배려하려는 마음의 발로였던 것이다.

몇 번 속을 긁어 투닥거리면서, 이안이 좀 굽히는 모습을 보이면 델핀이 예전과 같은 자부심을 되찾지 않을까 하는 얕은 계산이었다.

물론 이는 실현될 수 없는 계획이었다. 델핀이 이안에게 반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전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밤, 델핀조차 모르게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명제가 하나 있었다.

벌을 받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이안으로부터.

델핀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

다음날, 일행을 대동한 나는 숲의 공터 초입에 섰다.

그 앞에는 정체불명의 동굴이 버티고 있었다.

*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