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18화 (118/649)

〈 118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39)

* * *

새벽녘의 숲은 포근한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신선한 풀내음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자연의 은혜를 상징하듯 우거진 녹음은 푸르렀고, 내리쬐는 햇빛은 따스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수백 마리의 마수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물며 마인이 고아들을 납치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곳이리라고는 더더욱.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걸음을 내딛었다. 숲에 들어온 지는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원숭이 마수들의 반응은 없었다.

마인의 조종을 받는 마수들이었다.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았을 테고, 매복 중이거나 동굴 앞에서 최후의 격전을 준비하는 듯했다.

오늘을 결전의 날로 정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마수나 마인 또한 그동안 노출된 우리의 탐색 경로를 보며 깨달았을 터였다. 비로소 승패를 정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려 일곱에 달하는 전력이 이동하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는 일행의 낯빛은 대부분 딱딱했다. 긴장으로 굳은 숨소리가 색색 귓가를 간질였다.

공기가 무거웠다.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성녀는, 내게 은근슬쩍 다가와 속닥였다.

“……위험해지면 도망친다는 말, 진짜죠?”

“목숨 걸고 농담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내 퉁명스런 목소리에 성녀는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를 흘렸다.

“워낙 당신이 막무가내라 말이죠.”

“의기가 넘친다고 해주시죠. 그냥, 당하고 사는 꼴을 참지 못할 뿐입니다.”

흐응, 하고 성녀는 조금 떨떠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뜻이냐는 듯 흘깃 그녀를 바라보자, 성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말을 반복했을 뿐.

“……또 헷갈리게 만드네요.”

“저는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헷갈리는 쪽은 늘 성녀님이고요.”

성녀는 슬쩍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긴장한 탓인지, 나와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성녀님에 주목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고작해야 세리아와 엘시 선배가 가끔 가다 힐끔힐끔 시선을 향하는 정도였다. 셀린마저도 마인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마당이었다.

일행에게는 여유가 실종되어 있었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델핀 선배와 유렌이 고작이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손이 덜덜 떨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숲의 심부에 갈수록 내 심장 박동이 점차 느려지고 있단 점이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근육이 이완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내 금빛 눈동자가 자연스레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듯한 이 느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직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과도한 긴장감보다는 묘한 고양감 쪽이 여러모로 더 나았으니까.

성녀도 다소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감이 있었다. 아무리 후방을 맡았다지만 일행의 생명을 책임지는 중책이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불안감을 해소해 보고자 내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행을 이끄는 입장이었으니, 그것이 전투에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받아줄 용의가 있었다.

방해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성녀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당신, 귀족이잖아요?”

“그렇죠.”

“평민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이상한데, 고아들까지 그렇게 신경 써요? 혹시 가정교육을 잘못 받았나?”

약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발언에, 잠시 내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나 성녀는 뻔뻔하게도 입을 삐쭉 내밀 뿐이었다.

그녀가 평소 귀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도대체 귀족의 가정교육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뻔하죠, 뭐. 선민의식과 효율주의를 최대한 고취시키는 방식이 아니겠어요?”

“그러는 성녀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흠칫, 하고 내 말에 성녀의 몸이 일순 떨렸다. 정곡을 찔린 듯 흔들리는 연분홍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고아들을 구하려고 목숨까지 바칠 생각은 없잖아요?”

“……그, 그건 단순한 자기보신의 논리에요.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소수의 선인들에게 허락된 일이지, 우리 같은 속 시꺼먼 인간들한텐 해당되지 않는다고요.”

나는 그 비루한 변명에 허, 하고 헛웃음을 삼키며 살짝 성녀를 흘겨보았다.

“속 시꺼먼 건 성녀님 혼자… 으윽!”

내 조롱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성녀의 꼬집기가 옆구리에 작렬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불합리했다. 하필 일행이 옆에 있어 성녀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 탓에 나는 일방적으로 성녀의 폭력을 감내해야만 했다.

진짜 언젠가 혼내줘야 하는데.

나는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는지, 성녀도 나를 꼬집고 나서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동공이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이내 성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요… 무의식적으로 그만.”

“하여간, 너무 귀족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성녀님도 그렇고 우리 귀족들도 그렇고, 다 똑같은 인간 아니겠습니까?”

“……저, 저는 다르다고요!”

성녀는 울컥해서 그렇게 외치고 말았다. 그래봐야 속삭이는 소리가 조금 커진 정도였지만, 일행의 시선이 잠깐 쏠릴 정도는 됐다.

그녀의 두 손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자 당황한 눈치였다. 다행스럽게도, 일행의 시선은 곧 거두어졌다.

성녀는 손 부채질을 하며 새빨개진 얼굴을 식혔다. 그러면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다시 폼을 잡으려 노력했다.

“고, 고아원 몇 개를 구해서는 고작해야 수백 명밖에 구할 수 없어요. 제가 고아 출신이라 잘 알아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제도의 개혁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고아들을 두고 도망치시겠다?”

“자,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성녀의 약점을 잡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성녀를 놀려댔다. 그러다 부들부들 떠는 성녀가 폭발 직전으로 보이자, 급히 수습을 시도했다.

“뭐, 개인의 자유이긴 하죠. 말마따나 남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이미 성녀는 삐진 뒤였다. 그녀는 잠깐 나를 흘겨보더니,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웃긴 여자였다. 시비는 본인이 먼저 걸어놓고, 삐지기도 먼저 삐지다니.

결국 일행 중에도 노닥이는 우리의 모습을 참지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유렌이었다.

그는 키득거리면서 나와 성녀에게 외쳤다.

“누님, 이안! 사랑싸움은 그만하고 슬슬 준비하지. 이제 곧 도착이라는데.”

“사, 사랑싸움 아닙니다!”

유렌의 농에 대한 성녀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나 또한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부정의 말을 내뱉으려다가, 몸을 굳혔다.

등줄기가 섬찟했다. 내 감각의 경계선에서 무언가가 내달리고 있었다.

판단은 빨랐다.

나는 성녀를 밀치고, 곧바로 칼을 뽑았다. 그리고 등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내리쳤다.

파각, 하고 뼈에 부딪히는 소리.

오러는 덧씌우지 않았기에 일검에 양단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흉측스러운 청색 동공을 가진 원숭이 하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엔 충분했다.

쭉 뻗은 팔에서 이어지는 손에서는 길쭉한 손톱이 칼날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어깻죽지부터 가슴 부근까지 검이 파고들지 않았다면, 저 손톱은 나나 성녀의 살갗을 파고들었을 터였다.

키에에에에엑!

그 비명 소리가 신호였다.

주위를 둘러싼 나무들 위로 하나둘씩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더욱 은밀하고, 더욱 빨랐다. 흉포함조차도 예전에 상대했을 때부터 한층 강해진 듯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수십에 이르는 그림자들이었다.

땅바닥에 엎어진 채로, 어버버하며 나를바라보고 있는 성녀를 무시한 채 나는 외쳤다.

“델핀 선배! 몇 마리쯤 됩니까!”

“모르겠어, 최소 수십! 적어도 오십 마리는 넘어!”

델핀 선배가 검을 뽑으며 내지른 목소리에 일행의 기세가 일변했다.

성녀와 엘시 선배를 중심으로 둘러싸듯 포진을 짠 우리는, 새벽녘의 흐릿한 공기를 타넘은 수십 쌍의 청색 눈동자를 마주해야 했다.

물론 괴물들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단숨에 십수 마리의 원숭이 마수들이 땅으로 뛰어들었다. 흙바닥을 박찬 원숭이들의 기민성은 상상 이상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내 신장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번이라도 방진이 뚫리면 성녀와 엘시 선배가 위험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질렀다.

푹, 하고 달려들던 원숭이 마수의 심장에 칼날이 틀어박혔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를 감상할 틈도 없이, 그 위를 뛰어넘어 내게 달려드는 원숭이 마수.

그러나 지금 내 검에서는 오러가 맺혀 있는 상태였다.

핏물이, 수직선을 그린다.

단숨에 올려벤 종베기가 또 하나의 원숭이 마수를 양단했다. 그러고도 달려드는 마수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지난 두 달간 부쩍 성장한 내가 이 정도라면, 셀린은 볼 것도 없었다.

나는 델핀 선배 쪽을 살폈다. 과연 우리 중 최고의 실력자답게, 그녀는 벼락같은 찌르기로 원숭이 마수 3마리를 순식간에 고혼으로 만들어 버렸다.

원숭이들은 심장이 불타는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다 죽음을 맞이했다. 금빛 오러에 닿은 살갗이 지글지글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델핀 선배는 조금 신중해진 눈빛이었지만, 아직 여유가 남아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델핀 선배에게 외쳤다.

“델핀 선배! 셀린을 보조해 주세요!”

“……그럼 내 빈 자리는?!”

델핀 선배로부터 온 반론은 지당했다. 나는 또 다시 달려드는 원숭이 마수의 목에 칼을 꽂아넣은 채로, 내던지듯 칼을 빼며 측면에서 엄습하던 원숭이 마수를 격추시켰다.

갑작스레 동료의 시체에 얻어맞은 원숭이 마수는 어리둥절해서 몸을 일으켰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날아든 손도끼였다.

빠각, 하고 핏물과 뇌수가 허공을 수놓았다.

그제야 약간의 여유가 생긴 내 입이 다시금 고함을 터트렸다.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내 말을 들은 델핀 선배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셀린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셀린은 중검을 주로 쓰는 검사였다. 다대다 난전에서는 유독 효율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아무리 저래도 둘이 붙어 있으니, 델핀 선배가 틀어막고 있던 영역만큼은 아니라도 최소 1.5인분은 할 수 있을 터였다. 남은 0.5인분만 내가 틀어막으면 됐다.

그러면 성녀와 엘시 선배의 지원이 나오기 시작할 테니 더욱 안정적으로 전투를 진행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또 다시 날아든 원숭이 마수의 몸에 칼을 쑤셔 박고, 등 뒤를 노린 놈을 엎어치면서 엉거주춤 손도끼를 회수했다.

이조차도 종일 이어질 전투의 시작에 불과하리란 예감을, 애써 무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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