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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20화 (120/649)

〈 120화 〉 2. 주께서 함께 하신다(41)

* * *

동굴의 끝에는 깊고 넓은 구덩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생물이 눈에 띄었다. 마치 혹덩이들을 이어붙인 듯한 생명체였다.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긴 한데, 팔다리만 보자면 일단 사지를 가진 채 이족보행을 하는 듯했다.

움직이는 것만 해도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그러나 구덩이에는 미동도 없이 널브러진 동종의 생명체들도 많아, 저중에서 얼마나 많은 개체가 활동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압권은 그 중앙에 위치한 기괴한 나무였다.

살점으로 이루어진 듯한 그 나무는, 꿈틀거리며 고동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무를 뒤덮은 굵직한 혈관들이 핏빛을 내뿜었다.

그럴 때마다 나무의 가지로 추정되는 곳에 매달린 고치들이 빛을 발했다. 괴로운 듯 꿈틀거리는 그림자의 모습이 그 얇은 피막 사이로 비쳤다.

“……저건 뭐야.”

“‘살점 둥지’야.”

멍하니 중얼거린 내 목소리에, 유렌이 대답했다. 일행의 시선이 유렌에게 몰렸다.

그는 무척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턱을 쓰다듬고 있던 그는, 곧 ‘살점 나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화에 따르면, 인류와 델피렘이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지. 다들 알다시피 그게 ‘신마대전’이잖아? 그 당시를 묘사한 희귀한 기록에 나와 있는 괴물이야. 델피렘의 잘린 엄지에서 자라난 무시무시한 놈이지.”

신마대전이라고?

그야말로 느닷없는 소리였다. 진실인지 허구인지도 모를 신화 속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크게 고동쳤다.

심장을 건드리던 묘한 고양감이 거세졌다. 허억, 하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다행스럽게도 일행은 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들 유렌의 이어지는 말에 집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주위를 돌아다니는 놈들은, ‘살점 씨앗’이야. 살점 둥지를 수호하고 개중에 몇몇은 또 다른 살점 둥지로 자라나지.”

“……저 징그러운 나무를 수호한다고?”

“응, 겉보기엔 약해 보여도 기록에 따르면 꽤 강해. 당시 천신의 가호를 받은 군대도 꺼려하던 상대들이라고 했으니까.”

저 굼떠 보이던 괴물들이 도대체 어떻게 나무를 수호할 수 있다는 건지, 나는 의문을 담아 유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렌은 내게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정보는 이게 끝이야. 목격증언은 충분히 확보한 것 같으니, 슬슬 돌아가는 게 어떨까?”

내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유렌의 말은 옳았다. 이대로 돌아가서, 제국이나 성국에 보고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인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살점 둥지’라는 신화시대의 괴물을 목격했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성과였다.

도리어 너무 놀라운 업적이라 곤란할 정도였다. 물증이 없다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성녀와 델핀 선배, 엘시 선배가 있었다. 국가의 의사결정 과정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자들, 그러니 굳이 물증을 채집하는 위험까지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군대가 파견되기까지 조금 절차가 복잡해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이곳에 군대가 당도하는 미래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 습성조차 알 수 없는 신화시대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야, 군대에 맡기는 편이 몇 배는 나은 선택지였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왜, 내 입술은 자꾸만 떨어지지가 않는가.

내 눈이 힐끔힐끔 구덩이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서 살점 씨앗들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저들이 진정으로 무서워질 때 어떠한 모습을 보일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고양감이 더더욱 강렬해졌다.

허억, 하고 다시금 들이마셔지는 숨결.

긴장한 낯빛으로 퇴각할 채비를 하고 있던 일행의 눈동자가, 서서히 나를 향했다.

퇴각 지시가 아직도 떨어지지 않아 의아한 듯했다. 나 또한 의문이었으니 그들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기묘한 직감만 믿고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나 혼자라면 몰라, 지금 나는 일곱 명의 전력을 이끄는 입장이었다.

혹여 저 구덩이 아래쪽에 있는 괴물들이 눈치라도 챌까 봐, 나는 상반신을 바짝 숙이고 조심스레 속삭였다.

“……전원 최대한 은밀하게 물러납니다. 후방은 저와 델핀 선배가 지키고, 유렌부터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자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 진형을 재편했다.

최전방은 유렌이 지키고, 그 뒤로 성녀와 엘시 선배, 그리고 셀린과 세리아가 뒤따르고, 델핀 선배, 내가 최후방을 맡았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기습을 대비해서였다.

전방에서는 또 다시 원숭이 마수의 습격이 있을지도 몰랐고, 후방에서는 저 괴물들이 어떻게 반응해 올지 알 수가 없었다.

굳이 후방에 더 많은 전력을 배치한 까닭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무심코 저 괴물들의 위험도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당장은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우스운 판단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일은 간단히 풀리지 않았다.

유렌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들어서려던 그 순간, 내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잠깐!”

본능적으로 발을 내딛고 있던 유렌의 동작이 멈췄다. 그의 의아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어느새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 눈이 흘깃 구덩이 아래쪽을 향했다.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던 살점 씨앗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었다. 그 대신, 그들은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새끼들, 우리 노려보고 있는데?”

“이런 씨발.”

내 말에 유렌은 자그맣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평소에는 고상하고 기품 있는 그였으나, 전투에 들어가면 어린 시절에 고아원에서 배운 걸걸한 입담을 자랑했다.

셀린의 표정이 창백해졌고, 세리아는 진지한 낯빛으로 내게 물어왔다.

“혹시 습격하려는 조짐이 있나요?”

“아직은 없어… 유렌, 천천히 물러나 봐.”

유렌은 그 말을 듣고, 내딛으려던 발을 서서히 뒤로 물렸다.

그러자 살점 씨앗들은 귀신 같이 평상시의 움직임을 되찾았다. 다시 어기적거리며 구덩이 속을 노니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직 긴장한 낯빛의 일행들에게 상황을 전했다.

“다시 꿈틀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어.”

내 말에 끄응, 하고 엘시 선배가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이중에 마법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었으니, 내 말을 듣고 무언가 떠오르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도망치면 신호가 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모양이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묻는 델핀 선배의 목소리에는 그녀답지 않게 다소의 초조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신화시대의 괴물을 앞두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는 없었던 듯했다.

엘시 선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블루사파이어빛 눈동자에서도 흐릿한 공포가 일렁였다. 정작 내뱉어지는 목소리 자체는 짜증스러웠지만 말이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저 선을 기준으로 일렬로 섰다 전력으로 튀어야지… 이렇게 비밀스러운 곳에 기밀 유지를 위한 장치가 하나도 없다 싶더니만, 방심시켰다가 뒤통수를 치려 했던 모양이야. 좆같은 마인 새끼.”

물론 이 상황을 만들어냈으리라 추정되는 당사자를 향한 욕지거리도 빠지지 않았다. 엘시 선배는 조금 겁먹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곤란한 일이 생기자마자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모양새가 마치 강아지 같았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엘시 선배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엘시 선배. 선배 정도는 안고 달릴 수 있으니까.”

“……으, 응?! 아, 안아?!”

엘시 선배는 내 말에 깜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 떨며 펄쩍 뛰려 들었다.

그 전에 내가 진정하라는 듯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제지시켰지만 말이다.

괜히 큰 움직임을 보여 살점 씨앗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엘시 선배를 설득했다.

“그렇다고 업고 갈 순 없잖아요? 후방에서 습격이 오면 다칠 수도 있는데, 안고 달리는 수밖에 없어요. 물론, 엘시 선배가 정 싫다면…….”

“아, 아니! 조, 좋아! 안아줘! 아니, 안아 주세요!”

엘시 선배는 혹여 내가 마음을 바꿀까 두렵다는 듯 다급히 대답했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와 비슷하게 안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일행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으면 족했다. 그리고 이중에서 임기응변에 가장 능한 건 나였으니, 내가 좀 더 부담을 지는 쪽이 맞았다.

그렇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 순간.

“……그럼 저는요?”

뾰로통한 목소리가 나를 쿡 찌르고 들어왔다. 내 눈동자가 그 진원지를 향했다.

성녀였다. 그녀는 어쩐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저는 누구한테 안겨야 하나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답했다.

“유렌한테 안기면 되죠.”

그러자 성녀와 유렌의 눈이 슬쩍 마주쳤다. 유렌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지만, 곧바로 성녀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쥐며 주저앉을 뿐이었다.

“아아, 주여!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는 처녀가, 그러지 않아도 절친한 사이인 동생과 못된 관계를 맺는다는 오해를 사도록 시련을 내리시는군요. 이 어린양은 어찌해야 할지…….”

“그럼 제가 안고 갈게요.”

우뚝, 하고 가식이 듬뿍 들어간 기도문을 읊던 성녀의 말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뜨인 연분홍빛 눈동자가, 그 제안을 건넨 이를 응시했다.

셀린이었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성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성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생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안으면 되잖아요. 여자끼리니까 오해를 살 일도 없고.”

“하지만, 셀린 자매님께서는 근력이…….”

“저, 마력량은 자신 있거든요. 근력도 이안 오빠보다 셀걸요?”

말문이 막힌 성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나를 향했다. 나는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성녀는 그대로 풀이 죽고 말았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에서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지시를 내렸다.

“그럼 엘시 선배는 제가 안고, 셀린이 성녀님을 안고 가겠습니다. 전원 퇴각 준비.”

그러면서 내가 다가서자, 엘시 선배는 화색이 만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기대되면서도, 긴장되는지 머뭇거리는 그 느낌.

델핀 선배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내가 안고 갈게.”

우뚝, 하고 내 움직임이 멎었다. 내 시야가 델핀 선배를 담았다.

그녀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엘시 선배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라이넬라는 내가 안고 가겠다고. 너는, 조장이잖아? 후방을 관리하면서 지시까지 내려야 하는데 신경 거슬리게.”

“……괜찮겠어요?”

델핀 선배와 엘시 선배의 살벌한 사이를 알고 있던 나는 그렇게 물었으나, 델핀 선배는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럼, 나한테 맡겨.”

잠시 망설였지만 델핀 선배의 의견이 더욱 합리적이었다.

결국 나는 엘시 선배에게 다가서던 몸을 물렸다. 그러자 희비가 교차했다.

기대로 가득 찼던 엘시 선배의 얼굴에 쩌저적 금이 갔다. 델핀 선배는 그 모습을 보며 더욱 즐거운 미소를 지었고, 성녀는 반색하며 물었다.

“그, 그럼 저는…….”

“제가, 안고 간다고 했어요.”

그마저도 셀린의 뼈 있는 한 마디에 사그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퇴각도 전에 벌써부터 난리였다. 다들 긴장도 되지 않나.

내 눈이 다시 한 번 구덩이 밑을 향했다.

저 꿈틀거리는 혹덩어리들이 자꾸만 걸리적거렸다. 마치 바늘로 시신경을 찌르는 듯했다.

심장이 고동치고 있었다. 너무나 거칠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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